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5091
한자 楊林洞-
영어공식명칭 There is a modern boy, modern girl in Yanglim-dong.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태준

[정의]

광주광역시 근대문화유산을 간직한 양림동 곳곳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공연, 투어, 전시 등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향유하며 근대문화의 총아였던 모던보이와 모던걸이 되어 떠나보는 근대 광주로의 시간 여행.

[양림동의 개척자 유진 벨]

양림동광주광역시 남구에 자리하고 있는 법정동이자 행정동이다. 조선시대에 부동방면에 속해 있다가 일제강점기인 1923년 ‘광주면(光州面)’의 1차 시가지 확장 때, ‘양림정(楊林町)’으로 편입되었고 광복 이후 양림동(楊林洞)으로 개칭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양림동은 전통적인 주거지였지만, 미국 남장로교 소속 선교사인 유진 벨(Eugene Bell)[1868~1925, 한국명 배유지]이 1904년 양림동에 거주지를 마련함으로써, 전통적 거주지와 근대적 건축물들이 혼합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유진 벨은 선교를 위해 1896년 나주에 왔다가, 거주지를 얻지 못해 목포로 옮겨 선교부를 설립하고 교회개척과 교육활동에 종사하면서 목포 정명학교와 영흥학교를 설립하는 데 기여한 뒤, 1904년 12월 19일 광주로 이주하였다. 1904년 12월 25일 주민들을 초청해 드린 예배는 광주 지역 최초의 교회인 양림교회의 시작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유진 벨은 이후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를 설립하고 의료활동과 교회개척에 매진하다가 1925년 9월 28일 생을 마치고 양림동 뒷산에 안장되었다.

[일제강점기 광주를 보살핀 ‘돌봄 공동체’]

양림동유진 벨의 이주 이후 선교사 클레멘트 오웬(Clement Owen)[1869~1909, 한국명 오원, 오기원] 외 여러 선교사들이 오게 되면서 '서양촌'으로 불릴 만큼 광주 기독교의 주요 장소가 되었다. 선교사들을 통해 교육의료사업이 활발해지면서 근대식 교육과 의료체계의 도입이 이루어졌다. 1905년 11월 20일 놀란(J. W. Nolan)이 환자를 돌보기 시작하면서 1911년 광주제중병원[훗날 광주기독병원]이 설립되기에 이른다. 이 병원의 간호부장으로 1912년 엘리자베스 쉐핑(Elisabeth J. Shepping)[1880~1934, 한국명 서서평]이 오게 되면서, 광주 지역 최초의 목사가 되는 최흥종과 함께 나환자들의 치료와 돌봄이 이루어졌다. 서서평은 1926년 로이스 닐(Lois Neel)의 도움으로 이일성경학교를 만들어 여성교육을 펼침으로써 여성전문인력[간호사, 조산원, 교사, 유치원 보모, 여성 전도사 등]을 배출하게 되었다.

외국인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조선인들의 협력을 통해 고아, 빈자, 걸인, 나환자는 물론이고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들까지 아우르게 됨으로써, 양림동은 일제강점기의 광주를 보살핀 ‘돌봄 공동체’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김마리아, 김함라와 고모인 김필례가 적극적으로 가담한 3.1만세운동이 양림동에서 고안되어 광주에서 폭발할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양림동은 다만 법정동, 행정동으로 고정된 장소가 아니라, 식민도시 광주와 조선의 비참을 외면하지 않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매진한 사람들의 주요한 서식처였던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에 의해 만들어진 근대건축과 함께 일제강점기의 요정으로 이용된 1920년에 지어진 최승효가옥은 독립운동 자금과 독립투사들의 은신처가 되기도 하는 등, 전통가옥의 형식에서도 이러한 보살핌이 이루어졌다.

[쓰레기장에서 태어난 펭귄마을]

오늘날 양림동을 역사문화마을로 명명하는 것은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건축인 이장우가옥처럼 ‘역사적 건축물’이 모여 있기 때문이 아니라, 각각의 공간과 이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역사와 적극적으로 호흡한 결과이고, 이 역사와 문화가 동시대 사람들에게 공유되기 때문에 환영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이는 여전히 양림동이 쌓아올리는 역사와 문화가 일제강점기와 근대사와는 또 다른 세파로부터 삶을 다독이고 보살피는 상징적 역할을 여전히 수행하고 있어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삶의 지속을 위태롭게 만드는 다양한 위기들을 양림동의 삶 속에서 구하고, 이를 통해 여러 삶을 건사하는 방식은 ‘펭귄마을’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이름도 없었던 마을이 ‘펭귄마을’이라는 이름을 얻고 사람들이 사랑하는 공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펭귄마을에서 살고 있던 마을 주민들의 노력으로부터 이루어졌다.

