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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02158
영어의미역 Southwest Province which was the Percussion Cap for National Defence: Japanese invasion of 1592 and Left Navy in Jeolla-do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병호

[개설]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 일어난 임진왜란에서 조선이 승리할 수 있었던 데는 뭐니뭐니해도 전라좌수영과 당시 전라좌수사로 있던 충무공 이순신의 공이 크다. 전라좌수영은 전라도 지역에 왜구의 침범이 잦아지자 전라좌도 수군을 강화하기 위하여 1479년(성종 10) 정월에 신설한 군영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왜구와 접촉이 심했던 경상도와 전라도에 각각 좌·우 양영으로 수군이 편성되었는데, 각 수영은 수군절도사가 다스렸다. 각 도의 동편, 즉 서울에서 보아 좌편을 전담하는 주진(主鎭)을 좌수영이라 하고, 우수영은 각 도의 서편, 즉 서울에서 보아 우편에 설치하였다.

[전라좌수영의 편제 체제]

임진왜란 당시의 지방 수군조직하에서 전라좌수영은 어떻게 조직적인 분영(分營)을 두고 운영되었을까. 조선시대 나라를 다스리는 준칙이라 할 수 있는 『경국대전(經國大典)』 등의 문헌에 의하면 본시 수군 조직은 수사(水使) 밑에 첨사(僉使) 및 만호(萬戶)만이 소속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이 경상도의 왜적을 치러 가기 전에 조정에 올린 장계와 순조 때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의 군정편(軍政篇), 그리고 『호남영지(湖南營誌)』의 좌수영편 등 문헌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평시체제에서 전시체제로의 전환이 유기적으로 잘 되어 있는 이상적인 수군 조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수사(水使)의 관할권이 직속된 첨사와 만호뿐만 아니라 육지의 수령인 도호부사, 군수, 현감 등에게도 미치는 임기응변의 유기적인 해안방비책이 세워져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즉 순천도호부와 낙안군 및 흥양현과 같은 육지의 행정구역인 오관(五官)과, 방답진이나 사도진 같은 수군의 행정구역인 오포(五浦)가 얼핏 서로 분리되어 명령 계통을 달리한 것 같이 보이지만 실은 전라좌수사의 관할로 들어가 있었다.

전라좌수영이 관할하는 연해(沿海) 육지의 행정구역인 오관은 정3품의 도호부사가 다스리는 순천도호부 아래 정4품의 군수가 다스리는 낙안군과 보성군, 그리고 정6품의 현감이 다스리는 광양현과 흥양현[고흥] 등 다섯 고을이었다.

역시 전라좌수영이 관할하는 본래의 수군 행정구역인 오포는 전라좌수영 본영을 바다 쪽에서 직접 엄호하기 위하여 종3품의 첨사가 지키는 방답진(防踏鎭)[현 여천군 돌산면 군내리 지역]과 사도진(蛇渡鎭)[현 고흥군 점암면 금사리 지역], 종4품의 만호가 지키는 여도진(呂島鎭)[현 고흥군 점암면 여호리 지역]과 발포진(鉢浦鎭)[현 고흥군 도화면 내발리 지역] 및 녹도진(鹿島鎭)[현 고흥군 도양읍 녹동 지역] 등 모두 다섯 진포였다.

이들 오관과 오포는 평상시에는 목민식산(牧民殖産)에 힘쓰다가 유사시에 전라좌수사의 명령이 하달되면, 지체없이 각 선소(船所)에 있는 전선에 필요한 인원을 소집하여 탑승시키고, 전비를 갖추어 전라좌수사가 있는 전라좌수영에 집결하여 전라좌수사의 관할에 들어가는 수군조직이었다.

오관과 오포에 소속된 병졸은 병졸대로, 일반 백성들은 필요에 따라 수시로 소집되어 전선의 승조원(乘組員)으로 충원되었다. 수군병졸의 경우 조상 대대로 직이 세전(世傳)되고 타역(他役)에도 전용될 수 없는데다, 20세부터 60세까지 매월 반 개월씩 교체 복무해야 하는 일종의 전문직이었다.

