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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617
한자 山月里古墳-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고분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대야면 산월리
시대 고대/초기 국가 시대/삼한,고대/삼국 시대/백제
집필자 곽장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9년 - 산월리 고분떼 군산 대학교 박물관에서 1차 발굴 조사 실시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1년 - 산월리 고분떼 군산 대학교 박물관에서 2차 발굴 조사 실시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2년 - 산월리 고분떼 군산 대학교 박물관에서 3차 발굴 조사 실시
소재지 산월리 고분떼 - 전라북도 군산시 대야면 산월리 서악 마을 지도보기 서쪽
성격 고분

[정의]

금강의 관문인 전라북도 군산 지역에서 처음으로 마한 부터 백제까지의 분묘 유적과 마한의 생활 유적이 함께 조사된 복합 유적.

[개설]

산월리 고분떼는 1999년과 2001년, 2002년 모두 세 차례의 학술 발굴을 통해 마한의 생활 유적과 분묘 유적, 백제의 분묘 유적이 조사되었다. ‘가’ 지구에서는 분구묘와 주구묘, 옹관묘 등 그 구조가 다른 다양한 고분이 공존하여 군산 지역 마한의 묘제를 연구하는데 값진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나’ 지구에서는 마한의 주거지, 백제의 수혈식 석곽묘와 횡혈식 석실분이 함께 조사됨으로써 마한 부터 백제까지 생활 유적과 분묘 유적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위치]

전라북도 군산시 대야면 소재지 동쪽에 남북 방향으로 뻗은 산자락 정상부에 위치한다. 대야 공용 터미널 북동쪽에 자리한 산봉우리[81m] 부근이 ‘가’ 지구이며, 이곳에서 남쪽으로 200m 가량 떨어진 산자락 정상부에 ‘나’ 지구가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1996년 군산시에서 임도를 개설하면서 생긴 절단면에 옹관편이 노출되어 있었는데, 1998년 군산 동초등학교 이황세 교사가 제보해 주어 알려지게 되었다. 군산 대학교 박물관에서는 1999년과 2001년 군산 문화원, 2002년에는 문화재청으로부터 발굴비를 지원받아 학술 발굴을 실시하였다. 모두 세 차례의 발굴 조사는 ‘가’ 지구와 ‘나’ 지구로 나누어 진행되었으며, 전자는 절단면에 노출된 유구를 중심으로 Tr.조사와 후자는 전면적인 발굴 조사가 이루어 졌다. 그 결과 마한 부터 백제까지의 생활 유적과 분묘 유적이 조사되었다.

[형태]

유구의 보존 상태가 양호하지 않았다. ‘가’ 지구는 임도를 개설하면서 유구가 훼손 내지 유실되었으며, 일부 남아있는 유구도 경사면을 따라 흙이 유실되는 과정에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나’ 지구는 1970년대 예비군 훈련장을 조성하는 과정에 일차 훼손된 뒤 다시 대규모 민묘 구역의 조성으로 유구의 보존 상태가 양호하지 않았다.

[출토 유물]

유물은 토기류와 철기류, 구슬류 등 600여 점이 출토되었다. 아마도 백제의 분묘 유적 중 유물의 출토량이 가장 많고 그 종류도 매우 풍부하다. 백제의 중앙과 지방을 비롯하여 왜계 유물도 포함된 토기류는 달리 ‘백제 토기 박물관’으로 불릴 정도로 대부분의 기종이 망라되어 있다. 2호분은 처녀분으로 시신을 모신 목관이 안치된 부분을 제외하면 토기류가 부장되어 추가장이 확인되었다. 서울 풍납 토성과 부안 죽막동에서만 출토된 횡병은 2호분에서 2점이 출토되었으며, 8호분의 대부장경호는 산월리 출토품이 유일하다. 백제 토기의 상징적인 기종인 삼족 토기는 모두 15점으로 배신의 직경이 10~30㎝로 그 종류도 매우 다양하다.

군산 산월리의 가장 큰 특징은 철기류의 종류가 풍부하고 그 출토량이 많다는 점이다. 마한의 표식적인 위세품으로 알려진 환두대도는 2호분에서 1점과 3호분에서 2점, 4호분에서 1점, 6호분에서 2점 등 6점이 출토되었다. 모두 둥근 고리 형태 부분에 문양이 없는 소환식으로 군산의 역동성과 함께 산월리의 지역성을 강하게 담고 있다. 모두 253점의 구슬류가 출토됐는데, 백제의 횡혈식 석설분에서 구슬이 풍부하게 부장된 것은 마한의 매장 풍습 영향으로 보인다.

[현황]

금강 하류 지역에서 마한의 수혈식 석곽묘가 더욱 커지고 5세기 중엽 경 횡혈식 석실분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군산 산월리에서는 3기의 수혈식 석곽묘와 7기의 횡혈식 석실분이 함께 조사되었다. 횡혈식 석실분은 생토 암반층을 파내어 묘광을 마련하고 그 내부에 방형 혹은 장방형의 석실이 축조된 지하식이다. 유구의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한 산월리 2호분은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할석을 가지고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벽석을 약간씩 들여쌓고 한매의 개석으로 덮었다. 연도는 그 길이가 그다지 길지 않고 각각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으며, 8호분은 가락동 4호분과 공주 보통골 17호분과 흡사하게 남벽과 서벽 사이에 비스듬히 연도를 두었다. 벽석의 축조 방법과 석실의 평면 형태, 연도의 위치 등 유구의 속성에서 백제 고분의 정형성보다 오히려 과도기적인 특징을 강하게 보였다.

[의의와 평가]

군산 산월리마한 부터 백제까지 군산의 발전과정을 살필 수 있는 곳이다. 대야 공용 터미널 동쪽 산자락 정상부로 임피권 서쪽 가장 자리에 자리한다. 군산 문화원의 발굴비 지원으로 세 차례의 학술 발굴에서 마한의 생활 유적과 분묘 유적, 백제의 분묘 유적이 조사되었다. 마한의 생활 유적이 폐기되고 그 위에 백제의 분묘 유적이 조성되었는데, 이곳에서 북쪽으로 200m 떨어진 곳에 마한의 분묘 유적이 있다. 근초고왕의 남진 정책으로 마한이 백제에 정치적으로 복속되는 과정에 분묘 유적의 위치도 큰 변화를 보인다. 한성기까지 분묘 유적은 산자락 정상부에 입지를 두었다가 웅진·사비기를 거치면서 남쪽 기슭으로 이동한다. 군산 산월리는 산자락 정상부에 입지를 두고 있기 때문에 마한의 묘제적인 전통이 그대로 계승된 한성기 백제의 분묘 유적으로 판단된다. 마한과 백제의 생활 유적과 분묘 유적이 동일 유적에서 함께 조사되어, 마한이 백제에 어떻게 복속되었는가와 당시의 사회상과 생활상을 밝히는 데 좋은 고고학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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