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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좌수영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31058
한자 新湖左水營誌
이칭/별칭 『1815년 호좌수영지』,『해군사관학교 소장 호좌수영지』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문헌/전적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조미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술 시기/일시 1815년연표보기 - 『신호좌수영지』 저술
간행 시기/일시 1884년 - 『신호좌수영지』 개장
발견|발굴 시기/일시 2015년 - 『신호좌수영지』 해군사관학교에서 구매
관련 사항 시기/일시 2016년 6월 17일 - 『신호좌수영지』 관련 학술 세미나 개최
소장처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중원로 1[남빈동 1]
성격 지리지
저자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
편자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
간행자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
권책 1책
행자 11행 19자

[정의]

1815년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 있던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에서 간행한 지리서.

[개설]

『신호좌수영지(新湖左水營誌)』는 지리지의 작성과 별도로 표제 안쪽에 쓰여진 글귀를 통해 간행 시기를 확인할 수 있다. 지리지의 표제 안쪽에 “1815년(순조 15) 을해년에 읍지를 분장하였고, 70여 년이 지나 책이 손상되어 1884년(고종 21) 갑신년에 다시 개장하였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 기록은 『신호좌수영지』를 간행한 필체와 다른 필체로서 『신호좌수영지』를 개장할 때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내용으로 미루어 『신호좌수영지』는 1815년께 작성되었고, 1884년 이후 개장한 판본으로 유추가 가능하다. 일부 자료에는 이유수(李儒秀)가 1792년(정조 16)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부임한 해부터 1815년(순조 15) 사이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하나 이유수 전라좌도수군절도사는 『여수향교지』 등에 1815년 7월부터 1817년(순조 17) 7월까지 재임한 것으로 확인되기 때문에 1792년 간행은 오류로 판단된다.

[저자]

조선은 19세기 중앙정부에서 지방 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지방의 여러 정보들을 조사하였다. 특히 부세와 관련 있는 토지 규모 및 군역 인원 등 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지방의 정보를 조사하여 보고하게 하였다. 『신호좌수영지』는 이때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에서 중앙정부에 보고용으로 간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편찬/간행 경위]

조선은 후기에 들어서면서 통치 자료로서 지리지를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지방별로 작성한 지리지[읍지]는 홍문관으로 보내졌고, 홍문관에서는 이들 자료를 수정하고 묶어서 『여지도서(輿地圖書)』로 만들었다. 하지만 『여지도서』에 누락된 고을이 다수 존재하였다. 전라도의 경우 총 20개 군현이 누락되어 있었고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영조 대의 『여지도서』 간행 이후 정조 대에도 지방지 간행을 시도하였다. 정조는 1789년(정조 13) 전국 지리지를 작성할 요량으로 편찬을 독려하였다. 정조는 우리나라 지리지가 ‘승람(勝覽)’이나 ‘비고(備考)’밖에 없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보완한 『해동여지통재(海東輿地通載)』를 작성하려 했으나 갑자기 죽는 바람에 완결되지 못하였다. 위의 과정들이 1847년본 『호좌수영지』가 규장각에 소장된 연원을 확인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렇게 볼 때 규장각본 『호좌수영지』[1847]는 중앙으로 상송된 판본이고, 『신호좌수영지』[1815]는 중앙으로 상송하기 이전에 지방에서 지방 통치의 일환으로 보관한 보관본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신호좌수영지』 말미에 기록된 서술상 특징을 통해 일반적으로 상송되거나 지방에 유치된 판본이 아니라 두 판본 모두 중앙에 상납하지 않은 지방 유치 판본일 수도 있다는 가정도 유효하다. 부록에 전라좌수영 휘하의 모든 진과 영을 싣지 않은 것을 보면 『신호좌수영지』는 중앙에 상납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방답진(防踏眞)』, 『고돌산진(古突山鎭)』은 목차 항목 구성이 같은 반면 『전영진(前營鎭)』의 경우는 개편 이전의 영과 진의 내역을 담아 목차 구성이 다르고 통일되어 있지 않다. 전총(田總)과 같은 항목이 실리지 않은 것도 아직 완성된 내역의 진지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형태/서지]

