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26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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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宗敎 |
영어음역 | jonggyo |
영어의미역 | religion |
분야 | 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집필자 | 손병욱 |
[정의]
절대(絶對)의 초인간적인 신을 숭배하여 선악을 권계하고 행복을 얻고자 하는 행위.
[개설]
인간에게 종교가 필요한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 한계를 갖는 유한한 존재라는 자각에서 기인한다. 특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사후세계에 대한 불안감이 매우 크기 때문에 전지전능(全知全能)하다고 믿는 절대자에게 의탁하여 현세에서는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추구하고, 사후세계에서는 구원을 희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행위의 형태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진주지역은 한국의 명산인 지리산을 비롯한 많은 준봉과 남강을 끼고 있는 이른바 ‘고산벽립(高山壁立), 장강경정(長江鏡淨)’한 이곳의 환경적 특성뿐 아니라, 진리에 대한 남다른 탐구심과 숭현심(崇賢心), 그리고 낙선호의(樂善好義)하는 기질로 대변되는 문화적 특성으로 인해 유교와 불교가 매우 성하였고 그 자취도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현황]
1. 유교
영남학파의 연원을 살펴보면 1489년(성종 20년)에 진주 촉석루에서 영남의 거유들이 회동하여 금란계(金蘭契)를 조직하면서 비롯된다.
김일손(金馹孫)이 진주목의 교수로 와 있을 때 함양군수를 지낸 스승 김종직과 당시의 함양군수 조위(曺偉), 뒷날 안음현감이 된 정여창(鄭汝昌) 등 당대의 쟁쟁한 선비들이 모여서 금란계를 조직하였다. 금란계는 마음을 같이하고 돈 같은 이로움을 버리며 뜻을 같이한다는 것으로 『주역』의 ‘이인동심(二人同心), 기이단금(其利斷金), 동심지언(同心之言), 기취여란(其臭如蘭)’의 구절을 따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세조 찬위를 빗댄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김일손이 사초에 실은 것이 발단이 되어 1498년(연산군 4년)에 무오사화가 빚어지고 1504년(연산군 10년)에는 갑자사화가 일어나서 사림파는 일시에 화를 당하였다. 다행히 중종반정(1506)이후 등장한 조광조에 의하여 사림파가 한때 세를 떨쳤으나, 기묘사화로 다시금 사림이 크게 위축되었다.
한편, 김굉필의 문인 김안국(金安國)은 1517년(중종 12년)에 경상도 관찰사로 와서 도내 향교에서는 반드시 『소학』을 가르치게 했고, 또 소학계(小學契)를 조직하도록 하여 앞서 조직했던 금란계의 맥을 잇도록 했다. 이 운동은 전국의 사림에게 큰 활력소가 되어 조선 말기까지 이어져 왔고, 또 네 차례의 사화에도 불구하고 영남학파는 명맥을 이어 이황과 조식에 의해 크게 융성하였고, 이후 숙종 때에 이르기까지 영남학파가 조정에 비교적 활발하게 출사하는 기반이 되어왔다. 이로써 진주는 많은 인재를 배출하는 요람지로서 해동(海東)의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퇴계는 소백산 밑에 살고 남명은 지리산 동쪽에 살았다. 이곳은 모두 영남에 속한다. 퇴계는 어짊을 숭상하고 남명은 기절을 숭상하였다. 마치 바다와 같이 넓고 산과 같이 높았다. 이에 영남은 문명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진주는 조선 유학의 발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태동지로서의 역할을 하였던 곳이다.
한편, 남명 조식의 훈도를 받아서 유교에 있어서 일가를 이룬 인물로는 성주의 동강 김우옹, 한강 정구, 합천의 내암 정인홍, 고령의 송암 김면, 산청의 덕계 오건, 진양의 수우당 최영경 등을 꼽을 수 있다.
