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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1671
한자 儒敎
영어음역 Yugyo
영어의미역 Confucianism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집필자 손병욱

[정의]

공자(孔子)를 개조(開祖)로 하는 전통시대의 대표적인 사상.

[유교의 교리]

유교의 교리는 곧 인의(仁義)와 도(道)와 수기(修己), 치인(治人)에 귀결된다. 『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의 오경(五經)과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의 사서(四書)는 유교의 중요한 경전이다.

공자 이후 유교가 천하에 행하여져 여러 학파와 함께 일어났으나 증자(曾子), 자사(子思)를 거쳐 맹자(孟子)에게 전한 학이 정통을 이루었다. 맹자는 인의의 도를 세워 성선(性善)과 양기(養氣)의 설을 주장하고 인정(仁政)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송나라에 와서 성리학이 일어나 주자에 이르러 대성하였는데, 성리학은 유교를 독창적인 철학의 세계로 지향시켰다. 성리학의 요점은 우주의 본체를 태극(太極)이라고 하고 여기에서 이기이원(理氣二元)이 생기고, 이 이원으로써 심성(心性)을 해석하여 본연의 성과 기질의 성을 논하고, 수양론에 있어서는 거경(居敬)과 궁리(窮理)로써 주요한 안목을 삼았다. 유교는 실천적인 내용과 덕목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실제 생활에 있어서 윤리적인 기본 규범이 되어왔다.

[한국의 유교]

서울대학교 종교학과의 금장태 교수는 『한국종교사상사Ⅱ』라고 하는 저술에서 유교가 한국사상사를 통해서 드러내고 있는 세 가지 두드러진 특징을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첫째, 우리나라에 전래한 최초의 보편적 사상이요, 종교라는 사실이다. 둘째, 사회의 통치이념과 제도 또는 사회 도덕 규범으로 점차 깊이 뿌리를 내려갔다는 점이다. 셋째, 우리 사회에 가장 강하게 전승되어 온 전통사상이라는 것이다.

[조선의 유교와 학파]

삼국시대에 유교가 도입된 이후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러서 크게 번창하였다. 조선조에 와서 유교, 특히 주자학적 성리학은 관학이자 통치이념으로서 확고부동한 위치를 점하였고 정도전(鄭道傳), 권근(權近), 김종직(金宗直), 조광조(趙光祖) 등을 거치면서 성리학에 대한 이론적 연구가 심화되었다. 특히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으로 갈등이 심화되다가 사대사화(四大士禍)를 겪으면서 사림파가 일시적으로 크게 위축된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사림파(士林派)가 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선조 연간(1567~1608)부터 성리학의 심성론(心性論)을 둘러싼 의견의 대립으로 크게 퇴계 이황으로 대표되는 영남학파와 율곡 이이로 대변되는 기호학파로 분화되었다.

영남학파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적인 입장이라면 기호학파는 이기이원론적 일원론(一元論)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기이원론을 주리론(主理論)이라고 한다면 이기이원론적 일원론은 주기론(主氣論)이다. 주기론은 정확하게 주리론적 주기론으로서 기일원론(氣一元論)과는 다르다. 심성론으로 볼 때 영남학파가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창한데 비해 기호학파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내세웠다. 그리고 영남학파는 다시금 퇴계 이황의 영남좌도학파[강좌학파(江左學派)]와 남명 조식의 영남우도학파[강우학파(江右學派)]로 분화된다. 여기서 영남좌도학파와 영남우도학파의 차이점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영남좌도 학파가 거경궁리(居敬窮理)를 내세운다면 영남우도 학파는 주경행의(主敬行義)를 내세운다. 다 같이 경을 기반으로 하되, 전자가 이론적인 탐구를 중시한다면 후자는 실천을 중시한다. 이론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실천을 전제로 한 것이어야 하고 실제로 행동화되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대략 본다면 기호학파는 구 백제문화권에 그 기반을 두었다면, 영남학파는 신라문화권에 그 기반을 두었다고 하겠다. 영남학파를 다시 강좌학파와 강우학파로 나눌 경우, 강좌학파가 신라와 가야 통합이전의 신라문화권에 기반을 둔 반면, 강우학파는 가야문화권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대신 고구려문화권을 대표할 수 있는 학파는 부재한다. 이는 조선조의 서북인 차별로 인하여 이 지역에 성리학이 제대로 착근할 수 없었던 저간의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학파는 당파(黨派)와도 밀접한 관련성을 갖는데, 기호학파는 서인으로, 영남학파는 동인으로 나뉜다. 이후 서인은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는데, 남명 조식으로 대표되는 강좌학파는 동인 가운데서도 북인에 속한다. 다시 북인은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는데, 이 가운데 대북은 광해군 시기에 중용된다. 그리고 스스로 남명의 학통을 이었다고 자부한다. 이후 인조반정(1623)으로 광해군이 쫓겨나고 서인이 정권을 잡으면서 대북세력은 몰락하고 진주 중심의 유학도 한동안 침체기에 접어들게 된다.

[영남학파와 진주]

영남학파의 연원을 살펴보면 1489년(성종 20년)에 진주 촉석루에서 영남의 거유들이 회동하여 금란계(金蘭契)를 조직하면서 비롯된다.

