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0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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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儒敎 |
영어의미역 | Confucianism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
집필자 | 하창환 |
[정의]
경상북도 고령군에서 공자에 의해 체계화된 사상을 실천하고자 하는 학문적 활동과 의례적 행위 일반.
[개설]
중국 춘추시대 말 공자에 의해 체계화된 유교는 전국시대에는 맹자·순자 등에 의해 계승되고, 한대에 이르러서는 무제가 그 왕조의 권위를 이데올로기 면에서 정당화하기 위해 유교를 공식 국교로 승인하였다. 이후 유교는 중국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기로 자리하게 되었다. 유교는 중국뿐만 아니라 인접 국가들에 전파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등 문화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 이후 고려를 거쳐 조선 왕조에 이르러 국가의 지배 이념이 되었다.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
대가야의 수도였던 고령 지역에서 유교의 자취는 그 왕조의 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 6세기 초에 가실왕은 우륵으로 하여금 가야국 각 지역의 음악을 12곡의 가야금 곡조로 짓도록 명하였다. 이는 가실왕이 유가의 예악 이념에 의거해 개혁을 추진하여 내부 체계의 정비를 꾀하고, 나아가 가야 제국의 단결을 도모하고자 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당시 대가야에서 중국 남제에 사신을 파견했던 사실이 이를 어느 정도 뒷받침해준다. 사신의 왕래를 통해서 예악에 관한 저술도 접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라의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강수(强首)를 통해서도 고령 지역의 또 다른 유학의 자취를 발견할 수 있다. 강수는 통일신라의 유학자이자 문장가로 유학에 관심을 기울였고, 벼슬길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무열왕이 특히 총애하였다고 한다. 6두품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고 유학과 문장력으로 출세한 대표적인 학자로서 신라 중대 유교 정치 이념을 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조상은 본래 임나가라(任那加羅)[경상남도 고령 일대]인이었으나 신라에 멸망되면서 신라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가 자신을 임나가야인으로 소개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 당시 고령 지역의 유교 문화의 질적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
고려시대에 고령 지역에서 유교 문화가 어느 정도의 수준이었으며 그 역할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는 문헌 자료는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고령의 호족 출신으로 인종 때 명경과에 급제하여 침지정사에까지 오른 신숙(申淑)[?~1160]을 통해서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 명경과 시험은 모든 사람들이 응시할 수 있는 과거 시험이 아니라 향리 가운데 부호장 이상의 자손만이 응시할 수 있는 시험이었으며 시험 과목으로는 『시경』, 『역경』, 『춘추』, 『예기』 등의 유교 경전을 채택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당시 고령에서는 신숙을 명경과에 급제시킬 만큼 유교적 토대가 어느 정도 마련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조선 전기 태종은 지방 제도를 개혁하면서 그 동안 고령을 통치해오던 감무(監務)를 현감으로 교체하였다. 현감은 종6품 이상의 사류(士類) 출신이고, 그 아래에 지역의 명망 있는 사족이자 학문적으로 존중받는 유학자를 좌수(座首)와 별감(別監)으로 두고 있었다.
따라서 감무에서 현감으로의 교체는 조선 전기 고령 지역에서도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통치가 이루어졌고, 유교 이념에 충실한 사람들이 지역 사회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세종 때에는 유학 교관이 파견되었는데, 이는 고령 지역에 유교 이념을 전파하고 정착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토대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유교의 최전성기였던 조선 중기에 고령 지역의 유교 또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커다란 진전을 이루었다. 고령은 현 경상북도의 하단부에 위치하여 현 경상남도와 접하게 된 지리적 여건 때문에 현 경상북도 북부 지역의 퇴계학과 현 경상남도 서부 지역의 남명학을 모두 수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고령 지역에서는 퇴계와 남명을 함께 스승으로 모신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배신(裵紳), 오운(吳澐), 김면(金沔) 등이 있다. 고령 지역 특유의 유교 전통인 회통성과 개방성도 이 때문에 세워진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고령 지역 유교의 토대를 이룬 것은 퇴계학과 남명학만이 아니었으며 인근 성주 지역에서 활동한 정구(鄭逑)와 장현광(張顯光)의 한려학파의 학맥까지도 계승하였다. 따라서 한려학파가 지향하는 실천성도 고령 지역 특유의 유교 전통의 한 부분으로 자리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고령 출신 유학자들의 의병 활동이 두드러진 것은 그 실천성이 현실 속에서 구체화된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근·현대]
조선 중기 이후 고령 지역 유교의 특징이 된 회통성과 개방성 및 실천성은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당시 고령의 유학자들이 경상북도 북부 지역인 안동의 학풍과는 달리 서양 문명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보인 것도 이러한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고령의 유학자였던 한주 이진상(李震相)은 독특한 ‘심즉리설(心卽理說)’로 퇴계학파의 전통과 차별성을 보였다. 그의 제자인 곽종석(郭鍾錫)은 신학문을 섭렵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남겼다. 특히 서구의 국제법, 동서양의 정치 제도와 문화 비교 등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그의 문인이었던 이인재(李寅梓)는 서양 철학을 연구하여 희랍 철학과 진화론을 주자학적 시각에서 탐구하는 특이한 학문 경향을 보였다.
한편 한주학파의 문인들과는 달리 이종기(李種杞)는 퇴계의 주리론적 입장을 따랐다. 그러나 퇴계학파의 지나친 주리론 경화 현상에 대해서는 자기 반성적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점에서 이종기는 고령 유교의 회통적·개방적 전통을 계승한 학자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근·현대 고령 유학의 폭과 깊이를 통해 가늠할 수 있다. 이에 비하면 현재 고령향교를 중심으로 고령의 유교 문화를 진작시키려는 고령향교 여성유도회를 비롯한 관련 단체들의 활동은 크게 미약하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