남명의 강우학풍은 경의(敬義)로 대변되는데, 남명은 그가 허리에 차고 다니던 경의검(敬義劍)에 쓰인 패검명(佩劍銘)에서“내명자경(內明者敬;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이다.), 외단자의(外斷者義;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의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경(敬)을 상징하는 물건으로서 성성자(惺惺子; 몸에 지니고 다니는 방울로서 마음을 항상 깨어있게 하여, 스스로 경계하며 수양하는 자세를 유지하게 하는 상징적 물건이다.)를, 의(義)를 상징하는 물건으로서 검을 들었다. 이 검이야말로 남명의 정신을 잘 상징하는 물건이 아닐 수 없다. 이 검에는 의(義) 기준에 입각한 과감한 실천은 물론이고 문(文) 못지않게 무(武)를 중시해야 한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기절(氣節)을 중시하는 남명의 정신은 멀리 가야의 정신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는데, 가야정신은 화랑도(花郞徒)의 도의(道義) 중 특히 무도(武道)에 속하는 의의 정신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남명이 의와 기절을 숭상하고 무를 중시하는 경향으로 인하여 임진왜란 때에 그의 문하에서 많은 의병장들이 배출되어서 국난극복에 다대한 공훈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인조반정으로 말미암아 남명학파는 타격을 받기는 했으나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다시금 영조의 이인좌의 난[1728, 영조 4] 때 여기에 연루된 인물들 중 남명학통에 속하는 이들이 많다는 이유로 이후 영남우도 지역을 반역향(叛逆鄕)으로 간주하면서 50년간 과거를 치르지 못하게 하는 정거(停擧)에 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남명의 훈도를 입어서 형성된 이 지역선비들의 독특한 기질은 그대로 계승됨으로써 역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조선 말기의 진주농민항쟁(1862)-진주 동학군의 대일본군 전투(1894)-진주의 의병활동(1896)-항일독립운동 등에 있어서 이 지역민들이 보여준 치열한 투쟁의 모습은 바로 남명학파가 중시한 불의를 참지 못하고 의 기준에 입각하여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의식의 발로였다.
2. 불교
진주지역에 불교가 전래되기 시작한 것은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경부터였다. 신라 경덕왕[재위 742~765] 때 왕을 위하여 지리산에 단속사(斷俗寺)를 세웠고, 840년(문성왕 2)에는 진감선사(眞鑑禪師) 혜소(慧昭)가 지리산 화개곡에 쌍계사(雙磎寺)를 중창하였으며, 879년(헌강왕 5)에는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월아산(月牙山) 아래에 청곡사(靑谷寺)를 세웠는데, 이것이 진주지역에 세워진 신라시대의 사찰이다.
고려시대에는 중기 이래로 촉석루가 있는 진주성 경내에 용두사(龍頭寺)가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합천군 누정조에 의하면, 하륜(河崙)의 「촉석루기」에 이 절이 나타나고 있다.
조선에 들어와 태종 때 숭유억불정책의 일환으로 종전의 11개 불교 종파를 7개 종으로 강제 통폐합하였고, 그 중심사찰 242개소 이외의 절은 모두 폐쇄시켰다. 세종은 7종으로 통합된 종파를 다시 선·교 양종으로 통합시킨 후 양종을 합쳐서 36개 사원만을 남기고 그 밖의 것은 모두 폐지해버렸다.이후 세종 중기에서 세조에 이르기까지는 배불(排佛)의 기세가 누그러지고 다시금 융성의 조짐을 보였으나 성종 이후 연산군과 중종의 시대를 거치면서 배불의 기세가 다시금 맹위를 떨쳤다.더욱이 중종은 승과마저 완전히 폐지하고 1538년(중종 33)9월에는 『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나 있는 사찰 이외에는 모두 헐어버렸다. 이때 용두사도 헐린 것으로 추정된다. 뒤에 명종[재위 1545~1567] 때 모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호불 의지에 의하여 다시금 승과가 부활되면서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과 사명당(泗溟堂) 유정(惟政) 같은 이들은 승과 출신으로서 임진왜란 때 의승군을 조직하여 국난 극복의 선두에 섰는데, 진주에서도 서산의 문인인 중관대사(中觀大師) 해안(海眼)이 크게 활약하였다. 당시 서산대사와 그의 문인으로서 임진왜란 때 국난 극복에 앞장섰던 몇몇 스님들은 반조선적인 비밀결사체 당취(黨聚)조직의 일원이자 신불승(神佛僧)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조 당시에 당취의 본거지는 전국적으로 두 군데가 있었는데, 바로 지리산과 금강산이었다.
