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11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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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盤巖書院 |
영어음역 | Banamseodang |
영어의미역 | Banam Village School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 반성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수환 |
성격 | 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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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맞배지붕 기와집 |
건립시기/일시 | 1794년 |
정면칸수 | 3칸 |
측면칸수 | 2칸 |
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 반성리 원전마을 |
[정의]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 반성리 원전마을에 있는 조선 후기 서원.
[개설]
반암서원은 여말선초 문신이었던 정구(鄭矩)로부터 아들인 정선경(鄭善卿), 손자인 정종(鄭種), 정비(鄭秠)를 제향한 서원이다. 정구[1350~1418]는 감찰대부(監察大夫) 정양생(鄭良生)의 아들이다. 자는 중상(仲常), 호는 설학재(雪壑齋)로 1377년(우왕 3) 문과에 을과 2등으로 급제하여 전교시부령(典校寺副令)을 지내고, 1382년 김극공(金克恭)의 옥사에 연루되어 유배생활을 했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한성부우윤을 지내고 1394년(태조 3) 왕명으로 한리(韓理)·조서(曺庶)·권홍(權弘)·변혼(卞渾) 등과 함께 『법화경』 4부를 금니(金泥)[금박가루를 아교풀에 갠 것으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데 쓰임]로 썼다. 정종 때 도승지(都承旨)·대사헌(大司憲), 태종 때 예문관학사(藝文館學士)를 거쳐 공조판서(工曹判書)·호조판서(戶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1417년(태종 17) 명나라에 건너가 홍무연간(洪武年間)에 만든 각궁(角弓)을 구입해 왔다.
정구의 아들 정선경[1395~1442]의 자는 선지(善之), 호는 반곡재(盤谷齋)이다. 내섬시판관(內贍寺判官)을 역임하였다. 정종은 조선 초기의 무신으로 자는 묘부(畝夫), 호는 오로재(吾老齋)이다. 1442년(세종 24) 무과에 급제하고 1453년(단종 1) 11월 이징옥(李澄玉)의 난 때 종성절제사로서 이를 포살(捕殺)한 공으로 군공(軍功) 1등에 책록되고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하였다.
그 뒤 행상호군(行上護軍)이 되었으며, 이듬해 세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도와줌으로써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461년 10월에는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홍익성(洪益成)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다. 1467년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율원군(栗元君) 종(從)의 휘하로 총통군(銃筒軍)을 이끌고 출전하여 평정에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3등에 책록되고, 행충무위상호군 겸 오위장에 임명되었으며, 처음 칠산군(漆山君)에 봉하여 졌다가 곧이어 동평군(東平君)으로 개봉 되었다. 이어 충청도도절제사를 거처 경주부윤(慶州府尹)이 되었다. 정비는 정선경의 아들로 호는 기우자(騎牛子)이다. 관직은 충좌위부사정(忠佐衛副司正)을 지냈으며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위치]
대가야읍에서 성주 방향으로 나 있는 국도 33호선을 따라 본관 교차로에서 덕곡 방향으로 4.4㎞정도 가다보면 오른쪽에 원전 마을이 있다. 원전마을 옆으로는 가야산에서 발원하여 대가야읍 회천으로 흐르는 소가천이 있다.
[변천]
본래 반암서원은 정종의 별묘(別廟)였다. 처음에 정구는 1777년 정충사(靖忠祠)에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와 함께 모셔져 있었으나 1794년 정충사에서 다른 분을 추향하게 되어 그 해 9월에 이곳으로 이봉(移封)하면서 반암서원이라 현판(懸板)하였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서원이 철폐(撤廢)되었으며, 이 후 반암서당으로 현판하였다가 건물이 노후하여 1994년에 확대 개축하였다.
