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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01751
한자 昌武里
영어음역 Changmu-ri
이칭/별칭 문구지,문꾸지,칭마징이,창무정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창무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종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법정리|행정리
면적 3.96㎢
총인구(남, 여) 578명[남자 290명,|여자 288명][2022년 9월 6일 기준]
가구수 288가구[2022년 9월 6일 기준]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유래]

화양면의 입구에 있는 창무마을은 일제강점기 이전까지도 ‘문꾸지’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문꾸지’는 ‘문이 있는 곳’이란 뜻이다. 조선시대 화양면 지역에 곡화목장이 설치되어 말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송소마을에서 오천마을에 걸쳐 성을 쌓고, 성문을 이 마을에 두었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다.

지금의 ‘창무’란 이름도 ‘문꾸지’와 관련이 있다. 이 지역의 옛 땅 이름 중 하나인 ‘창마징이’의 유래에서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고 전해오는데, ‘칭마징이’는 ‘창으로 막고 있는 곳’이란 뜻이다.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있어서 생겼다는 이야기와 돌산만호진 입구를 지키는 창을 든 초병에서 유래했다는 두 가지 이야기가 지금도 전해온다. ‘창마징이’의 음을 표기하여 ‘창무정(昌武亭)’이라고 기록한 내용은 1789년의 『호구총수』이며, 기록으로 처음 나타나는 이 마을의 이름이다.

창무리의 서쪽에 자리 잡은 백초마을은 본래의 ‘신추’라는 마을 이름을 ‘하얀 풀’이라는 뜻으로 해석하여 ‘흰 백(白)’ 자와 ‘풀 초(草)’ 자로 표기하여 ‘백초(白草)’라 하였다. 신추라는 땅 이름은 여수 지방 여러 곳에 등장하는 이름으로 거문도·소거문도·개도·낭도·돌산 등의 주로 해안 지역에 전해오는 땅이름이다. ‘센추’라고도 한다. 하얀 풀이 많은 지역으로 알려진 ‘신추’나 ‘센추’라고 하는 이들 지역을 답사해보면 공통적인 지형의 특징이 나타나는데, 해안가의 바위가 절벽이나 급경사의 비탈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창무마을과 백초마을 사이에는 배나무가 많았다는 ‘배낭골’과 ‘잿등’을 비롯해 양달·잔닥개·두골골창·홈테골·속돌 등의 이 마을만의 독특한 땅이름들이 전해온다. ‘칠성바위’라고 알려진 7개의 고인돌 등이 마을의 오랜 역사를 전해준다.

[형성 및 변천]

조선시대 『호구총수』에 ‘창무정’으로 기록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백초·화교를 포함하여 법정리인 창무리가 되었다. 백초리·화교리·창무리 등의 행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자연환경]

마을 서쪽은 비봉산이 있어 서고동저형의 지형으로, 평지에 마을이 들어서 있다. 대부분이 바다를 끼고 있는 화양면 지역에서 바다와 접하지 않은 마을에 속한다.

[현황]

2022년 9월 6일 기준, 총 288세대에 인구 578명[남자 290명,|여자 288명]이 살고 있으며, 농업을 주업으로 한다. 화양면의 입구에 자리하고 있고, 북으로는 소라면 관기리에 접하고 남으로는 용주리에 접하며 마을 동쪽으로 국도 77호선이 지난다. 관기마을과의 사이에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관기들이 넓게 펼쳐지고, 마을 남쪽으로는 밭이 많아 갓과 옥수수·수박·토마토 등을 많이 재배한다.

창무리에서는 근대에 훌륭한 선각자들을 배출하였다. 먼저 여수 지역 3·1운동의 기수로 알려진 이 마을 출신의 윤자환 열사는 천도교도로서, 1919년 3월 2일 전라북도 남원의 유태홍의 집에서 기미독립선언서와 만세운동을 촉구하는 대자보를 가져와 율촌 등 여수 지역에 전파하다 검거되어 옥고를 치른 인물이다.

같은 집안의 윤형숙 열사는 20세의 어린 나이로 광주 수피아여학교를 다니다가 서울의 3·1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1919년 3월 10일 광주 장날을 맞아 광주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일본 경찰의 칼날에 한쪽 팔을 잃으면서도 만세를 부르다 잡혀가 대한여성의 기개를 한껏 드높인 인물이다. 감옥을 나와서도 결혼하지 않고 개화기의 사회계몽 운동에 헌신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두 열사의 행적은 주변에는 알려졌지만, 관심을 두는 이가 적어 묻혀 있다가 향토사가와 문중의 노력으로 시에 전해져, 최근에야 정부의 조사가 이루어져 서훈하였다.

창무리 입구는 지금도 촌로들이 ‘문(門)’이라 부르는데, 윤형숙 열사의 묘소가 이곳에 위치해 있어 오가는 이의 귀감이 되고 있다. 목장의 경계를 하였던 만리성은 지금도 여러 곳에 성터의 흔적이 남아서 화양 지역의 역사를 전해 준다.

백초마을은 동물 가면을 이용한 좌수영 수군들의 진중농악인 ‘신추농악’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러나 진중농악의 기능 보유자들이 연로하고, 이를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없어 후세에 전수하지 못해 마을의 나이든 주민들은 안타까워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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