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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국사 봉황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31096
한자 興國寺 鳳凰樓
이칭/별칭 흥국사 봉황대루,흥국사 보제루,흥국사 강당
분야 종교/불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흥국사길 160[중흥동 17]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조미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646년연표보기 - 흥국사 봉황루 건립
개축|증축 시기/일시 1729년 - 흥국사 봉황루 중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1750년 - 흥국사 봉황루 중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1925년 - 흥국사 봉황루 중수
현 소재지 흥국사 봉황루 - 전라남도 여수시 흥국사길 160[중흥동 17]지도보기
원소재지 흥국사 봉황루 - 전라남도 여수시 흥국사길 160[중흥동 17]
성격 전각|불교 건축물
양식 맞배지붕
정면 칸수 5칸
측면 칸수 2칸
소유자 흥국사
관리자 흥국사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흥국사에 있는 조선 후기 누각.

[위치]

흥국사의 천왕문과 법왕문 사이에 있다.

[변천]

흥국사 봉황루는 1646년(인조 24) 창건되어 일반 대중의 집회 장소로 이용되었다. 임진왜란 기간에 불탄 것을 1729년(영조 5) 팔도도총섭인 승려 덕린(德燐), 승통대장(僧統大將) 찬민(贊敏), 팔도도총섭 자헌(慈憲) 등 300여 명의 승병이 중창하였다. 1729년 제작된 『영취산 흥국사 봉황대루 중창 상량문(靈鷲山 興國寺 鳳凰大樓 重創 上樑文)』에는 ‘정면 7칸, 측면 5칸’의 대루였다고 나와 있으나 일제 강점기인 1925년 지금과 같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축소되었다. 1750년(영조 26)에도 중수가 이루어졌다고는 하나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형태]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사찰은 중문과 탑 그리고 금당을 일직선상에 배치하고 그 주위를 회랑으로 구획하였다. 중앙의 탑과 금당을 가장 크게 하고 중정을 가장 넓게 조성하였다. 이 중심원(中心院)의 뒤쪽 회랑에서 좀 더 떨어진 중앙 북쪽에 거대한 강당을 두고 좌우에 남북으로 승방지를 배치하였다. 선종의 유행과 더불어 가람이 산지에 건립되면서부터 강당과 승당이 금당의 전면에 배치되었다. 이 시기를 고려 시대로 추정한다. 산지의 가람들은 산기슭 아래쪽에 도량의 중심을 잡고 배산(背山)하여 치올린 터전에 전각을 세우는 까닭에 낮고 평평한 하단에 강당과 승당을 배치하고, 예불 공간은 상단에 배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중 인원이 출입하는 설법과 유숙의 장소는 가람의 초입에 두고, 법당 등은 깊숙이 배치함으로써 경건하고 엄숙한 성역을 이루었던 것이다.

봉황루는 보제루와 같이 강당의 기능을 수행하던 건물이다. 물론 전시(戰時)나 의승이 주둔하는 경우에는 승병 지휘소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전면에 판벽과 판창을 달아 건물을 방호하는 것이다.

흥국사 봉황루는 경사지에 세운 건축물로 전면에서 보면 중층이지만 후면은 단층이다. 즉 앞에서 보면 2층이지만 뒤에서 보면 1층 건물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지붕 건축물로 몰익공 양식을 사용하였다. 정면에 사용된 2층 창호는 판장문(板牆門)이다. 대부분의 누각 건축은 정면에 판장벽(板牆壁)을 사용해서 필요시 외부와의 시선을 차단하는 용도로 사용하였다. 후면은 창호로 되어 있다. 누각의 후면은 원래 개방하는 것이 원칙이나 근래 대부분의 사찰에서 이 부분을 창호로 막아 공간의 활용도를 높이고 있다.

[현황]

봉황루는 부처님께 예불을 드리거나 제반 의식을 행하는 곳이다. 흥국사 봉황루 안에는 1718년(숙종 44) 박종해(朴宗海)가 정유재란 시기 노량해전에서 순절한 남유(南瑜)[?~1598] 장군을 기리며 지은 「남장군 순절비 창건기(南將軍 殉節碑 創建記)」와 1873년(고종 10) 작성된 「만일회동참계원록」 외에도 공북루(拱北樓) 현판 등이 걸려 있었는데 2003년 4월 흥국사 의승수군유물전시관이 건립된 후 모두 이전하였다.

흥국사는 가람이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 일직선상으로 배치되어 있다. 사찰의 전각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대웅전이 일주문과 바로 통하면 사찰의 복이 빠져나간다는 속설이 있는데, 흥국사는 얼마 전 봉황루 진입 방식을 누각 아래쪽이 아닌 측면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바꾸었다.

[의의와 평가]

흥국사에 대형 보제루인 봉황루가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조선 후기 흥국사의 사세를 짐작할 수 있다. 흥국사 공북루 현판 또한 흥국사의 사세뿐 아니라 의승병들의 주진사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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