광복 이후 불교계에서는 전국적으로 청정비구의 전통을 되찾으려는 정화불사운동이 드세게 일어났는데, 이때 정화불사에 앞장선 두 명의 걸출한 선승이 있었다. 그 두 분은 조계종 종정을 역임한 바 있는 이 고장 진주 출신 청담(靑潭)[1902~1971] 스님과 이웃 단성 출신 성철(性徹)[1912~1993] 스님이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이 고장 특유의 기질이 이 두 분의 걸출한 선승을 통해서 유감없이 발현됨으로써 광복 이후 한국 불교계의 정화에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3. 기독교
한국 개신교의 교세는 1984년 선교 100주년을 맞이한 이후, 1989년 현재 교회당 29,920개처, 교직자 55,989명, 그리고 신도수는 10,312,813명으로서 총인구의 25%에 해당할 정도이다. 이는 수적으로나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영향력에 있어서 막강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며, 한국사회는 기독교에 대하여 그 기왕의 공헌이 빛났던 과거의 선교적 자세로 산적한 문제들의 근원적인 윤리적 차원에서 수행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그 대응방법에 있어서 보수와 혁신의 방법론적 이견이 있고, 따라서 정치문제에 대한 과격과 온건의 참여문제로 교회내부에서의 정비가 진행 중에 있다.
기독교가 진주지역에 처음으로 전래하기는 1889년 (고종 26), 호주 장로교의 선교사 데이비스(J.H.Davies) 목사 남매가 부산에 정착한데서 비롯된다. 한국선교에 앞장섰던 장로교는 미국 남장로교, 북장로교와 캐나다장로교, 호주장로교로 선교구역을 나누어 맡았는데, 부산·경상남도는 호주 장로교가 맡았다. 이들은 부산·마산·진주·거창·통영(충무)을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진주지역은 사천·곤양·하동·남해·의령·산청·단성·삼가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다. 진주지역에 선교사가 처음 도착한 것은 1905년(광무 9) 10월 28일이다. 이때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전도부 후원으로 앞서 1902년(광무 6)에 부산에 온 거열휴(巨烈烋;Dr. Hugh Currell)가 처음으로 진주에 정착한데서 시작된다. 그는 의사 및 선교사로서 부인과 자녀, 그리고 동역자(同役者)인 한국인 박성애(朴晟愛)와 그 가족을 동반하였다. 그는 아일랜드 로열대학교 출신으로서 진주에서 선교와 의료활동, 교육활동 등을 전개하다가 1915년에 본국으로 돌아가기까지 이곳에 교회, 병원, 학교 등을 설립하였다.
박성애는 부산 출생으로 성경학교를 졸업한 후 조사(助事)로 활동하다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진주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하였고, 1920년에 창원으로 전임하였다.
거열휴 선교사 일행은 처음 성내 4동에 있는 초가 10칸을 매수하여 그곳에서 처음으로 예배를 보았고 1906년(광무 10)에는 대안면 2동에 예배당을 지어 전도에 힘썼다. 그 후 예배당은 1913년 중안 3동을 거쳐 1916년 옥봉리로 옮겼다가 1933년에 이르러 지금의 진주교회 자리인 봉래동 37번지[의병로250번길 16]에 벽돌집 예배당을 신축하고 교회명칭도 옥봉리 교회에서 진주교회로 개칭하였는데, 이것이 진주의 첫 교회이자 서부경상남도의 모체가 되는 교회였다.
4. 천주교
한국의 천주교는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와서 이벽과 함께 선교활동을 전개함으로써 비로소 신앙공동체가 구성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의 박해를 받으면서도 꾸준히 성장하여 현재 천주교는 신도수 250만의 교세를 자랑하는 종교로 성장하였다.
진주지역의 경우, 1888년(고종 25) 서부경상남도지역의 첫 교회인 문산공소가 창설되었고, 1905년(광무 9)에는 본당으로 승격되어 서부경상남도의 총본산이 되었다. 당시 문산본당의 관할 구역은 진주를 비롯, 사천·삼천포·고성·통영·거제·함안·의령·합천·산청·하동·남해, 그리고 전라남도의 순천까지 포교지역으로 다스려 미사와 성사를 집행하는 공소가 무려 97개소나 되었다. 1926년에는 진주 옥봉공소가 본당으로 승격하였고, 칠암성당은 1965년 3월에 옥봉본당에서 분가하여 본당으로 승격하는 등의 변화, 발전이 있었다.
