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7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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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靑年運動 |
영어공식명칭 | Youth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하유식 |
[정의]
일제강점기 밀양 지역 청년 단체들이 벌인 민족운동.
[개설]
1925년 11월 23일 밀양군 내 6개 단체가 참여한 청년 단체 연합회인 밀양청년연맹이 결성되었다. 밀양청년연맹은 1927년 4월 이후 발생한 국농소 소작쟁의에 밀양청년연맹 집행위원인 정광호를 매개로 관여하였으나, 소작인 사이의 분쟁으로 복잡하게 전개된 쟁의를 제대로 지도하지 못하는 한계를 노출하였다.
1928년 7월 계급, 계층, 성별을 뛰어 넘는 단일 청년동맹으로서, 회원 연령을 18~27세로 한 밀양청년동맹이 결성되었다. 1930년 9월 현재 5개 이상의 지부 조직을 갖추었으며, 순회 문고와 순회 강연회를 개최하고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한 과자 행상대도 운영하였다. 소년운동을 강화하기 위하여 소년지도부를 신설하고 무산아동 교육기관 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문자보급반도 각지에 파견하였다. 이후 1931년 5월 조선청년총동맹이 사실상 해체된 후 밀양청년동맹은 1920년대 후반 소년운동을 통하여 성장한 새 세대 청년들이 해소론을 제기함으로써 해체되었다.
3·1운동 이후 문화운동이 지식인 사회에 급속히 확산되면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청년단체들은 1930년대 초까지 지속적인 사회·문화 개혁 운동을 통하여 식민지 조선의 변화를 추구하였다. 일제강점기 밀양 지역의 청년운동은 노동운동, 농민운동과 같은 사회운동에 인적·물적 자원을 공급하는 배수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연혁]
밀양 지역 청년운동은 1920년 봄 김병환(金鉼煥)을 부장으로 한 밀양구락부가 결성되면서 시작되었다. 밀양구락부는 1920년 8월 명칭을 밀양청년회로 변경하였다. 회장은 이성희, 부회장 이필우, 덕육부장 김성준 등이었고, 회원은 200여 명이었다.
밀양기독청년회, 표충사청년회 등의 종교 청년단체와 하남, 삼랑진, 낙동 등 각 지역 청년회가 결성되었다.
밀양의 청년 여성들은 1920년 2월에 회장 고원섭, 부회장 윤치정, 총무 김성애, 간사 박병희 외 10인을 중심으로 밀양여자청년회를 결성하고 여자야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1923년 2월 현재 밀양의 5개 청년단체가 조선청년회연합회에 가입되어 있었다.
[조직]
청년회 조직은 회장, 서무부, 회계부, 교육부, 체육부, 덕육부 등으로 구성되었다. 초기 밀양 청년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은 이성희, 박장억, 이영집, 한춘옥, 안삼득 등의 지방 재력가, 김래봉, 설인길, 박상오 등의 3·1운동 참가자와 최수봉, 김병환 등 의열단 관련자, 그리고 이후 정광호, 표문호, 권중희, 김희지 등 밀양청년동맹과 신간회 지회에 참여한 인물 등 세 부류로 나누어진다.
[활동사항]
밀양청년회 중심의 청년단체들은 군민 계몽과 지식 계발, 교육과 산업 진흥, 친목 도모 등을 목적으로 토론회, 강연회, 연예회(演藝會), 음악 강습회, 농상민대운동회(農商民大運動會), 청년연합대운동회 등을 개최하고, 청년들의 교육을 위하여 상업야학회와 노동야학을 개설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밀양청년회와 밀양여자청년회는 밀양장업회, 서문내장로교회 등의 단체와 연합하여 소비 절약과 토산 장려를 위한 선전 활동도 전개하였다. 1921년 5월 7개 청년단체 600여 명이 모여 청년연합회 운동회를 개최하는 등 춘계, 추계 운동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였다. 1922년 7월 밀양청년회 역전지회, 교풍청년회 등의 발기로 수해 구제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