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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01440
한자 義兵
영어음역 Righteous Army
이칭/별칭 의승수군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장여동

[정의]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외침으로 국가가 위태로울 때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하여 싸웠던 군대 또는 그 군대의 구성원.

[개설]

한국은 지정학적인 특수성으로 인해 유사 이래 외세의 침략을 특히 많이 받아 멀리는 고구려민과 백제민의 국가 부흥을 위한 의병 투쟁으로부터 가까이는 일제강점기 중국에서의 항일 의병 투쟁에 이르기까지 많은 의병 운동이 있었다.

그러나 의병의 역사에서 가장 탁월한 활동을 보여준 것은 조선시대의 임진왜란·정묘호란·병자호란 및 구한말의 항일 의병이었다.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일어났던 중요한 의병으로는 임진왜란 당시 흥국사를 거점으로 승려들이 조직한 의승수군을 들 수 있다.

[의승수군]

1592년(선조 25) 일본은 오랫동안의 혼란기를 수습하고 전국시대를 통해 얻어진 조직화된 군사력을 바탕으로 조선을 침공하였고 거의 무방비 상태에 있던 조선은 관군이 패전을 거듭하게 되면서 서울까지 함락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이 주요 도로를 따라 서울로 진격하였고 후방에는 요지에다 수비군만 주둔시켜 하삼도(下三道) 대부분 지역에는 일본군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게 되어 의병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었다.

당시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는 흥국사를 거점으로 승려들이 의승수군을 조직하여 전라도 수군과의 긴밀한 연계 속에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의하면 “의승수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8~9월경에 조직되었으며 관내에 있는 승도 4백여 명을 규합하여 주로 경상우도와 전라좌도를 있는 요해처를 경계토록 한다.”고 되어 있다.

또한 『이충무공전서』에는 “또 신이 모집하여 거느린 의승병과 삼도의 날래고 용감한 사부(射夫)들을 태운 10여 척의 전선을 동으로는 안골포에 서로는 제포에 상륙시켜 결진하자 그 적들은 수륙으로 협공 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동서로 분주하며 응전하였으나 의승병들이 창을 비껴들고 휘두르며 혹은 활과 총으로 하루 종일 돌격하여 무수한 적을 쏘아 맞혔으며 비록 적의 머리를 벤 것은 없어도 우리의 군졸은 상한 자가 없었습니다.”라는 기록이 나올 정도로 임진왜란 당시 의승병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는지 알 수 있다.

이후 의승수군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다음에도 약 3백 명 정도의 규모로 전라좌수영 산하의 상설군으로 편제되어 수행(修行)과 군무(軍務)를 병행하였다. 승대장은 주로 주지를 역임한 인물이 맡았으며 각 편대는 수행 계위가 높은 노덕(老德)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조정에서도 가선대부나 통정대부 등의 관계를 내렸다. 또한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에 의하면 본영 내의 진남관 동편에 승청(僧廳)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군사력에 있어 승군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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