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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복삼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01438
한자 三復三罷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장여동

[정의]

전라남도 여수현(지금의 여수시)이 세 번 폐현되었다가 네 번째 복현(復縣)을 이룬 것.

[개설]

1396년(태조 5)에 조정에서 새로운 왕조(王朝)의 건국에 관한 교지(敎旨)를 전국에 내렸는데, 당시 여수의 현령(縣令) 오흔인(吳欣仁)은 태조의 혁명을 단호히 반대하며 사신을 거절하였다. 이로 인해 태조는 대노하여 여수의 폐현을 명하고 순천부에 예속시켰다.

순천에 예속된 여수 백성들은 훗날 전라좌수영이 설치되면서부터 날로 생활의 불편과 폐해가 심하여 불만이 쌓여갔고, 여수의 복현(復縣)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여수 백성들은 급기야 사활을 걸고 복현을 강력히 주장하여 세 번씩이나 성취하였지만, 순천부의 아전들이 갖은 모함으로 조정을 설득하여 세 차례 모두 무산되고 말았다.

[제1차 복현]

제1차 여수 폐현은 오흔인 현령의 강직한 정치 신념에 대한 태조의 감정적인 보복조치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누차의 상소문들이 묵살되자 애향지사들인 차동궤를 비롯하여 오석조, 차국태, 황성룡 등 4명은 한성에 올라가 신문고를 울려 직소하였으나 반대상소에 밀려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백성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복현 운동을 펼쳐 마침내 1696년 정월 조신 이총립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여수도호부가 설치되었다.

1696년(숙종 22) 전라좌수사 최극태가 도호부사를 겸직하게 되었고, 용두면, 율촌면, 소라면, 삼일면, 여수면 등 5개 면을 관하에 두었다. 여수현이 혁파되고 실로 300년 만에 얻어낸 지역민들의 승리였다. 그러나 채 1년도 못되어 도호부는 혁파되어 순천으로 예속 복귀되고 최극태 수사는 암행어사에게 끌려가 파면되었다.

[제2차 복현]

1722년 12월 21일 『경종실록』에 따르면, 헌부에서 전개하여 거듭 아뢰기를 “전라도에는 예전에 여수현이 있었는데, 중간에 그 지방에 수영을 설치하고 현을 폐한 후 순천부에 예속시켰습니다. 그런데 수영을 이진한 뒤에 그 수영은 구진이라 하면서 잡역을 전례에 의하여 침독하고, 순천은 그의 소속 관아라 하여 부렴(세금)을 부과하니 한 지방의 백성들이 두 곳에 끼어서 책응하게 되어 감당하지 못하니, 순응, 영양, 자인 등의 고을의 예를 따라 다시 구현을 회복하고자 합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좌수영으로 하여금 겸찰하게 하여 두 아문에서 침징하는 폐단을 면하고자 합니다. 그 억울함을 하소연 하는 것이 진실로 불쌍히 여길 만하니, 청컨대 묘당으로 하여금 민원에 의하여 장점을 따라 변통하여서 한 지방의 심한 고통의 위급한 처지를 풀어주소서.” 이 같은 사헌부의 전개도 지역민의 수차례 상소에 의한 것이나 임금은 헌부의 전개를 따르지 않았다.1725년(영조 1) 8월 6일 『영조실록』에는 지평 이근(李根)이 구언교지에 응하여 상소하였는데 여수의 백성들이 순천의 속읍으로서 당하는 폐해를 들어 주어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임금은 의정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제1차 복현 때와 같이 5개 면을 관할하는 여수도호부의 설치의 뜻을 이루었다.

이 때에도 전라좌수사 원백발이 도호부사직을 겸하게 하였다. 그러나 지평 이광웅은 오히려 분읍(分邑)을 한 뒤에 폐해가 작지 않다며 복현의 주장은 간사한 백성들의 농간이라며 즉시 합속시킬 것을 주장하였고, 1725년 9월 5일 『영조실록』에 보면, 임금이 대신과 비국의 당상을 인견하는 자리에서 여수·순천의 합속에 대하여 물으니 좌의정 홍치중 역시 혁파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여 복현 1년 만에 여수도호부는 또다시 혁파되었다.

어영대장인 이봉상 마저 혁파가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는데, 이 때 여수의 복현 상소를 올렸던 정종선은 순천의 일부 아전배들이 간사한 꾀를 부리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는 훗날 구체적으로 여수가 복현될 경우 인구가 감소하고 따라서 순천부사의 봉록이 1/5로 감소하고 아전들의 권력 또한 1/5로 축소되는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제3차 복현]

1750년(영조 26)에도 여수 백성들의 복현에 대한 열망은 식을 줄을 몰랐다. 폐현된 지 24년 만에 여수는 다시 복현되어 여수도호부사는 전라좌수사가 겸임하였다. 정종선은 1811년(순조 10)에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월산리 65번지[호산마을]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경사에 능통했고, 20세 전후에 소과에 합격하였다. 정종선은 1864년(고종 1)에 여수현 복현 상소를 올려 삼복삼파 이후 주춤했던 복현 운동에 다시금 불씨를 당겼다. 문장이 뛰어날 뿐 아니라 상소의 내용이 복현 운동 역사 전체의 줄거리를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어 이 내용만으로도 삼복삼파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큰 가치가 있다.

여수현의 삼복삼파 이후 1864년 정종선여수현 복현 상소가 복현 운동의 효시가 되어 1887년(고종 24)에 또다시 맹렬한 복현 운동이 벌어졌다. 이때에도 순천부의 거센 방해공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복현 운동의 주동자인 최창모(崔昌模), 정동열(鄭東烈), 유봉의(兪鳳儀) 등 세 지사(志士)만 화를 입고 유금(流禁)되고 말았다.

1896년 2월에 완도나 돌산과 같은 섬마저 군이 되었으나 유독 여수만은 그렇게 열심히 복현 운동을 하였으나 결국 여수군 설군 문제는 묵살되고 여수는 여전히 순천부 관할에 묶여 있었다. 형평에 맞지 않은 조정의 처사에 분개하여 1896년 3월 18명이 동맹하여 이 고장의 비원을 풀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다.

이들은 만약 뜻을 이루지 못하면 고기밥이 되리라는 비장한 각오로 복현 운동에 나섰다. 18명의 동맹자는 정시홍(鄭時洪), 유하열(柳河裂), 정충섭(丁忠燮), 유민열(柳敏烈), 주봉성(朱鳳成), 황안성(黃安性), 김병두(金秉斗), 정지섭(丁芝燮), 유계열(柳啓烈), 정시현(鄭時鉉), 황운수(黃雲秀), 김재호(金在浩), 최현호(崔炫浩) 등이다.

1896년(건양 1) 8월 4일 칙령 제36호로 13도 제도가 시행됨에 따라 전라남북도가 분리되어 초대 관찰사에 윤웅열(尹雄烈)이 임명되어 여수 백성들의 복군 운동을 살피기 위해 여수에 도착하고 보니 갑오년 동학 때 시가지는 불타고 좌수영마저 철폐되어 백성들이 모두 떠나려 한다는 사정을 파악한 후 여수 백성들이 순천에서 분읍 하려는 것이 마땅하다고 인정하여 여수 복군을 조정에 건의하기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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