[형태]
서원에는 강당인 반암서당과 뒤쪽에 사당인 세덕사가 있어 전학후묘(前學後墓)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사당인 세덕사(世德詞)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로 맞배지붕 형식이다. 전면에 반 칸의 툇간을 구성하여 의례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사당으로서는 보기 드문 다포 형식을 보인다. 어칸에는 2구의 간포, 좌우 협칸에는 1구의 간포를 얹었다. 강당인 숭덕재(崇德齋)는 전체 5칸 중 중앙 2칸에 마루를 두고 좌·우로 온돌방을 설치하였다. 무익공(無翼工) 형식의 건물로 3량 구조이나 방 전면에 툇간을 구성하기 위해 중간에 사잇기둥을 놓았다.
[현황]
동평군파(東平君派) 종중회 정기총회가 매년 5월 첫 번째 일요일에 반암서당에서 개최되며 음력 10월 5일 향사를 지내고 있다. 소장 자료로는 경내의 현판인 ‘반암서당(盤巖書堂)’, ‘숭덕재(崇德齋)’, ‘수궐문(修厥門)’, ‘고경문(高景門)’과 비석 4기가 있다. 이 비석은 정구, 정선경, 정종, 정인운의 신도비로 이 중 정종의 비문은 그의 후손인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가 지었다.
수정일 | 제목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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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7 | 오류 수정 | [개설]수정 |
2017.02.09 | 위치 설명 수정 | [수정 전]월산삼거리 가기 바로 전 좌측게 월산리가 있으며 서쪽에 원전마을이 있다. 월산리부터 원전마을 가는 길 옆에는 소가천이 흐로고 있다. [수정 후]대가야읍에서 성주 방향으로 나 있는 국도 33호선을 따라 본관 교차로에서 덕곡 방향으로 4.4㎞정도 가다보면 오른쪽에 원전 마을이 있다. 원전마을 옆으로는 가야산에서 발원하여 대가야읍 회천으로 흐르는 소가천이 있다. |
2016.11.09 | 내용 수정 | (원)... 아들 정종의 훈공으로 정헌대부, 호조판서로 증직되었다. (수정)... 아들 정종의 훈공으로 정헌대부, 호조판서로 증직되고 동평군에 봉작되었다. |
2012.10.15 | 내용 추가 | 1) 오 : 내섬시판관(內贍寺判官)을 역임하였다. 정 : 내섬시판관(內贍寺判官)을 역임하고, 아들 정종의 훈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증직(贈職) 되었다. 2) 오 : 1467년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율원군(栗元君) 종(從)의 휘하로 총통군(銃筒軍)을 이끌고 출전하여 평정에 공을 세웠다. 정 : 1467년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율원군(栗元君) 종(從)의 휘하로 총통군(銃筒軍)을 이끌고 출전하여 평정에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3등에 책록되고, 행충무위상호군 겸 오위장에 임명되었으며, 처음 칠산군(漆山君)에 봉하여 졌다가 곧이어 동평군(東平君)으로 개봉 되었다. 이어 충청도도절제사를 거처 경주부윤(慶州府尹)이 되었다. |
2012.07.20 | 오류 수정 | 오 : 내섬시판관(內贍寺判官)을 역임하고 아들 정종의 훈공으로 동평군(東平君)에 봉작되었다. 정 : 내섬시판관(內贍寺判官)을 역임하였다 |
2012.05.29 | 정구의 호 정정 | 오 : 자는 중상(仲常), 호는 운학재(雲壑齋)로 ... 정 : 자는 중상(仲常), 호는 설학재(雪壑齋)로 ... |
2011.11.10 | 내용 수정 | 1) 자는 중상(仲常), 호는 설학재(雪壑齋)로 ->자는 중상(仲常), 호는 운학재(雲壑齋)로 2) 정배는 정선경의 아들로 호는 기우자(騎牛子)이다 ->정비는 정선경의 아들로 호는 기우자(騎牛子)이다 |
2011.02.07 | 수정 요청 | [반암서원] 개설 첫째줄 정배(鄭秠)를 정비(鄭秠)로 고쳐주시고, 호 운학재(雲壑齋)는 설학재(雪壑齋)로 고쳐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