양림동 펭귄마을은 광주의 대대적인 도시개발이 일어나면서 발생하는 원도심의 주변화 과정을 마을 주민의 지혜와 헌신을 통해서 극복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관 주도의 지역개발이 아니라, 마을 주민들이 일구어 놓은 토대를 관이 뒷받침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어, 마을의 원천이 잘 보존되면서 새로운 가치들이 마을에 도입되고 있는 상황이다. 김동균[현 펭귄마을 촌장]씨가 빈집에 화재가 일어나 쓰레기장으로 방치된 곳을 마을 주민들과 치우고 텃밭을 가꾸기 시작하면서 변화해갔다. 펭귄마을이라는 이름도 교통사고로 걸음걸이가 펭귄을 닮게 된 마을 어르신 한 분의 애칭을 따 펭귄텃밭으로 부르다가, 마을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버려진 쓰레기들은 무조건 버려지지 않고 마을을 가꾸는 데 재활용되었으며, 펭귄마을 골목길은 모두 이를 기초로 하여 디자인되었다.

[광주의 예루살렘]

펭귄마을에는 양림동이라는 지명의 유래로 알려진 버드나무 한 그루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광주천변인 양림동에 자랐던 수려한 버드나무는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진 광주천 직강공사와 천변좌로 공사로 인해 대부분 사라지고 없지만, 최근 양림동에 있는 학강초등학교에 수령이 70여 년이 된 버드나무가 고사 위기에 처했다가 주민들의 노력으로 옮겨져 살아났다. 생태환경도 양림동을 말없이 일군 존재들이니, 이를 기억하고 잘 살리는 방식들은 적극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버드나무 이외에도 양림동호랑가시나무양림동의 식생 가운데서 빼놓을 수 없다. 양림동호랑가시나무는 광주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고 수령은 400년에 이른다. 호랑가시나무는 호랑이가 날카로운 잎에 등을 긁는다는 속설이 있는 나무로, 열매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피를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불우이웃돕기로 잘 알려진 ‘사랑의 열매’의 도안도 호랑가시나무에서 나왔다.

호랑가시나무는 양림동이 ‘광주의 예루살렘’으로 불리는 것을 실감나게 만드는 나무이기도 하다. 선교사 묘역과 우일선[Robert M. Wilson], 피터슨(Arnold A. Peterson), 허철선[Charles B. Huntley], 인도아[Thomas Dwight Linton], 원요한[John T. Underwood], 브라운(George Thompson Brown) 선교사 사택도 이러한 ‘기운’을 풍기고 있으며 김현승의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가 새겨진 시비도 숭고한 마음을 품게 만든다.

[모던보이와 모던걸이 다시 양림동을 활보하다]

광주 사람들은 물론이고 전국의 많은 사람들이 양림동을 방문하는 까닭은 광주를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의 정신을 느끼기 위해서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광주 근대의 백 년이 오롯이 녹아 있는 양림동에서 ‘모던보이’와 ‘모던걸’을 방문객을 위한 주요한 콘텐츠로 구성한 것도 피상적인 문화기획은 아니다. 달리 말해, 양림동의 역사적 기억을 모던보이와 모던걸과 같은 키워드로 양림동의 역사와 문화을 향유하는 것은 광주를 살리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원래 모던보이와 모던걸은 일제강점기의 근대적 문물을 라이프 스타일로 받아들인 사람들을 당시의 미디어가 표상한 것이다. 근대적인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은 당대의 대중잡지와 미디어를 통해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 실제로는 근대적 문화의 총아들로 식민지 근대도시의 문화 생산자이자 향유자였다. 영화 「모던보이」[정지우 연출, 2008]에서 보여주었듯이, 모던보이와 모던걸은 일제의 지배이데올로기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허영에 사로잡힌 식민지인들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광주 근대의 백 년이 응축된 양림동에 모던보이와 모던걸이 산책할 때, 당시의 비난의 눈으로만 이들의 걸음걸이를 바라볼 수는 없다.

