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07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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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城郭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고대/고대,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조명일 |
[정의]
전라북도 군산 지역에 남아있는,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흙이나 돌로 구축된 방어 시설.
[개설]
성곽이란 성(城)과 곽(郭)의 합성어이다. 성은 내성을 말하고 곽은 성의 주위를 에워싼 나성의 형태로, 우리나라는 내성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공간을 성곽으로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군산 지역은 백제 시대 시산군과 마서량현, 그리고 부부리현의 행정 구역이 편재되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시산군은 지금은 임피면이며, 마서량현과 부부리현은 각각 옥구읍와 회현면 일대에 해당된다.
시산군은 통일 신라 시대 임피현으로 바뀌었으며, 근대 개항기에는 임피군으로 개칭되었고, 일제 강점기 이후 옥구군에 편입되었다. 마서량현과 부부리현은 통일 신라 시대와 고려 시대에 각각 옥구현과 회미현으로 개칭되었으며, 조선 초기에 옥구현으로 통합된 후 1945년 해방 후에 군산시로 편입되었다.
군산 지역의 성곽은 산성의 경우, 삼국 시대부터 고려 시대에 걸쳐 치소지였던 곳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임피면과 옥구읍에는 조선 시대 읍성이 존재하고 있다.
[현황]
군산 지역에는 모두 13개소의 산성 및 읍성이 분포되어 있다. 성곽의 분포 양상을 살펴보면, 대체로 옛 군산의 치소였던 옥구[마서량현-옥구현], 임피[시산군-임피현]를 중심으로 많은 수의 산성이 밀집되어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옥구 지방은 옥구 읍성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산성이 배치되어 있다. 옥구 읍성의 경우, 군산 지역의 어느 성곽보다도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매우 주목된다. 비록 성곽 내부에 마을이 들어서 있기는 하나, 원 지형이 심하게 훼손되지 않았으며, 성벽 역시 본래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또한 1872년에 제작된 지방도와 비교했을 때,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한편 옥구 읍성의 성벽과 내부에서는 백제 시대~고려 시대의 유물이 다수 발견되고 있는데, 이는 조선 시대 이전에 이미 성곽이 축성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옥구 읍성이 백제 시대부터 옥구 지방[마서량현]의 치소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주변의 산성들은 옥구 읍성의 외곽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축성되었을 가능성 높다.
이는 산성의 분포 양상을 통해서도 유추해 볼 수 있는데, 옥구읍성의 서쪽에 성산 토성, 남쪽에 대산 산성, 동쪽의 박지산성 모두 옥구 읍성으로 진입하는 길목에 해당된다. 또한 성곽의 형태를 보면, 옥구 읍성은 평산성인 반면에, 주변의 산성들은 모두가 방어에 유리한 테뫼식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이는 유사시 피난성으로서의 기능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임피 지방은 옥구 지방에 비해 많은 수의 산성이 분포되어 있는데, 모두가 임피 읍성을 중심으로 방사선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2005년 전북 문화재 연구원에 의해 임피 읍성 서쪽 외곽에 대한 발굴 조사가 진행된 바 있는데, 당시 ‘시산 관초(屎山官草)’명의 명문와가 출토되었다. 여기에 새겨진 ‘시산’은 백제 시대 때 임피의 지명으로 신라 경덕왕 때, 임피현으로 고쳐지게 된다.
백제 지명이 새겨진 명문 기와를 잘 살펴보면, 지명 뒤에 ‘관’자가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러한 예는 전라남도 광양시에 있는 마로 산성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관’자는 통일 신라~고려 시대 행정 중심지를 나타내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기 때문에, 출토된 기와들은 기와가 제작된 당시의 지명일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이 바로 후백제의 존재이다.
현재 후백제에 대해서는 고려 시대 기록에서 일부 등장할 뿐,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후백제라는 국명(國名)에서 알 수 있듯이, 백제를 계승하려 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따라서 임피 읍성에서 출토된 기와를 통해 볼 때, 임피 읍성은 후백제의 치소성이었으며, 백제 시대의 지명인 ‘시산’을 일시적으로나마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피읍성의 주변에 위치해 있는 산성들에서도 대부분 통일 신라~고려 시대의 유물이 집중되고 있는데, 모두가 임피 읍성으로 진입하는 길목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임피 읍성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을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주변의 산성들에서는 백제 유물이 다량으로 확인되고 있는 반면에, 임피 읍성 내에서는 아직까지 백제 유물로 볼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아 축성 주체가 백제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백제 때 임피 지방의 치소성이 어디였는지에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산성이 바로 임피 읍성의 북쪽에 있는 용천 산성이다. 용천 산성은 구릉의 정상부를 따라 축조한 토성으로 둘레가 800m 내외이며, 내부에서는 백제 시대~고려 시대 유물이 집중적으로 수습되고 있다. 산성의 규모나 입지, 출토 유물 등을 볼 때, 용천 산성은 백제 시대 때 방성급 치소성으로 보아도 큰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일찍이 다산 정약용은 군산 지역[옥구 일대]을 백제의 서방성으로 말한 바 있다. 현재 백제 오방성[백제 사비기에 국토를 5개의 방으로 구분한 지방 통치 제도] 중에서 위치가 확인된 곳은 중방[전라북도 정읍 고사부리성], 동방[충청남도 논산], 북방[충청남도 공주 공산성] 등이며, 남방은 대체로 전라북도 남원 일대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서방은 충청남도 서산 또는 예산 등이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금강이 백제의 수륙 교통의 거점인 동시에 수도 방어 핵심 지역인 점을 감안해 본다면, 백제 서방의 후보지로서 군산 지역 또한 전혀 손색이 없으며, 아울러 방성급 산성인 용천 산성이 서방의 치소성일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