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009
한자 身分- 地域, 性別- 同參- 獨立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조형열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밀양 지역에서 일제의 식민 지배 체제에 저항하면서 민족의 독립을 추구하기 위하여 벌인 운동.

[개설]

갑오개혁 이후 근대교육의 보급을 바탕으로 시작된 반외세 근대 국가 수립 운동은 을사조약과 한일신협약을 거치면서 항일 의병 운동과 국채보상운동, 교남교육회 참가 등 계몽운동으로 계승되었다. 이러한 경험을 배경으로 밀양 지역에서는 1910년대 비밀결사 일합사를 결성하였으며 동화학교 등을 바탕으로 신식 교육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에는 남녀노소와 모든 계층이 참가하였고, 1920년대 이후에는 밀양청년회, 밀양여자청년회, 밀양소년회, 농소소작[인]동맹, 밀양합동노동조합, 밀양형평사, 밀양협동조합 등이 결성되어 대중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27년 결성된 신간회 밀양지회는 국농소 소작쟁의, 밀양공립농잠학교 동맹휴교, 군청 이전 등 지역 현안에 적극 개입하며 민족통일전선운동을 이끌었다. 일제의 탄압으로 1930년대 중반 이후 눈에 띄는 활동을 펼치지 못하였지만,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밀양지부가 일제 패망 직후 조직되는 등 광복의 날까지 독립국가 건설을 향한 움직임이 면면히 이어졌다.

[역사적 배경]

밀양 지역은 조선시대 이래 유교 문화가 지배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갑오개혁 이후부터 개화의 움직임이 활발하였다. 1897년 손정현(孫貞鉉)이 개창학교(開昌學校)를, 1899년에는 유학자 이익구(李翊九)이익구의 아들 이병희(李炳憙)가 화산의숙(華山義塾)을 설립하였다. 또한 일제 강점 직전에는 전홍표(全鴻杓)가 애국적 교육으로 이름이 높았던 동화학교(同和學校)를 세웠다. 개창학교는 1908년 밀양공립보통학교로 변경되었고, 화산의숙은 일제의 사학(私學)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1921년 사립 정진학교(正進學校)로 재건되었다. 대한제국기의 근대 교육기관 설립은 독립운동가의 육성과 민족의식 고취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낙동강 연안에 위치한 밀양 지역은 일본인들에 의한 경제 침탈이 비교적 빠른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개항장 부산의 배후지 농촌 지대라는 점이 영향을 미쳐 강점 이전부터 마쓰시타 데이지로[松下定次郞], 유아사 혼페이[湯淺凡平] 등이 일본인 이주 농촌을 조성하며 대토지 소유자로 발돋움하였고, 밀양이 경부선 철도의 정착역이 된 것도 경제 침탈 가속화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렇듯 밀양 지역이 일본 제국의 정치적·경제적 이익과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되자, 일제는 일본군과 일본 헌병대를 주둔시켰다. 1896년에 헌병대지부가, 1899년에는 밀양헌병분견소가 설치되었다. 이는 1910년 이후 헌병분견소와 산하 헌병주재소로 분화되었다.

고양된 민족의식과 일제의 침투는 밀양인들의 국권회복운동을 촉진하였다. 먼저 항일 의병운동을 살펴보면, 1907년에서 1909년 사이에 밀양 지역에서 항일 의병 운동이 일어난 횟수는 일본군의 기록에 따르면 4회이다. 당시 항일 의병 운동 특성상 밀양 지역만을 기반으로 하였을 가능성은 없고 양산(梁山) 출신 서병희(徐炳熙) 의병진이 각 지역을 옮겨 다니며 투쟁을 벌일 때 밀양인들도 투쟁에 동조하여 싸웠을 것으로 판단된다. 밀양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수비대 및 헌병분견대와 직접적인 투쟁을 벌였다는 점에서 일제강점기 반일 독립운동의 선구가 되었다.

또한 국채보상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1907년 5월 유림들의 모임과 밀양 장날 대중 선전을 통하여 시작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한 사람들은 주로 안씨(安氏), 이씨(李氏), 손씨(孫氏) 3개 성씨 문중에 속하였다. 그러므로 전통적 사족층이 주축이 되고 여기에 지역 내 여러 면 사람들과 표충사(表忠寺)의 승려들까지 광범위하게 참가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모금 운동이 가능하였던 데에는 영남 지역 인사들이 1908년 조직한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에 밀양 지역 인사들이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있던 것이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밀양 지역에서는 항일 의병운동을 한 축으로 삼고, 국채보상운동과 지역 학회 활동을 기반으로 한 근대지식의 전파를 한 축으로 삼아 일제에 항거하는 세력을 형성하여 나갔다.