『신호좌수영지』는 규장각본 『호좌수영지』가 명확하게 항목으로 구분되어 있지 않은 것과 비교된다. 첫 항을 한 칸 정도 띄워 서술하고자 하는 항목을 명확하게 구분한 특징이 있다. 규장각본 『호좌수영지』와 간행 시기가 30여 년 정도밖에 나지 않는 데도 구성면에서 이렇게 다른 것은 드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신호좌수영지』의 부록에 영과 진지는 형식상 부족한 부분이 있다. 각 진과 영의 운영을 살필 수 있는 군액 구성과 조적 내용 가운데 본영에서 사용할 수 있는 곡식의 비중을 밝혔는데, 이는 해당 진영을 운영하는 데 필수적인 내용이다. 이로 보아 중앙에 상납할 목적으로 완벽하게 작성한 진지라기보다는 중간 완성 단계의 진지를 지방 유치본으로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부록으로 『순천읍지(順天邑誌)』, 『전영진(前營鎭)』, 『방답진(防踏眞)』, 『고돌산진(古突山鎭)』, 『곡화목(曲華牧)』이 합록되어 있다.

[구성/내용]

규장각본 『호좌수영지』과 비교할 때 『신호좌수영지』에는 ‘선생안(先生案)’과 ‘우후선생안(虞侯先生案)’이 있다. 보통 읍지에 수록되어 있는 ’선생안‘은 규장각본에는 없지만 『여지도서』 이후 각 지방 읍지에는 대부분 수록되어 있는 항목이다.

첫 페이지에는 지도가 그려져 있다. 지도는 시각적으로 해당 지역의 시설과 자연 조건을 확인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강점이 있다. 규장각본 『호좌수영지』에 그려진 지도와 형식상은 회화식 지도로, 그리는 작자에 따른 차이로 동일하게 그려져 있지 않으나 기본적인 차이는 없다고 보인다. 『신호좌수영지』에 그려진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은 일정한 축척에 따라 그려진 지도라기보다는 책의 크기에 맞춰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지도에서는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의 축척과 방위 거리 정보보다는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의 여러 가지 정보를 전통적 지리관에 따라 그리고 있다.

다음은 경제적 지표로 『여지도서』의 항목 구성과 비슷하게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의 인문지리 내역을 소개하고 있다.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의 운영 규모를 확인할 수 있는 정보들이다. 가장 먼저 ‘봉름(俸廩)’조로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의 급료가 총량과 세부 내역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적((糶糴)’조에는 비변사 구관곡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본영 구관곡과 통영 구관곡이 존재한다. 하위 항목으로 휴번전목포(休番錢木布)를 명시하고 있어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의 재정이 중앙 재정의 한 부분으로 편입되는 상황으로 재정 확보책은 휴번전을 활용하는 방안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진공(進貢)’조에는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에 부과된 공물 분정 내역을 확인할 수 있다. ‘창고(倉庫)’조는 규장각본 『호좌수영지』에 ‘창고’ 내역부터 현황까지 더 많은 정보를 수록하고 있다.

항목 구성은 지도(地圖), 건치 연혁(建治 沿革), 도로(道路), 성지(城地), 천정(泉井), 산천(山川), 단묘(壇廟), 공해(公廨), 봉수(烽燧), 사찰(寺刹), 대사(臺榭), 각 창고(倉庫), 기영(記詠), 도서(島嶼), 진공(進貢), 봉름(俸廩), 조적(糶糴), 군기(軍器), 전함(戰艦), 군액(軍額), 선생안(先生案), 우후선생안(虞侯先生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신호좌수영지』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의 운영과 변화에 대해 알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이며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신호좌수영지』와 같은 지리지는 그 지역의 내력뿐 아니라 조선 후기 경제적 상황이 지방별로 실제 어떻게 다른지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신호좌수영지』는 규장각본 『호좌수영지』와 같이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의 운영과 변화에 대해 알 수 있는 지리지로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자료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규장각본 『호좌수영지』에 없는 ‘선생안’과 ‘우후선생안’, 『순천읍지』 등이 추가로 수록되어 있어 규장각본 『호좌수영지』와 비교, 분석할 수 있는 기초 자료로서 가치가 매우 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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