5. 기타종교
·천리교
천리교는 외래유입종교로서 본고장은 일본이다. 일본의 신흥종교에 속하며, 1838년 일본 나라현[奈良縣]에서 무녀였던 중산미기(中山美岐)에 의해서 창교되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천리천명(天理天命) 어버이신’으로 명명하고 교조가 되었다. 이 천리교는 1900년 일본인 사와다[澤田]에 의해서 부산에 소개되었다. 1903년에 서울에서 포교되었고, 1917년에는 서울 동자동(東子洞)에 ‘천리교 포교관리소’가 설립되었다.
신앙의 대상인 천리천명 어버이신은 우주의 삼라만상을 창조하고 주재하며 섭리하는 주체로서 원신(元神)이다. 이 원신은 십주신(十住神)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원신과 별개가 아니라 원신의 속성으로 분류되는 신이다.
이 신을 신앙하기 위해서는 삼훈(三訓)과 팔계명(八戒銘)이 요청된다. 삼훈은 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② 정직한 마음으로, ③ 부지런히 일하자 이다. 그리고 팔계명은 ① 탐내는 마음, ② 인색한 마음, ③ 편애하는 마음, ④ 미워하는 마음, ⑤ 원망하는 마음, ⑥ 분노하는 마음, ⑦ 욕심내는 마음, ⑧ 교만한 마음을 버리자는 것이다. 이러한 삼훈 팔계명의 계행을 지키게 되면 모든 재난과 질병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진주에는 망경천리포교소, 천리교산성교회, 영웅교회, 천리교진산포교소, 진성교회, 안심교회 등이 있다.
·금강대도
금강대도(金剛大道)라고도 하는데, 창도자는 이상필(李尙弼)[1868~1934]로서 강원도 통천에서 출생하여 한학을 공부하다가 금강산에 입산하여 수도한 결과, 33세에 무학자연(無學自然)의 삼통대도(三統大道)를 통각하였다. 도호를 토암(土菴)이라고 하고 금강도사로 불리우기도 하였다. 1917년에 충청남도 연기 금천에다가 지부를 설치하였다. 국조 단군의 성통(聖統)을 받아 단군의 신칙(神勅)에 따라 포교하면서 일제의 눈을 피해 관성교(關聖敎)로 가장하고 단군을 백성사(白聖師)라 이름하여 신봉하였다. 1926년 신도수가 증가함에 따라 금강대도라는 새로운 교단을 창립하였다. 이때 토암은 상제의 화신이라고 하여 그의 신권(神權)에 의한 후천조화선계(後天造化仙界) 정부가 세워진다고 믿는 신도들이 모여들었다. 해방 후 1957년에 단군천선금강대도(檀君天仙金剛大道)라는 이름으로 문교부에 등록되었고, 뒤에 다시 단군수교금강대도(檀君授敎金剛大道)라고 개칭하였다가 금강대도로 고쳤다.
교조인 토암선생을 태상옥(太上玉)으로 신봉한다. 태상옥은 천상의 삼청계[태청(太淸)·상청(上淸)·옥청(玉淸)]를 주제(主帝)로 하는 무상일위(無上一位)인 무극태극현화천존(無極太極玄化天尊)이다. 이 천존님이 제세를 위해 대신사(大神師)로 강세하였으므로 이를 준수하면 천상에 귀원(歸元)하신 대신사와 더불어 구세동락(救世同樂)의 경지에 도달한다고 믿었다. 태상상제가 제시한 삼통교리는 ① 천지인 삼재가 합일하고, ② 유불선 삼교가 합일하고, ③ 성명정(性命精) 삼진(三眞)이 귀일하고, ④ 심기신(心氣身) 삼아(三我)가 합덕하는 금강의 현묘한 도리를 말한다.
진주시 상봉동에 1979년 설립된 금강대도 교당이 있다.
