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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01986
한자 全羅左水營城址
영어의미역 Fort Site of Left Navy in Jeolla-do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고소동|동산동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병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성곽|평지성|석성
원건물 건립시기/일시 1479년연표보기
소재지 주소 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고소동|동산동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고소동·동문동에 있는 조선 전기 전라좌수영 성지.

[개설]

1479년(성종 10) 전라좌수영이 창설됨에 따라 전라좌수영성 축조와 함께 관내 청사도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전라좌수영성은 창설 당시에는 둘레가 1.7㎞나 되는 성터로서 여수 진남관 외 78개 동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중 기록에 남아 있는 전라좌수영성 내 청사(廳舍) 34개 동은 다음과 같다.

좌어변청(左禦邊廳)은 수군들이 좌변 경계를 맡은 곳이다. 우어변청(右禦邊廳)은 수군들이 우변 경계를 맡은 곳이다. 잉번청(仍番廳)은 숙직을 담당하는 곳이다. 진무청(鎭撫廳)은 수영(水營)에 소속된 서리들이 집무를 보던 곳이다. 통인청(通引廳)은 수사(水使)의 심부름이나 행차 수행, 명령 전달 등을 맡아 처리하던 이속(吏屬)들이 있던 곳으로 11칸이었다.

계서청(啓書廳)은 임금에게 상주(上奏)하는 글을 작성하는 관리들이 집무하던 곳이다. 장관청(將官廳)은 좌수사 집무처이다. 이군관청(二軍官廳)은 제2군관청이다. 궁시청(弓矢廳)은 화살을 만들고 관리하는 곳이다. 장방청(長房廳)은 좌수영에서 근무하는 서리가 집무하던 곳이다. 군뢰청(軍牢廳)은 죄인을 다스리는 병졸들이 집무하던 곳이다. 이군뢰청(二軍牢廳)은 제2군뢰청이다.

관노청(官奴廳)은 수영에 속해 있던 관노들이 쓰던 곳으로 모두 10칸이었다. 취수청(吹手廳)은 취고수(吹鼓手)들이 지내던 곳이다. 교방청(敎坊廳)은 행사가 있을 때 가무(歌舞)를 맡아보던 곳이다. 첨공청(添工廳)은 공사(工事)를 맡아 관리하던 곳이다. 혜장청(鞋匠廳)은 수군들의 신발을 만들고 관리하던 곳이다.

야장청(冶匠廳)은 대장장이와 대장간을 관리하던 곳이다. 별포청(別砲廳)은 별포(別砲)를 제작 관리하던 곳이다. 원포청(元砲廳)은 원포(元砲)를 제작 관리하던 곳이다.사부청(射夫廳)은 활을 쏘는 사부(射夫)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사공청(沙工廳)은 사철(沙鐵) 담당 관리들이 집무하던 곳이다. 기수청(旗手廳)은 신호기(信號旗)를 맡아 관리하던 곳이다.

직방차기청(直房車器廳)은 마차를 관리하던 곳이다. 향장청(鄕長廳)은 우후(虞侯)의 부관들이 집무하던 곳으로 8칸이었다. 수첩군관청(守堞軍官廳)은 성첩(城堞)을 지키던 군관들이 집무하던 곳이다. 인리청(人吏廳)은 백성을 관리하던 곳이다. 호장청(戶長廳)은 고을의 우두머리들이 집무하던 곳이다. 형리청(刑吏廳)은 향리들의 집무처로, 모두 7칸이었다.

서원청(書員廳)은 좌수영에 배속되어 주로 행정 실무를 담당한 곳이다. 관주청(官廚廳)은 수사 및 관리들의 음식을 만들고 관리하던 곳이다. 사령청(使令廳)은 천한 일을 맡아 보던 관리들이 거처 하던 곳으로 15칸이었다. 중영연방(中營椽房)은 좌수영 중영(中營)을 관리하던 곳이다. 우후아사(虞侯衙舍)는 절도사를 보좌하는 일을 맡아보던 정4품 무관들의 숙소이다.

