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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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淳昌三印臺-節義文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해준 |
소재지 | 순창 삼인대 비 -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 산2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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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순창 삼인대(三印臺)의 단경 왕후 신씨(端敬王后愼氏) 복위 상소는 1510년(중종 5) 담양 부사 박상(朴祥)[1474~1530], 순창 군수 김정(金淨)[1486~1521], 무안 현감 유옥(柳沃)[1485~1519]이 올린 것으로 조선 전기의 절의(節義) 정신과 사림 정신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건으로 지칭된다.
[신비 복위 소의 내용과 성격]
「신비 복위 소(愼妃復位疏)」란 중종의 원비(元妃)였던 신씨가 반정 후 폐출되자 그 복위를 청하던 상소를 말한다. 신씨는 중종이 진성 대군(晋城大君) 시절의 부인이었으므로 반정 직후 왕비로 책봉되어 예우를 받았다. 그런데 신씨는 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신수근(愼守勤)의 딸이라는 이유로 반정 공신 박원종(朴元宗), 유순정(柳順汀), 성희안(成希顔) 등에 의하여 폐출되었다. 이 「신비 복위 소」는 반정 공신인 훈구 세력이 군왕을 핍박하여 신씨를 폐출한 부당함과, 반정의 대의까지 굴절시킨 전횡을 통렬하게 논박한 것이었다.
내용상으로 「신비 복위 소」는 신비의 복위가 근본 사단이지만, 그것만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훈구 공신 계열의 정치 세력을 몰아내려는 사림들의 본격적인 정치 운동의 성격이 강하였다. 그리고 중앙 정계에서 사림파의 주장과 목소리가 높아지는 계기를 만들었다. 결국 이 상소로 박상과 김정이 파직되고 유배형까지 당하였으나, 이 상소는 사림 전체의 공의(公議)[여론]를 대변한 것이면서 조선 전기 사림파의 결속력 확보와 정치 참여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사건은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평가된다.
박상·김정 등의 「신비 복위 소」는 당시에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단종 복위와 관련하여 1698년(속종 24) 9월 올린 상소에서 신규(申奎)는 폐비 신씨 문제에 대한 박상 등의 상소가 지닌 역사적 가치를 재평가하였다. 물론 이때에도 신씨 복위가 이루어지지는 않았고, 다만 우대의 조처가 있어야 한다는 숙종의 명에 따라 이듬해인 1699년에 별묘(別廟)를 세워 제사를 지냈다. 그러다 마침내 삼인대 상소 이후 220여 년 만인 1739년(영조 15)에 이르러서 신씨 복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1739년 8월에는 영조가 단경 왕후 신씨의 능인 온릉(溫陵)[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산19번지]에 친히 행차하기에 이르렀다. 후일 영조는 「신비 복위 소」에 대하여 “세상에는 이와 같이 곧은 말을 하는 이가 없도다”라고 칭탄(稱歎)하였고, 정조도 사제문을 직접 찬술하면서 “삼인(三印)이 걸렸던 그 석대는 만고에 닳지 않으리라”라고 하였다. 한편 신씨가 단경 왕후로 복위되자 5년 뒤인 1744년(영조 20) 순창에서는 삼인대의 삼현(三賢)을 기리는 사우를 건립하려 하였지만, 마침 국가의 금령(禁令)으로 사우의 신설은 이루지 못하고 그 유서가 깃든 순창 삼인대 비(淳昌三印臺碑)를 세우게 되었다.
[삼인대의 절의를 비로 새기다]
순창 삼인대 비는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에 있는 유적으로 1744년에 건립되었으며 현재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비석은 1739년에 신씨가 단경 왕후로 복위된 뒤 5년 되는 해에 유서가 깃든 순창 강천사(剛泉寺)에 삼인대 사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졌다.
도암(陶庵) 이재(李縡)[1680~1746]가 찬(撰)한 비의 서두에는 삼인대에 대하여 “강천사 남쪽에 이른바 삼인대가 있으니 높이가 수십 길이나 되고 아래로 굽어보면 깊은 연못이 있으며, 그 위에는 몇 그루의 소나무가 바위틈에 서 있는데 몇 백 년이나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삼인이란 무엇인가? 옛날에 순창 군수였던 충암(冲庵) 김정 선생과 담양 부사였던 눌재(訥齋) 박상 선생, 그리고 무안 현감이던 석헌(石軒) 유옥 선생이 이곳에 모여서 신씨 복위 상소를 의논하였다. 삼현은 각자 관인을 나무에 걸고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할 것을 결의하였으므로 삼인대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라고 적고, 이어 삼인의 기절을 “강천(剛泉)의 맑은 물은 동쪽으로 우렁차게 흘러가고/ 온릉의 울창한 나무는 북쪽을 바라보며 푸르고 푸르네/ 비석은 닳아 없어질 수 있겠으나 선생들의 이름은 끝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읊어 후세에 전하고 있다.
『정조 실록(正祖實錄)』에는 삼인대와 관련하여 “남쪽의 선비들이 그 지조를 가슴에 새기면서 그 언덕을 ‘학사대(學士臺)’라 이름 지었는데, 지금도 그 언덕을 가리키며 찬탄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1799년 6월 11일].
순창의 삼인대 유적에는 정면과 측면에 각 1칸의 삼인대 비각이 있고, 비각 안에 높이 157㎝, 너비 80㎝, 두께 23㎝의 삼인대 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는 1744년 4월에 세운 것으로 홍여통(洪汝通)·윤행겸(尹行謙)·유춘항(柳春恒) 등 순창군의 선비들이 발의하여 이재가 비문을 짓고, 민우수(閔遇洙)[1694~1756]가 비문의 글씨를 썼으며, 유척기(兪拓基)[1691~1767]가 전서(篆書)를 써서 세운 것이다.
삼인대 비각은 1963년, 1977년, 1987년, 1991년에 보수 단청을 하고 주변에 철책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1978년에는 삼인대 비의 내용을 한글로 번역, 음각하여 비각 옆에 세워 놓았고, 1994년 삼인 문화 선양회가 결성되어 1995년부터 매년 삼인 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삼인대 절의 정신과 순창 사림]
삼인대의 상소 이후 순창 사림들의 절의 정신은 계속 이어졌다. 예컨대 1607년(선조 40)에는 신말주(申末舟)와 김정(金淨), 김인후(金麟厚), 고경명(高敬命), 김천일(金千鎰) 등 5현을 제향하는 화산 서원(花山書院)을 건립하였고, 1694년(숙종 20)에는 전라도 진사 조명근 등이 화산 서원의 사액을 청하기도 하였으나 마침 조정의 사액 금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앞에 소개한 것처럼 정조 실록에 삼인대 언덕을 ‘학사대’라 이름하였고 지금도 그 언덕을 가리키며 찬탄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 것이나, 1859년(철종 10) 10월의 실록 기사 중에 유옥에 대한 포장을 상신(上申)하면서 “삼인이 걸렸던 그 석대 만고에 닳지 않으리라” 했고, 일찍이 화산 서원에 삼현을 아울러 배향하여 조정에서 차등 없이 하였다는 기록이 보여, 삼인대 비와 함께 화산 서원에 삼현의 위패가 봉안된 적도 있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