·성덕도
현재 진주에는 성덕도(교화사), 국제도덕협회, 진주교회당 등 세 개의 교당이 있다.
6. 토속종교
민속신앙, 내지 민간신앙은 고등종교와는 달리 형식과 내용이 조직적이지 못해 지역마다 성격을 달리하며 교주나 창시자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보면 민속신앙은 종교라기보다는 전통적인 관습이나 풍속으로 보는 견해가 많으며 생활양식의 한 부분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민간신앙의 공통적인 성격으로는 다신(多神) 다령교적(多靈巧的)이라는 점이다. 또 일반종교는 교리를 기준으로 한 신앙체계라면, 민속신앙은 철에 따른 음식과 유희, 오락, 상부상조하는 미덕을 갖추고 있으며 가족이나 마을 공동체 등 집단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다. 특히 민간신앙은 자연을 극복하기 보다는 자연에 순응하며, 동식물에까지 신앙의 혜택을 기원하고 있다.
민속신앙은 크게 동제와 가신신앙(家神信仰)으로 나눌 수 있다.
·동제
진주지역의 동제로는 전통 동제 외에 우제(牛祭), 우마구제(牛馬驅祭), 풍신제(風神祭), 용왕제(龍王祭) 등이 있다. 가신신앙에 속하는 것으로서 이 지역에서 행해졌던 것으로는 조상단지, 삼신할미, 칙신, 업신, 조왕신, 문신 등을 들 수 있다.
동제는 당산제(堂山祭), 동신제(洞神祭), 당제(堂祭)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것은 전통적인 연례행사로서 마을이라는 집단의 사회적 의미와 의례라는 종교적 의미가 복합된 토속신앙으로 볼 수 있다. 동제의 목적은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을 정성들여 받듦으로써 마을의 화평은 물론 가족의 건강, 나아가서는 풍년을 기원하는 제의식(祭儀式)으로 행해져 왔다.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절대시 하면서 동제를 음사(淫祠)라고 하여 배척하였고, 일제시대에는 민족혼을 말살하고 공동체의식을 약화시킨다는 차원에서 노골적으로 탄압하였다. 해방이후 서구문화를 수용하면서 급속도로 세를 확장한 기독교에 밀려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70년대 새마을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미신타파운동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동제를 위한 많은 공간들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새마을 운동기간 동안의 파괴는 기존의 유교문화가 극성을 부리던 오랜 기간 동안, 민속신앙을 못 배우고 못 가진 사람들의 신앙으로 치부해왔던 그러한 의식을 청산하기 위해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즉, 정신만 살아있다면 때로는 ‘창조를 위한 파괴’는 역사발전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것임을 알려주는 사례가 새마을운동에 수반된 파괴였다. 새마을 운동으로 자신감을 회복한 한국인들이 우리 것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고 그 결과 다시금 민간신앙에 주목하여 그 원형을 되살리는 것의 중요성을 자각하였기 때문이다.
동제의 특징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의회기능이다. 마을의 공동현안사업을 논의하는 마을 의회의 역할을 한다. 둘째, 축제기능이다. 셋째, 신인합일(神人合一)의 행사이다.
구 진양군 지역에서 동제를 지내고 있는 마을은 전체 행정리 310개 마을 가운데 63개 마을이다. 전체의 20%를 차지한다. 과거에 지내다가 중단한 마을은 49개 마을로 동제를 지낸 경험이 있는 마을은 112개 마을이고 전체의 35%이다. 제의 이름은 동신제가 33개로 가장 많고, 동제와 당산제가 각 10개였다. 다음은 목신제가 3개, 산신제 2개, 당제 1개였다. 진양의 제일은 음력 정월에 집중되어 있었다. 정월 대보름 28개 마을, 1월 14일 자정 4개 마을이었다. 동제에 있어서는 제관의 역할이 중요하므로 제약이 심하였다. 옛날에 비하면 제약이 많이 느슨해 졌지만, 적어도 3~15일 동안 상가출입 금지, 부부관계 금지 등의 정성을 요구하게 한다. 동제를 지내는 장소는 나무 아래 30곳, 산 4곳, 장승 주변 3곳, 우물 2곳이다. 한군데에서 지내는 곳도 많지만, 때로는 네 곳을 옮겨 다니며 지내기도 한다. 다만 한 가지 특징적인 것으로는 해안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당집이 진양군 지역에는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이다. 제물로는 개고기를 쓰지 않는 공통점이 있고, 어물을 쓰지 않는 동리도 있다. 돼지 닭 세 마리, 참조기, 미역국을 쓰는 마을 외에 소지종이를 많이 쓰면 좋다고 생각하는 마을도 있다.