김일손(金馹孫)진주목의 교수로 와 있을 때 함양군수를 지낸 스승 김종직과 당시의 함양군수 조위(曺偉), 뒷날 안음현감이 된 정여창(鄭汝昌) 등 당대의 쟁쟁한 선비들이 모여서 금란계를 조직하였다. 금란계는 마음을 같이하고 돈 같은 이로움을 버리며 뜻을 같이한다는 것으로 『주역』의 “이인동심(二人同心), 기이단금(其利斷金), 동심지언(同心之言), 기취여란(其臭如蘭)”의 구절을 따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세조 찬위를 빗댄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김일손이 사초에 실은 것이 발단이 되어 1498년(연산군 4년)에 무오사화가 빚어지고 1504년(연산군 10년)에는 갑자사화가 일어나서 사림파는 일시에 화를 당하였다. 다행히 중종반정(1506)이후 등장한 조광조에 의하여 사림파가 한때 세를 떨쳤으나, 기묘사화로 다시금 사림이 크게 위축되었다.

한편 김굉필의 문인 김안국(金安國)은 1517년(중종 12년)에 경상도관찰사로 와서 도내 향교에서는 반드시 『소학』을 가르치게 했고, 또 소학계(小學契)를 조직하도록 하여 앞서 조직했던 금란계의 맥을 잇도록 했다. 이 운동은 전국의 사림에게 큰 활력소가 되어 조선조 말기까지 이어져 왔고, 또 네 차례의 사화에도 불구하고 영남학파는 명맥을 이어 이황조식의 양현에 의해 크게 융성하였고, 이후 숙종조에 이르기까지 영남학파가 조정에 비교적 활발하게 출사하는 기반이 되어왔다. 아울러 진주는 많은 인재를 배출하는 요람지로서 해동(海東)의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퇴계는 소백산 밑에 살고 남명은 지리산 동쪽에 살았다. 이곳은 모두 영남에 속한다. 퇴계는 어짊을 숭상하고 남명은 기절을 숭상하였다. 마치 바다와 같이 넓고 산과 같이 높았다. 이에 영남은 문명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진주는 조선조 유학의 발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태동지로서의 역할을 하였던 곳이다. 좀 더 좁혀 말한다면 조선조 유학사에 있어서 그 독특한 특징과 면모를 지니는 영남좌도학파 내지 남명학파의 중심 센터이자 산실로서의 위치를 점한다고 하겠다.

[남명학파로 본 진주의 유교]

경상우도는 경상좌도와는 역사와 문화전통을 달리한다. 신라의 고토에 자리 잡은 경상우도에 비해서 경상좌도는 가야의 고토에 자리 잡았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좌도에는 벼슬한 집이 많고 우도에는 부자가 많으며 간간이 천년이나 된 마을이 있다”고 하였다. 좌도와 우도는 다 같이 유학을 숭상하였지만, 성리학의 이론적인 탐구는 좌도가 우도에 비해 앞섰다면, 성리학의 실천적인 접근에 있어서는 도리어 우도가 좌도에 비해 앞섰다고 할 수 있다. 남명 조식의 훈도를 받아서 유교에 있어서 일가를 이룬 인물로는 성주의 동강 김우옹, 한강 정구, 합천의 내암 정인홍, 고령의 송암 김면, 산청의 덕계 오건, 진양의 수우당 최영경 등을 꼽을 수 있다.

남명의 강우학풍은 경의(敬義)로 대변되는데, 남명은 그가 허리에 차고 다니던 경의검(敬義劍)에 쓰인 패검명(佩劍銘)에서“내명자경(內明者敬;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이다.), 외단자의(外斷者義;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의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경(敬)을 상징하는 물건으로서 성성자(惺惺子; 몸에 지니고 다니는 방울로서 마음을 항상 깨어있게 하여, 스스로 경계하며 수양하는 자세를 유지하게 하는 상징적 물건이다.)를, 의(義)를 상징하는 물건으로서 검을 들었다. 이 검이야말로 남명의 정신을 잘 상징하는 물건이 아닐 수 없다. 이 검에는 의 기준에 입각한 과감한 실천은 물론이고 문(文) 못지않게 무(武)를 중시해야 한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기절(氣節)을 중시하는 남명의 정신은 멀리 가야의 정신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는데, 가야의 정신은 화랑도(花郞徒)의 도의(道義) 중 특히 무도(武道)에 속하는 의의 정신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남명이 의와 기절을 숭상하고 무를 중시하는 경향으로 인하여 임진왜란 시에 그의 문하에서 많은 의병장들이 배출되어서 국난극복에 다대한 공훈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인조반정으로 말미암아 남명학파는 타격을 받기는 했으나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다시금 영조이인좌의 난(1728, 영조 4) 때 여기에 연루된 인물들 중 남명학통에 속하는 이들이 많다는 이유로 이후 영남우도 지역을 반역향(叛逆鄕)으로 간주하면서 50년간 과거를 치르지 못하게 하는 정거(停擧)에 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남명의 훈도를 입어서 형성된 이 지역선비들의 독특한 기질은 그대로 계승됨으로써 역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조선조 말기의 진주농민항쟁(1862)-진주 동학군의 대일본군 전투(1894)-진주의 의병활동(1896)-항일독립운동 등에 있어서 이 지역민들이 보여준 치열한 투쟁의 모습은 바로 남명학파가 중시한 불의를 참지 못하고 의 기준에 입각하여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의식의 발로였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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