[경과]

1910년 일제 강점 이후 밀양인들은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1910년대는 일제의 무단통치로 인하여 비밀결사 형태의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던 시기로, 밀양인들 가운데에도 전국적 조직인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回復團),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 등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있었다. 한편 밀양에서 조직된 비밀결사도 있었다. 1915년을 전후한 시기에 ‘조국 독립을 위하여 청춘의 일편단심을 합한다’는 의미로 이름을 붙여 만든 일합사(一合社)는 황상규(黃尙奎)·윤세주(尹世胄)를 비롯한 밀양의 청년 지식인 사이에 끈끈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데 일조하였다. 또한 동화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연무단(練武團)도 김원봉(金元鳳)·윤세주가 중심인물로 활동한 비밀결사였다. 특히 일합사와 연무단은 국외의 무장 독립투쟁 노선과 흐름을 같이 하였는데, 밀양 내에서는 대중봉기운동으로서 3·1운동의, 밀양 밖에서는 적극 항일운동으로서 의열단(義烈團) 창설의 배경이 되었다.

1919년 밀양에서 일어난 3·1운동은 안으로는 조직된 비밀결사의 힘을 바탕으로, 바깥으로는 전국적으로 퍼진 독립 열기에 힘입어 맹렬한 투쟁 기록을 남겼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공개된 데이터베이스 기록에 따르면, 3월 13일 밀양면 내 밀양 장날 시위를 시작으로, 4월 10일 청도면 인산리 시위까지 모두 7회에 걸쳐 연인원 5,000여 명이 참여하였다. 이 가운데 주목할 만한 시위는 최초의 행동이었던 밀양 장날 시위와 가장 격렬한 투쟁이 벌어진 4월 4일 단장면 태룡리 시위이다. 전자는 서울의 만세 시위에 참가하고 돌아온 윤세주윤치형(尹致衡)동화학교 교장이었던 전홍표의 지도를 받아 밀양공립보통학교 졸업생, 밀양교회 기독교인들과 함께 준비한 것이었다. 미리 제작한 태극기를 펼치자 군중이 결집하여 대열을 이루었고, 부산에서 급파된 헌병과 수비대가 현지 헌병·경찰과 합세하여 총검으로 탄압하면서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후자는 표충사 승려들이 양산 통도사(通度寺) 승려들과 사전 모의하여 준비한 것으로,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세우고 만세를 고창하였다. 시위대가 헌병주재소로 몰려들자 헌병분견소에서 헌병이 급파되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함으로써 결국 군중이 흩어졌다. 남녀노소 각계각층이 참가한 3·1운동은 두 달 동안의 외침에 그쳤지만, 조선총독부 통치 정책의 변화를 이끌고 밀양인들에게 대중행동의 중요성을 일깨운 큰 사건이었다.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 검사처분인원표 기록에 따르면 보안법(保安法) 위반과 관련된 자가 461명이었고 이 가운데 19명이 징역형을 받았을 만큼 일제의 탄압도 물론 가혹하였다.

3·1운동의 경험 위에서 1920년대 이후에는 다양한 이념과 계층을 대변하는 단체들이 등장하였다. 우선 1920년대 밀양 지역 활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지역 유지 청년들의 단체인 밀양청년회였다. 1920년 창립된 밀양청년회는 각종 야학 운영과 운동대회, 전염병 방역사업 등을 추진하면서 주민 계몽에 앞장섰다. 밀양청년회의 활동은 주로 민족주의 이념에 기초한 것으로, 1923년에는 전국적으로 금주단연·토산장려의 구호를 내건 물산장려운동의 주축 단체가 되었다. 한편 밀양 지역의 청년운동은 사회주의운동의 영향을 받아 1925년 밀양청년연맹이 별도로 조직되는 등 변화를 보이다가 1928년 밀양청년회가 밀양청년동맹으로 개편되면서 사회문제에 대한 참여 폭이 더욱 넓어졌다.

1920년에 설립된 밀양여자청년회는 여성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여자야학교를 설립하고 강연회를 개최하였고, 기독계 교인들이 주력이 되었다. 밀양여자청년회는 1928년 근우회 밀양지회를 조직하며 활동의 무대를 옮겼다. 근우회 밀양지회는 1931년까지 봉건적 인습 타파, 색의(色衣) 착용 등 여성 인권 및 환경 개선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1920년대 전반기부터 모습을 보였던 소년운동은 1927년 밀양소년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밀양소년회는 밀양청년회 산하 단체로서 출범하였으나 1928년에는 독자적 단체로 발돋움하였고, 사회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아 이론 선전과 학습에 노력을 기울여 청년·노동·농민운동 활동가를 배출하는 창구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밀양 지역의 대표적인 농민운동은 1927년 발생한 국농소(國農沼) 소작쟁의였다. 국농소 소작쟁의 사건은 소작료 미납자가 많아지는 것을 이유로 지주와 사음(舍音)이 소작권을 이동하자 신구 소작인 사이에, 그리고 지주·사음 측과 소작인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어 일어났다. 이러한 과정에서 농소소작[인]동맹이 조직되었고, 여러 차례 소작인대회가 열리는 등 투쟁을 이어갔고, 조선노농총동맹이 개입한 뒤 인근 지역 농민조합 등과 협조 체제를 구축한 다음 은산농민조합(銀山農民組合)을 조직하여 지주·사음 측을 압박하였다. 약 2년 여에 걸친 분쟁을 거치면서 은산농민조합이 소작인의 경작권을 확보하기에 이르렀으나, 1930년대 이후 농민운동이 침체하게 되면서 소작인의 생활은 더욱 위태로워졌다.