우제는 명석면 동전마을과 홍지마을에서 매년 음력 7월 15일 백중날을 맞이하여 지내는데, 머슴과 함께 소에게 감사하고 산신령에게 소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다.
소마구제는 미천면 미곡리 부수마을에서 발견된다. 백중날인 7월 15일 소를 키우는 사람들이 성의대로 음식을 장만하고 막걸리를 제주로 삼아서 오후 1시께 질병이나 부스럼이 없는 젊은이 가운데서 선발된 제관이 제를 집례한다. ‘우리 동네 소와 가축이 아무 탈 없이 잘 자라게 해 달라’는 축문 속에서 이루어진다. 제가 끝나면 씨름 등을 하면서 백중 잔치를 벌인다.
용왕제는 기우제(祈雨祭)라고 부르기도 하고, 물의 왕인 용왕을 믿는 것으로 일명 ‘무제’라고도 한다. ‘무’는 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대개 음력 정월 대보름날 강가나 우물 등 물이 있는 곳을 찾아가서 간단한 제물을 차려 놓고 달이 떠오를 때 합장하고 기도한다. 또는 여름철 가뭄이 극심할 때를 택일하여 밤에 지내는데, 그 목적은 천신 및 용왕님께 비를 내리게 해 달라는 것이다. 그 외에 묘파기와 주술이 따르기도 한다. 주술적 방법으로는 돼지나 닭의 목에서 피를 뽑아 제단에 뿌리는 것이다. 또 가뭄의 원인을 용이 되려고 하다가 실패한 꽝철이(이무기)가 욕심을 부리는 결과라고 하여, 여름철 밤에 꽹과리를 울리면서 높은 산에 올라가 꽝철이를 쫓아내는 방법도 있다.
정촌면 관봉리 고미마을에서는 음력 섣달 그믐날에 우물가에 촛불을 켜 놓고 용왕제를 지냈으며 명석면 외율리 외율마을에서는 유월 유두날에 지내기도 하였다.
·가신신앙
옛 사람들은 집안의 모든 곳, 방이나 마루 심지어는 변소에도 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들 신은 가족구성원은 물론이고 한 가정의 길흉화복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 신을 섬기는 정성이 다른 신앙에 뒤떨어지지 않았다. 가신신앙은 가정단위의 생활공간내의 여러 대상물에 대하여 주부가 사제(司祭)가 되어 행하는 신앙이라고 하겠다. 크게 구분하면 ① 안방을 주로 한 조상신 ② 안방을 주로 한 삼신 ③ 마루를 주로 한 성주신 ④ 부엌의 조왕신 ⑤ 뒤곁의 택지신[터주신] ⑥ 뒤꼍의 재신(財神) ⑦ 출입구의 문신(門神) ⑧ 뒷간의 변소신[則神] ⑨ 우물·샘의 용신 등의 형태로 나눌 수 있다.
조상단지는 거의 종가에서만 이어져 왔다. 이 단지는 조상의 제를 지내기 위한 식량을 저장해 두는 곳이거나 농사가 잘 되게 해 달라는 뜻이 담긴 것이기도 하다. 햇곡이 나오면 갈아 넣는데 이 곡식으로 제사 때 메를 짓는다. 명석면 왕지리 왕지마을에서는 음력 10월 15일 새벽에 햇곡식으로 밥을 차려놓고 손을 비비며, 명석면 외율리 팔미마을에서는 가을에 좋은 날을 잡아 햅쌀을 조상단지에 갈아 넣고 제물을 차려 제를 지낸다. 조상단지에 곡식을 갈아 넣는 일을 고시(高矢)한다고 한다.
