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44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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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無等山天祭壇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 산132-10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혜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0월 3일[개천절] - 무등산 천제단 개천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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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 장소 | 무등산 천제단 - 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 산132-10 |
성격 | 제사[개천제] |
의례 시기/일시 | 10월 3일[개천절] |
신당/신체 | 무등산 천제단 |
[정의]
광주광역시 무등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곳.
[개설]
신라와 고려 시대에는 국가적 차원에서 산신제를 모셨으며, 조선시대에는 읍제를 지냈다. 그러다가 17세기 후반 기후 변화로 야기된 잦은 기근으로 민간의 기복 신앙이 고조되었다. 조선 초에 중단된 원구제[천제]의 대안으로 남산에서 거행하는 기우를 담당한 풍운뇌우제와 사직단에 천제가 추가되었다. 또 청 왕조의 새로운 세계관의 확산이 결부되어 정부 차원에서 천제를 시도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무등산 천제단은 산신제를 지내던 신사(神祠) 자리로, 조선 후기에 천제 거행 욕구에서 등장하였다.
[연원 및 변천]
무등산 천제단에 대한 기록은 1789년(정조 13)경에 편찬된 『광주목지』에 처음 등장한다. 이후 읍지 지도에 빠지지 않고 기록되어 있다. 관영 천제단의 등장은 조선 후기 사회의 변화 가운데 하나이며, 이는 신라 때부터 존재한 신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지와 고지도에는 천제단의 존재가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천제단은 일제강점기인 20세기 초에 와서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되었다. 조선총독부 소유의 임야를 광주청년회에서 매입하였다는 사실을 볼 때 천제단의 터는 보존되고 있었다. 그러나 천제단에서 모셨던 천제는 사라졌다. 이후 1965년 의재 허백련은 천제단을 민족의 제단으로 신성시하고 이곳에 단군신전을 건립하고자 앞장섰다. 1974년 12월 21일 기공식을 가졌으나 당시 기독교 단체의 반대로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1965년 이래 매년 10월 3일에 민간 단체들이 개천제를 지내고 있으며, 초기에는 연진회(練眞會)에서 주도하다가 1988년 이후 광주민학회에서 집전하고 있다.
[신당/신체의 형태]
1789년 『광주목지』의 기록에는 "천제단은 주의 동쪽 15리 무등산에 있고, 신사는 주의 동쪽 15리 무등산 아래에 있다."고 되어 있다. 1872년 『광주읍지』에는 "신사는 무등산 아래에 있고, 천제단은 무등산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879년 『광주읍지』에는 "신단은 주의 동쪽 10리에 있고[지금은 폐지되었다], 천제단은 주의 동쪽 15리 무등산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895년 『광주읍지』에는 "천제단은 주 동쪽 15리 무등산에 있고, 신사는 주 동쪽 15리 무등산 아래에 있다."라고 되어 있다. 1899년 『광주읍지』에 첨부된 광주직할시 지도를 보면, 증심사와 약사사 중간 위쪽에 제단이 명기되어 있다. 또 18세기부터 19세기의 광주 지도에 천제단은 무등산 중간부에 있었다. 이러한 기록을 종합해 볼 때, 무등산 천제단은 신사를 계승하였고, 주의 동쪽 15리[약 5.9㎞]로 증심사 위 천제등이라는 등성이 지점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천제단은 신사를 계승하였기에 그 기능은 신사 때와 같았다. 국가의 무사안녕을 빌고 지역민의 평화와 안전을 비는 곳이다. 국가와 민족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 전염병이나 가뭄과 같은 자연 재해에 신사에서 빌면서 해법을 찾고자 하였다. 천제단 역시 각종 기복을 비는 곳이었다. 비가 오지 않자 관아에서는 천제단에서 기우제를 지냈고, 민간에서는 이곳에 와서 복을 빌었다.
[현황]
일제강점기에 단절되었던 제사를 1965년 이후 매년 10월 3일에 모시게 되었다. 민간 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무등산 천제단에서 개천제를 지내 왔다. 초기에는 개천제를 연진회(練眞會)에서 주도하다가, 1988년 이후 광주민학회에서 집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