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10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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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烈女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두헌 |
[정의]
전라북도 군산 지역에서 남편을 헌신적으로 돌보거나 남편에 대한 절개를 굳게 지킨 여자.
[개설]
조선 시대를 지배한 사상은 유교였다. 유교 사회에서는 삼강오륜(三綱五倫)을 가장 중요한 도덕 덕목으로 손꼽았다. 조선 사회에서의 유교의 영향력은 같은 시기의 중국의 명과 청 사회나,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나 에도 막부 사회보다 강력하였다. 가장 유교적인 사회가 다름 아닌 조선 사회였던 것이다. 삼강오륜이라고 할 때의 삼강(三綱)은 충, 효, 열을 말한다. 조선 시대에는 삼강(三綱)인 충, 효, 열을 가장 중요한 도덕 덕목으로 여겼기에, 그것을 실행한 행적이 다른 사람에 비해 두드러지게 달라 모범이 될 만한 사람들을정부에서 표창하여 다른 사람들의 본보기로 삼았다.
[인물 및 내용]
군산 지역에 현재 전하는 열녀는 문덕중의 처 전주 이씨, 전시번의 처 원주 원씨, 강계팔의 처 두릉 두씨 등이며 순서대로 살펴보고자 한다.
문덕중의 처(妻)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전주 이씨 익안 대군(益安大君)의 후손으로 어렸을 때부터 정숙(貞淑)하고 본심(本心)이 온화하였다. 그러나 남편이 젊은 나이에 삼년 동안 병으로 누워있게 되자, 하늘에 남편 대신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기도하였지만, 남편은 부모 봉양을 잘 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떴다. 남편의 상을 마친 날 밤에 전주 이씨는 후원에 가서 목을 매 자결하려 하였지만 다른 사람이 발견하여 간신히 목숨을 구하였다. 이후 남편을 대신하여 시부모에게 지극한 효도를 다하였으며, 마침내 그 효행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자 1887년(고종 24년)에 정부에서 정려를 세울 것을 명하였다.
전시번의 처 원주 원씨는 품행이 정숙하고 웃어른을 정성을 다하여 섬겼으며, 남편을 대할 때 항상 공경하는 자세로 섬기니 주위에서 칭송이 많았다. 남편이 31세의 이른 나이에 사망하자 슬픔에 넘쳤으며, 남편의 뒤를 따르려 하였으나 임신 중이라 아기 낳기를 바라고 이후 그 뜻을 실행하려고 하였는데, 깊은 슬픔으로 낙태하자 울분을 못 이겨 스스로 목을 매어 죽음으로서 절개를 지켰다. 정부에서 1724년(경종 4)에 원주 원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정려를 세울 것을 명하였으며, 1725년(영조 1)에 열녀비가 세워져 현재에도 전하고 있다.
강계팔(姜啓八)의 처(妻) 두릉 두씨(杜陵杜氏)[?~1886]는 천성(天性)이 순하여 자신의 친 부모를 지극한 효도로 섬겼으며, 강씨(姜氏) 집안에 시집을 와서는 정성을 다하여 시부모를 봉양(奉養)하였다. 시어머니가 중풍이 들어 사지를 쓰지 못하게 되자 직접 자신의 손으로 대소변을 깨끗이 닦아 드렸고, 돌아가시자 예를 다하여 장사를 치렀다. 또한 남편이 병에 걸리어 목숨이 경각에 이르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남편의 입에 넣어주어 남편의 생명을 삼일 동안 연장시켰다. 이러한 효행(孝行)이 임금에까지 알려지자, 정부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1888년(고종 25)에 정려를 세울 것을 명령하였다. 1931년에 세워진 효열비가 지금도 군산시 회현면 세장리 죽동 부락에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효자 집안에서 효자가 나온다는 말이 있듯이, 군산 지역에서도 열녀가 나오는 집에서 역시 열녀가 나오는 현상이 보인다. 그 만큼 어느 한 사람의 일생에 가정의 분위기가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군산 지역에서도 열녀에 대한 표창이 조선 시대에 이어 일제 강점기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는 일제 강점기까지 충효열이라는 유교 덕목이 군산 지역에서 가치 있는 윤리 덕목으로서의 위치를 잃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