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2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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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願豊亭 |
이칭/별칭 | 농암정(聾岩亭) |
분야 |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광주광역시 북구 소해로 11[일곡동 514]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현숙 |
건립 시기/일시 | 1817년 - 원풍정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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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철|철거 시기/일시 | 1913년 - 원풍정 태풍으로 붕괴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73년 - 원풍정 중수 |
현 소재지 | 원풍정 - 광주광역시 북구 소해로 11[일곡동 514] |
원소재지 | 원풍정 - 광주광역시 북구 소해로 11[일곡동 514] |
성격 | 누정 |
양식 | 팔작지붕 |
정면 칸수 | 3칸 |
측면 칸수 | 3칸 |
소유자 | 광주노씨 문중 |
관리자 | 광주노씨 문중 |
[정의]
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동에 있는 일제강점기에 중건된 정자.
[개설]
원풍정은 1817년부터 초당으로 있던 것을 1912년에 농암(聾岩) 노재규(盧在奎)[1836~1920]가 건립하였으며, 1913년 풍수해로 무너진 것을 다시 중건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 노재규는 을사조약 체결 후에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워지면서 스승인 연재 송병선이 자결하고 최익현이 대마도 유배 후 순절하자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일곡리에 내려와 후학 양성에 힘쓰며 일생을 보냈다.
이 정자는 원풍정과 농암정의 두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다. 나라에 풍년이 들기를 바라는 주자의 우국원풍(憂國願豊)의 ‘원풍(願豊)’과 국권이 상실되어 나라 잃은 백성이 어지러운 세상의 온갖 시비를 피해 고의로 귀먹은 농자처럼 행세하며 세상을 멀리하고 살아간다는 뜻의 노재규 아호 농암(聾岩)에서 각각 가져온 것이다. 노재규가 남긴 농암기(聾巖記), 원풍정기(願豊亭記), 부원풍정 상량문(附願豊亭上樑文), 부원풍정중수기(附願豊亭重修記), 원풍정독좌(願豊亭獨坐) 등의 기록을 통해 건립 내력을 알 수 있다. 원풍정 내부에는 당대의 의식 있는 지도자 29명의 기문과 시문이 편액으로 남겨져 있는데,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1797~1868]를 중심으로 한 화서학파(華西學派) 등이 교류하며 드나들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인근에 송병선, 노종룡을 배향하는 사당인 만주사(晩洲祠)가 있으며, 한 단 아래에는 소해정(蘇海亭)이라 부르는 경의재(景義齋)가 있다. 노재규는 『소해문집(蘇海文集)』을 남겼다.
[위치]
원풍정은 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동 자연마을 안쪽 끝, 한새봉 등산로 시작 전에 있다. 왼쪽으로 절효사가 있고 오른쪽으로 소해로 길이 이어지는 낮은 언덕배기 위에 있다.
[변천]
원풍정은 본래 초당이던 것을 1912년에 기와지붕으로 중수하였다. 1913년 태풍으로 전체가 붕괴되었는데, 1973년에 이르러 중건하였다.
[형태]
원풍정은 자연석으로 2벌 기단 위에 덤벙주초와 사각기둥, 세 군데에 디딤대를 놓았고 팔작지붕에 골기와를 얹었다. 긴 처마를 받칠 수 있게 활주를 세웠고 건물 중앙에는 1칸짜리 방을 두었으며, 입구에는 솟을대문을 배치하였다.
[현황]
원풍정에는 현판들과 28명의 시문과 기문이 걸려 있으며, 정자는 잘 관리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원풍정은 건립자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잘 간직하고 있는 장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