이들은 토착민인 까닭에 해안의 지세 및 조수(潮水) 등에 관해 잘 알고 있어 지형 지물의 이용에 능하였고, 전투의 여가에는 식산(殖産)에 종사하는 둔전병(屯田兵)으로 일하여 군량이나 양곡의 자급자족도 가능했다. 더욱이 연해 주민들의 대다수가 아버지나 아들, 또는 남편이 수군으로 근무하기 때문에 전라좌수영에 대한 지지가 두터웠는데, 이는 곧 전쟁 중에 적의 활동을 염탐하여 정보를 제공하는 등 아군의 작전 수행에 큰 도움이 되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임명된 것은 1591년(선조 24) 2월 13일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바로 전해의 일로서, 좌의정 겸 특명 이조판서이던 유성용의 천거에 의해서였다. 당시는 군기와 사기가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져 왜구선(倭寇船) 10여 척만 쳐들어와도 온 나라가 소란스럽던 때로서, 당시 이순신의 나이는 47세였다.

이순신이 수사(水使)로서 맨 처음 뼈저리게 느낀 것은 군관(軍官)과 색리(色吏)들의 토색질이었다. 군관과 색리라면 군의 중견 간부들인데, 이들은 기회만 있으면 상관의 눈을 속여 일을 적당히 처리하고 기회만 있으면 자기네 뱃속만 채우려 하였다.

이런 실정이므로 군기가 제대로 유지될 리 없었고, 함선은 함선대로 썩은 채 선창에 매달려 있었다. 사병은 사병대로 사역(使役)을 보내면 민가에 폐나 끼치고 그것을 두려워할 줄 몰랐다. 그런가 하면 군인의 구실을 다하게 할 병기(兵器) 관리도 엉망이어서, 칼은 녹슬고 활은 줄이 떨어졌으며, 갑옷은 좀이 먹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렇듯 불합리하고 잘못된 점을 시정하기 위해서 이순신전라좌수영 본영은 물론이고 각 진포(鎭浦)를 일일이 검열하여, 죄줄 것은 죄주고 고칠 것은 곧 고쳐 임전태세를 완비하였다. 지금 남아 있는 이순신의 일기에는 전라좌수영 본영에 도임한 1591년의 기록은 없고, 다만 다음 해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그가 실시한 일만 알 수 있다.

당시 그가 남긴 기록에는, 좌의정 유성용에게서 『증손전수방략책(增損戰守方略策)』을 받아 보고는, “이것을 보니 수전(水戰)과 육전(陸戰)에서 여하히 화력(火力)을 사용하여 적을 치느냐 하는 것이 하나하나 잘 기술되어 있으니 참으로 만고에 기이한 병법이다.” 하면서 기뻐하는 모습도 보인다.

또한 1413년(태종 13) 2월의 실록에서부터 보이는 ‘거북선’을 개량하여 1592년 4월 12일에는 거북배에 장치한 대포 쏘는 시험사격을 하였다. 이 함재화포(艦載火砲, 함선에 적재한 화포)야말로 고려 말 최무선(崔茂宣)정지(鄭地) 등에 의하여 개발된 것을 이순신이 개량하여 거북선뿐 아니라 보통의 전선에도 적재 장치하여 그 성능을 십분 발휘했던 것이다.

이밖에 신무기로 쓰는 장병겸(長柄謙)과 네 개로 이루어진 쇠갈퀴를 사슬에 매어 적선을 끌어당겨 오게 하는 사조구(四爪鉤)도 개발하였다. 이와 같이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일 년여 동안 전면적인 수군의 재검토와 자력으로 가능한 전비를 갖추어 임진왜란을 맞이했던 셈이다.

예나 지금이나 유능한 지휘관은 언제 전쟁이 일어나든 충분한 준비를 갖추고 있다가 이에 임하는 항시 임전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준비 없는 싸움이란 있을 수 없어서, 허세만으로는 언제 어떠한 방법으로 적에게 봉변을 당할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전라좌수영 관하의 전라좌도 수군은 이순신의 도임을 기점으로 썩은 배는 새로 만들고 녹슨 칼은 갈고닦아 번쩍이게 했는데, 이것이 바로 백전백승의 무적 전라좌수영 함대를 만든 요인이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