예컨대, 「모던 걸 다이어리」[연출: 윤태식, 출연: 이태진·조혜수·이승학]라는 연극이 양림동 일대를 무대[‘광주 1930’, ‘다형다방’, ‘오웬기념각’, ‘우일선선교사사택']로 삼아 1930년대의 광주를 재현한 바 있다. 2015년에 초연되었고 2017년에 다시 공연된 「모던 걸 다이어리」 연극에서 모던보이와 모던걸이 양림동을 활보한 것이다. 음악가 정율성과 시인 김현승으로부터 인물 모티브를 따오기도 한 「모던 걸 다이어리」는 배우들과 관객이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실험적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를 통해 관객들이 역사적 시공간의 감각을 나눌 수 있도록 하였다. 「모던 걸 다이어리」 외에도 2016년 이후 「1930 양림쌀롱」에서 1930년대의 의상과 개량한복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하여, 일제강점기 광주의 근대 역사를 스스로 경험해보도록 유도한다. 나아가 당대의 광주를 건사한 숱한 사람들의 마음을 동시대 내에서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역사와 예술과 에너지가 숨쉬는 거리]

뿐만 아니라 양림동에서 이루어지는 '달빛투어'와 같은 행사도 드러나지 않은 역사를 걷는 일이며, '호랑가시나무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무는 일은 양림동에 깃든 내밀한 에너지를 더욱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드는 방식이기도 하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을 ‘가시화’하는 데 주력하는 예술가들이 양림동 이곳저곳에 작업실을 만든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양림미술관협의체[회장 한희원]가 있을 정도로 미술관도 여럿이 모여 있기도 하다. 광주 미디어아트의 대표작가인 이이남의 작업실부터 캐릭터 아트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는 젊은 페인터 윤석문의 작업실도 이곳에 똬리를 틀고 있다. 이에 더해 2021년 3월 3일 이이남 스튜디오를 중심으로 제1회 양림골목비엔날레가 개최되어 양림동의 예술적 활력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앞으로 양림동이라는 역사가 예술로 그리고 양림동에서의 예술이 역사가 되어 광주를 건강하게 만들어갈 예정이다.

달리 말해, 양림동과 같은 역사문화적 장소가 중요한 건 ‘역사 자체’가 아니라 역사와 호흡함으로써 얻는 기운을 통해 공동체를 살도록, 살아가도록 만들어준다. 왜냐하면, 문화예술가들로부터 선교사, 독립운동가의 숨결에서부터 매일매일을 성실하게 살아온 마을 사람들의 말 없는 일상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일군 양림동의 역사는 이 동네를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애정과 감각을 체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작은 미술관과 시민들이 함께 꾸려가는 전시공간 그리고 곳곳에 스며 있는 예술가들의 작업실도 양림동은 물론이고 광주와 이를 넘어 세계를 건사하고 있으며, 자신들만의 손재주로 내어주는 커피가게와 빵집, 떡집들도 마찬가지다. 양림동 주민들이 함께 운영하는 상추 튀김을 맛보아야 하는 이유는 특출나서가 아니라, 함께 마을을 지키고 있어서이다.

따라서 양림동에서 모던보이, 모던걸이 되는 일은 단순히 역사를 통한 ‘복고’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다. 모던보이와 모던걸에게 요구되는 것은 양림동이 담고 있는 역사의 숨결과 에너지를 동시대에 호출하기 위한 일종의 ‘의례’로 받아들여야 한다. 사실 우리 시대는 그 누구도 모던보이나 모던걸이 될 수 없다. 이미 우리는 무엇이라고 명명하기도 어려운 ‘세대’의 출현을 목격하고 있는 중이며 눈으로조차 따라가기 어려운 세계의 급속한 변화를 온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조건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세파에 이리저리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네 삶이라면, 이와 마찬가지로 혹독한 시절이었던 역사적 경험들을 온몸으로 나누어 받음으로써 우리 앞에 닥친 위기들을 헤쳐나갈 힘을 얻고 또 이웃과 이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양림동 역사문화마을이 귀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사람을 구하고 삶을 예술적으로 향유한 시간이 우리 시대에도 양림동에서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은 과한 욕심이 아니다.

따라서 모던보이나 모던걸이 나타나더라도 놀라서는 안 된다. 벽을 배경으로, 담벼락 아래에서, 호랑가시나무를 얼굴에 대고 카메라를 누를 때, 이들의 모든 발걸음이 이 세계를 구원하는 행위들일 수 있어서 그렇다. 그러므로 양림동에선 우선 모던보이나 모던걸이 되자. 그렇게 힘을 얻고 또 나누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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