칙신은 변소의 신이다. 이 신은 성미가 고약하여 사람들이 꺼렸고, 음력으로 6이 든 날은 변소에 가지 않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업신은 그 집의 재물을 관장하는 신이다. 업의 종류는 구렁이나 두꺼비 등이 있는데 집안에 살고 있는 파충류 등이 그 주체다.
조왕신은 부엌의 신으로 부뚜막 뒤에 조왕신이 있다고 믿었다. 맨 먼저 뜬 밥주발을 부뚜막에 놓고 소망을 빌거나 첫 새벽에 떠온 우물물을 떠 놓고 자손의 무사 성공을 빌기도 하였다. 조왕신은 냄새나는 나무를 태우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고 여겨 조심하였다. 주부와 가장 밀접한 신이라고 할 수 있다.
문신은 대문을 지키는 신이다. 집안으로 들어오는 액을 막아주는 문신을 섬기는 정성은 뚜껑 있는 바구니에 오색 헝겊을 담아 놓은 데로 이어지며 무당의 쾌자를 넣기도 한다.
7. 민족종교
진주지역의 대표적인 민족종교로는 천도교와 원불교, 그리고 증산도, 대순진리회 등을 들 수 있다.
·천도교
천도교는 수운 최제우가 창도한 동학(東學)으로부터 연원하였다. 최제우의 나이 37세 때인 1860년(경신년) 4월 5일 한울님[천주]의 가르침을 받아서 천도의 진리를 체득하게 되었다. 이어서 2세 교주인 해월 최시형을 거쳐 3세 교주 의암 손병희에 이르러 드디어 천도교를 창도하기에 이르렀다. 천도교는 최제우의 동학 창도이후 근대의 한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는바, 1894년의 갑오동학혁명운동, 1904년의 갑진개화혁신운동, 1919년의 삼일독립운동, 이후의 신문화운동, 광복 이후 북한 지역에서 남북통일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천도교의 교리를 보면 한울님을 내 안에 모시기[侍天主] 위하여 수심정기(守心正氣)를 강조하고 또 수심정기를 위한 방법으로 성경신(誠敬信)의 마음으로 21자 주문을 외울 것을 주장하는 등 우리의 토속적인 정서를 잘 반영하고 있는 종교이다. 매우 무속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최제우의 득도 과정을 보더라도 일종의 접신현상을 엿볼 수 있다. 이는 마치 최치원이 난랑비문서(鸞郞碑文序)에서 설파한 포함삼교(包含三敎), 접화군생(接化群生)의 현묘지도(玄妙之道)를 재현한 것과 같다. 그리하여 천도교는 그 행정조직을 포(包)라고 하고 교화조직을 접(接)이라고 하는데 이 역시 포함삼교, 접화군생에서 온 말이다.
진주지역에는 1960년에 설립된 문산천도교가 문산면 삼곡리에, 1978년 8월에 설립된 진주시교구가 진주시 신안동에 소재하고 있다.
·원불교
원불교는 1916년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1891~1943]이 대각(大覺)한 후에 창도한 일종의 민족종교이다. 비록 원불교라고 이름하였으나 박중빈은 대각 이전까지 불교와는 무관하였던 인물이었다. 도리어 그는 신선(神仙)이 되고자 하여 각고의 수련 끝에 대각한 후 비로소 불교를 접하고 자기가 깨달은 내용이 불교와 매우 유사한데 착안하여 원불교라고 이름하였다고 한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슬로건 하에 진리의 표상인 일원상(一圓相)을 중심으로 크게 인과보응(因果報應)의 신앙문(信仰門)과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수행문(修行門)으로 나누어지는 교리체계를 갖고 있다.
원불교가 진주에 전래되기는 1963년에 진주교당이 설치된 데서 비롯된다. 1981년에는 동진주교당이 설치되고, 1982년에는 서진주교당이 설치되었다. 진양군 지역에는 이반성면에 용암교당이, 문산면에 문산교당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진주지역에는 1988년 진주교구청이 설치되어 서부경상남도 16개 교당을 총괄하고 있다.
·증산도
진주지역에는 1983년 설립된 대순진리교가 인사동에 소재하고, 1991년에 설립된 증산도중앙종무부 소속의 진주도장이 하대동에 소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