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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31162
한자 馬島三號船 木簡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물/유물(일반)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김병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토|발굴 시기/일시 2011년연표보기 - 마도3호선 목간 발견
현 소장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 전라남도 목포시 남농로 136[용해동 8]
출토|발견지 마도 해역 -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성격 목간
재질 나무|대나무
소유자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관리자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정의]

고려 후기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출항했다 침몰 후 2011년 발굴된 마도3호선에서 건져 올린 목간.

[개설]

마도3호선 은 13세기 중반인 고려 후기 나무로 만든 배이다. 출발지는 전라남도 여수 지역으로, 최종 목적지는 당시 고려의 임시 수도였던 강화도였다. 발굴 위치는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마도 해역이다. 2009년 마도Ⅱ지구 광역 탐사 중 선체가 발견되었고, 2011년 5월부터 10월까지 발굴 조사를 진행하였다.

마도3호선은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었으며, 목간 35점과 도기호 28점 등 총 299점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목간은 2007년 발굴된 태안선뿐 아니라 2009년과 2010년 각각 발굴된 마도1호선, 마도2호선에서도 발견되었는데 일종의 화물표로 쓰인 물건이다. 이전 수중에서 발견된 고려 시대 목간에 비해 글자가 또렷이 남아 있어 판독에 별다른 어려움은 없는 편이다. 마도3호선 목간은 유물의 편년, 선박의 항로, 적재 화물의 유통 관계 등을 밝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뿐 아니라 고려의 시대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형태]

마도3호선 목간 은 나무나 대나무를 쪼갠 후 윗부분에 홈을 파서 머리와 몸통을 만들고 홈에 끈을 묶고 몸통에 붓으로 글을 썼다.

[특징]

마도3호선 목간 의 형태상 특징 중 첫 번째는 크기가 이전 수중 발굴 고려 목간에 비해 대부분 작다는 점이다. 주로 도기 항아리나 대나무 상자에 화물표처럼 묶어 두는 용도였기에 크기가 작은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일부 곡물류 화물에 묶여 있는 목간은 크다. 이 점은 마도1호선과 마도2호선에서 발굴된 목간과 비슷한 양상이다. 즉 화물표[목간]를 어디에 매다는지에 따라서 크기가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특징은 역시 화물표로 매달기 위해 ‘〉’, ‘〈’ 모양의 홈을 팠다는 점이다. 몇몇 목간에서는 끈이 묶인 채 발굴되어 그 사용법을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홈은 주로 목간 윗부분에 파서 머리와 몸통을 구분하는 경계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묵서는 주로 홈 아래 몸통 부분부터 적혀 있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때로는 머리 부분부터 적혀 있는 것도 있다. 또한 일반적인 형태와 달리 홈을 경계로 몸통과 머리 위치가 반대인 것도 있다.

목간의 재질은 대나무와 나무가 비슷한 숫자로 발굴되었는데, 대나무가 좀 더 많다. 그런데 죽찰의 경우 묵서의 순서가 바뀐 경우가 있다. 즉 대나무를 반으로 쪼개 안쪽에서부터 글을 쓰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로, 마도1호선 죽찰은 모두 이 경우에 해당한다. 그런데 마도2호선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특징 중 하나는 대나무 겉면부터 글을 써서, 안쪽에서 마무리되는 경우도 보인다는 점이다. 이는 마도3호선에서도 나타나는 특징이다.

[의의와 평가]

그동안 여수 지역의 고려 시대 자료가 미미하여 시대사 연구에 어려움이 많았는데 마도3호선이 발굴됨으로써 이를 보완할 수 있는 획기적인 계기가 마련되었다. 마도3호선 목간은 2007년 발굴된 태안선과 마도1호선, 마도2호선 목간에 이어 네 번째로 발굴된 고려 시대 목간이다. 기존의 목간과 마찬가지로 침몰 선박에 실린 화물의 발송지, 발송자, 수취인, 화물의 종류와 수량 등이 명시되어 있어 선박과 적재 화물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이다. 특히, 마도3호선 목간은 고려 무신 집권 후반 김준 정권의 삼별초 운영 실태와 중앙과 지방의 관계를 알려 주는 자료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마도3호선 목간에 의하면 삼별초 중 좌별초·우별초는 삼번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기존의 하급 무반이라고 추정했던 별초 도령은 4품도 맡는다는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또한 중앙의 관직자가 자신의 본관[또는 내향, 외향, 처향 등]에 대한 연고권을 가진 사심제의 실상을 파악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이외에도 사료가 부족해 연구가 미진했던 분야들에도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덧붙여 막연하게 추론했던 고려 시대 여수 지역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 생생하게 알려 주고 있어 여수의 역사상을 훨씬 풍부하게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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