[변천]

전라좌도는 경상우도와 함께 적로요해처(敵路要害處)이기 때문에 전라좌수영성이 축조되었다. 전라좌수영성은 1479년(성종 10) 내례포(內禮浦)를 철폐하여 수군절도영을 설치하고 수군절도사를 두면서 변화되었다. 1485년(성종 16) 3월 모옥(茅屋) 대신 성보(城堡)를 축조하기 시작하여 1491년(성종 22)에 완성하였다. 1497년(광해군 3) 절도사 이량이 돌을 운반하여 장군도 왼쪽에 축대를 쌓았으며, 1591년(선조 24) 이순신전라좌수영으로 부임해 서문 해자(垓字)를 축조하였다.

1593년(선조 26) 7월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이 거제 한산도로 진을 옮겼으나, 1년 후 절도사 이시언(李時言)이 본직(本職)으로 옮겨 삼도를 통제할 제영사(諸營舍)를 건설하였다. 1664년 절도사 이도빈(李道彬)진남관(鎭南館)·망해루(望海樓)·결승당(決勝堂)을 재건했으나, 1716년 화재로 진남관이 소실되었다. 1718년 절도사 이제면(李濟冕)이 진남관을 다시 중건했으나, 1895년(고종 32) 전라좌수영이 혁파되었다.

[위치]

전라좌수영군자동 북쪽의 종고산(鍾鼓山)을 배경으로 하고, 남동쪽의 얕은 예암산을 안산으로 하여 산줄기와 그 사이에 생긴 경사대지 위에 위치한다.

[현황]

전라좌수영성은 평지 석성으로 완성 당시의 규모가 둘레 3,634척, 동서 길이 1,200척, 남북 길이 908척인 동서로 약간 긴 형상이었다. 몇 차례 불타버리기도 했으나, 1774년 절도사 김영수가 성을 보수한 뒤의 기록에는 6곳의 곡성(曲城), 즉 치(雉)가 6개 있었으며, 여기에 포루(鋪樓) 6채를 세우고 화포기(火砲器) 6좌(坐)를 두었다고 하였다.

1847년 허섬(許暹)이 쓴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에는 체성(體城) 주위가 3,158포척(布尺)이라 하였다. 성 안의 샘과 우물도 각각 6곳과 7곳으로 대체적인 규모는 크게 변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완성 당시의 규모를 영조척을 기준으로 산정하면 약 1133.44m가 되는데, 이것은 현재 성곽의 유지(遺址)로 실측되는 1.74㎞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는 이후에 설치되는 치성(雉城)이나 옹성(甕城) 부분의 치수 산정 또는 측량 방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결국 1491년에 성체의 기본 골격이 완성되고, 이후 이 바탕 위에서 적절한 변용이 있었으나 큰 차이는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남쪽·동쪽·서쪽에 성문이 있으며, 남문 밖은 바로 바다와 면하여 성체의 형상은 원형에 가깝다. 영성(營城)은 다른 읍성의 경우와 다를 바 없는 배치로 『호좌수영지』의 영성도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객사 진남관이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으며, 남문에서 이곳에 이르는 가로는 객사와 동헌에서 노단경(路端景)이 된다. 즉, 가로망은 남문에서 동헌과 객사로 이어지는 남북축과 서문에서 동문까지의 동서축이 삼교차(三交叉)되는 곳에 객사와 동헌이 위치하며, 동쪽에 중영(重營), 서쪽에 향청(鄕廳)이 들어서 있다.

현재는 복개되어 도심 간선도로가 된 굴강(屈江)을 따라 남문에서 망해루(望海樓)와 진남관으로 이르는 남북축은 그대로 유지되어 있다. 서문에서 군자동중앙동의 경계인 골목길은 망해루에 이르고, 다시 여기서 진남관 동쪽 담장을 따라서 동헌에 이르러 동산동관문동의 경계인 골목길을 따라서 동문에 이른다. 도중에 중영(中營)과 장대(將臺)인 고소대(姑蘇臺), 기타 건물들로 연결된다. 이러한 가로망이 당시의 삼교차로(三交叉路)를 이루던 영성 내의 주요 간선도로로서 지금은 골목길로 변하여 남아 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가** 도명상자막에오타가많아요순신을승신으로1591년은19991으로확인하시길.... 2017.05.06
가** 자막에 오타가 많아요 순신을 승신으로 1591년을19991으로 .?확인하시길 2017.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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