밀양의 산업은 전통적으로 농업이 중심이었기 때문에 노동운동은 그리 활발하지 못하였다. 1927년 양화(洋靴) 직공의 동맹파업이, 1928년 밀양자동차주식회사 노동자의 동맹파업이 일어났다. 1931년에는 밀양 내의 모든 노동 관련 조직을 하나로 묶는 밀양합동노동조합이 조직되었다.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과 함께 당시 유행하던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의 영향으로 급진적 투쟁을 계획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눈에 띄는 활동을 벌이지 못한 채 1933년 무렵, 일제의 검거로 탄압을 받았다.

밀양형평사와 밀양협동조합도 이 시기 활동하였던 대중운동 단체였다. 밀양형평사는 백정에 대한 차별적 대우를 극복하기 위한 신분해방운동이자 일제에 항거하기 위한 반일 운동으로 1924년 형평사 밀양지회로 출범하였다. 1928년 창립된 밀양협동조합은 1인 1구, 1구 1원의 원칙에 따라 조합비를 걷고, 현금시가주의에 의해 물건을 사고 팔며 그 수익을 배당하는 방식으로 운영하였다. 구성원들의 민주적 참여와 균등 분배를 선명하게 내세웠으며 1931년까지 활동이 전개되었다.

이처럼 대중운동이 활발했던 1920년대에 가장 폭넓은 활동력을 보여 준 것은 다름 아닌 신간회 밀양지회였다. 1927년 결성된 신간회 밀양지회는 전국적으로 공동 추진한 각종 활동 외에도 밀양 지역에서 농민운동·노동운동에 연대하였고, 밀양공립농잠학교 학생들이 부당한 일제 식민교육에 항의하며 동맹휴교를 벌일 때 학부모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는가 하면, 군청 이전 등 지역 현안에 적극 개입하였다. 또한 밀양에서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밀양읍주지(密陽邑州誌)’를 발행하려고 하자 반봉건운동의 차원에서 이에 반대하는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특히 신간회 밀양지회황상규, 윤세주, 윤치형의열단 관계자들이 참가하는가 하면 지역 대중운동가들이 망라되었다는 점에서 적극성에서도, 통합성에서도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신간회가 전국적 차원에서 1929년 광주학생운동과 민중대회 사건을 거치면서 침체되었던 것처럼, 신간회 밀양지회 역시 1930년을 전후하여 그 내부에서 민족통일전선 조직으로서 활동을 계속할 것인지 1929년 세계대공황 이후 더욱 급진적으로 노동자·농민 중심의 투쟁을 전개할 것인지를 놓고 대립하게 되었으며, 결국 신간회 해소를 반대하는 입장을 채택하긴 하였으나 밀양지회만이 존속될 수는 없었다.

이처럼 밀양 지역의 독립운동은 1910년대에는 근대 학교를 통한 민족교육과 비밀결사 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되다가, 1919년 3·1운동을 거치면서 기독교·불교·유교 등 각계각층 남녀노소 등이 참가한 대중투쟁으로 성장한 다음, 1920년대 백가쟁명의 시대라고 불릴 만큼 활발한 대중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1930년대 전반기 급진적 사회운동이 유행하면서 지역 내 운동에 일부 분화가 거세지고 일제가 전쟁 수행을 목적으로 전국적인 통제 정책을 강화하게 되면서 점점 위축되기에 이르렀다. 1930년대 후반 이후에는 단발적인 소작쟁의 등이 이어졌으나 공개적이고 통합적인 단체 결성 등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의의와 평가]

밀양 지역 독립운동은 1900년대 초부터 1945년까지 항일 의병 운동, 애국계몽운동, 비밀결사 운동, 3·1운동, 대중운동 등 다양한 형태로 지속되었다. 특히 3·1운동을 통하여 밀양 지역 주민이 민족공동체의 일원임을 자각하고, 신간회 밀양지회 활동을 하면서 민족통일전선운동을 발전시킨 것은 다른 어떤 지역의 독립운동과 비교해 보아도 선명한 족적이다. 국외에서 의열단과 민족혁명당,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의 주축이 되었던 밀양인들은, 1930년대 중반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눈에 띄는 활동을 펼치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광복의 날까지 독립국가 건설을 향한 움직임을 면면히 이어 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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