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17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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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晋州義妓祠 |
영어음역 | Uigisa Shrine |
이칭/별칭 | 논개사당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500-17 촉석루 경내 서편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한갑진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3년 7월 20일 - 진주 의기사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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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진주 의기사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재지정 |
성격 | 사당 |
양식 | 익공계|맞배건물 |
건립시기/일시 | 1740년 |
관련인물 | 최진한|남덕하|홍화보|정약용 |
정면칸수 | 3칸 |
측면칸수 | 2칸 |
소재지 주소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500-17번지 촉석루 경내 서편 |
소유자 | 경상남도 진주시 |
문화재 지정 번호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
[정의]
임진왜란 때 적장을 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순국한 의기 논개(論介)의 사당.
[건립경위]
진주 의기사는 1721년(경종 원년) 경상우병사로 부임한 최진한이 진주지역민 등의 요구와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을 근거로 논개에 대한 포상을 조정에 건의하였고, 1740년(영조 16) 경상우병사 남덕하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건립되었다.
[변천]
1779년(정조 3)에 경상우병사 홍화보(洪和輔)가 낡고 부서진 곳을 수리하고 단청을 새롭게 하였고, 사위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에게 「의기사기」를 지어 걸도록 하였다. 또한 1823년(순조 23) 진주목사 홍백순(洪百淳)과 경상감사 이지연(李止淵)이 다시 중건하였으며, 춘추(春秋)로 제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후 6·25전쟁으로 진주 의기사는 완전 소실되었다가 1960년 사단법인 진주고적보존회가 재건하여 현재의 건물로 유지되고 있다.
[위치]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500-17번지 촉석루 경내 서편에 위치하고 있다.
[형태]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의 형태를 띠고 있는 한옥 사당이다. 진주 의기사의 정면 좌측에는 ‘을사5적’으로 악명 높은 친일파 이지용에게 “기생 줄 돈이 있으면 나라를 위해 피 흘리는 젊은이에게 주라”고 꾸짖었던 의기 산홍(山紅)의 시가 걸려 있다. 또 정면 우측에는 다산 정약용의 「의기사기」와 시 1수가 판각되어 걸려 있다.
[현황]
진주 의기사는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1868년(고종 5)에 진주목사 정현석(鄭顯奭)이 매년 6월 중 길일을 택하여 의암별제를 지내도록 한 이래로 현재까지 여성들이 제관이 되어 논개의 의로움을 기리는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의의와 평가]
논개의 의로운 죽음을 기리고 있으며, 그 행사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어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