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9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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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祥 |
이칭/별칭 | 창세(昌世),눌재(訥齋),문간(文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정훈 |
출생 시기/일시 | 1474년 - 박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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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01년 - 박상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05년 - 박상 전라도 도사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11년 - 박상 담양 부사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17년 - 박상 순천 부사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21년 - 박상 상주 목사, 충주 목사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26년 - 박상 문과 장원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29년 - 박상 귀향 |
몰년 시기/일시 | 1530년 - 박상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688년 - 박상 이조 판서에 추증 |
출생지 | 박상 출생지 -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
유배|이배지 | 박상 유배지 - 오림역 |
묘소|단소 | 박상 묘소 - 광주광역시 봉황산 |
사당|배향지 | 월봉 서원 -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곡길 133[광산동 452] |
성격 | 문관|유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충주(忠州) |
대표 관직|경력 | 나주 목사 |
[정의]
조선 전기 순창 삼인대에서 폐비 신씨 복위 논의에 참가하였던 문관이자 유학자.
[가계]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 고조할아버지는 고려 시대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를 지낸 박세량(朴世梁), 증조할아버지는 민부 낭중(民部郎中) 증(贈) 사복시 정(司僕寺正)을 지낸 박광리(朴光理), 할아버지는 조선 시대에 들어 의천군사(宜川郡事) 증(贈)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추증된 박소(朴蘇)이다. 아버지 박지흥(朴智興)은 진사(進士) 증(贈)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고, 어머니는 생원(生員) 서종하(徐宗夏)의 딸 적성 서씨(積城徐氏)이다. 처는 유종한(柳宗漢)의 딸이다.
[활동 사항]
박상(朴祥)[1474~1530]의 아버지 박소는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출사를 포기하고 처가인 서창[지금의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으로 내려왔다. 이에 박상은 1474년(성종 5) 5월 서창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아버지를 잃고 큰아버지에게 글을 배웠는데, 경전과 역사서에 널리 통달하였다. 1496년(연산군 2) 진사가 되었고, 1501년(연산 7)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후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 승문원 교검(承文院校檢),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 병조 좌랑을 지냈다. 1505년(연산 11) 외직(外職)으로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를 지냈다.
1506년(중종 1)에 사간원 헌납을 지내며 외척 중에 갑자기 고관이 된 자가 있어 이에 대하여 고변을 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투옥되었다. 그러나 성균관 유생과 재상들의 상소로 풀려났다. 사간원에 있는 1년 동안 탄핵하는 논의를 할 때마다 적극 나서서 의견을 피력하자 관원들이 미워하여 외직인 한산 군수(韓山郡守)로 내보냈다. 이에 사헌부에서 대간(臺諫)은 마음대로 외관(外官)에 의망(擬望)[공정한 인사 행정을 위하여 세 사람의 후보자를 임금에게 추천하던 일]할 수 없다고 말하고 그날로 탄핵하는 논의를 일으키니, 전조(銓曹)에서 종묘서 영(宗廟署令)으로 고쳐 제수하였다. 이에 어버이가 늙었다 하여 외직으로 나가기를 청하여 군산의 임피 현령(臨陂縣令)으로 나갔다. 3년 만기가 되자 사직하고 광산[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으로 돌아갔다. 부모 공양을 이유로 1511년(중종 6)에 외지인 담양 부사로 부임하였다.
1515년(중종 10)에 순창 군수 김정(金淨), 무안 현감 유옥(柳沃)과 함께 상소하여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단경 왕후 신씨(端敬王后愼氏)의 복위를 주장하였다. 세 사람이 함께 벼슬에서 쫓겨날 것과 죽음을 각오하고 상소를 올리기로 약조하고 관인을 나뭇가지에 걸었던 곳이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에 있는 순창 삼인대(三印臺)이다. 박상은 단경 왕후를 폐비시킨 박원종 등의 죄를 바로잡기를 청하여 중종의 노여움을 사 오림역(烏林驛)으로 유배되었다. 1517년(중종 12)에 순천 부사가 되었으나 그해 겨울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하였다. 그 후 1521년 상주 목사, 충주 목사를 지내고 사도시 부정(司導寺副正)이 되었다. 1526년(중종 21) 문과 중시에 장원하여 통정대부의 품계에 올랐다. 이듬해 나주 목사로 좌천되었고, 1529년(중종 24)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530년(중종 25) 봄에 병이 심해져서 4월 11일 향년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저서에는 『눌재집(訥齋集)』이 있다.
[묘소]
광주(光州) 방하동(芳荷洞) 봉황산(鳳凰山) 성재곡(成才谷) 묘좌(卯坐)[동쪽 방향]인 언덕에 장사하였다.
[상훈과 추모]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 월봉 서원(月峰書院)에 제향되었으며, 1688년(숙종 14)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