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8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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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蔚山金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성용 |
세거|집성지 | 울산 김씨 세거지 -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하리 |쌍치면 둔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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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시조 | 김덕지(金德摯) |
입향시조 | 김시서(金時瑞) |
[정의]
김덕지를 시조로 하고 김시서를 입향조로 하는 전라북도 순창군 세거 성씨.
[개설]
울산 김씨(蔚山金氏)는 김덕지(金德摯)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울산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순창 지역 울산 김씨는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5세손인 자연당(自然堂) 김시서(金時瑞)가 선조인 김인후의 유허를 기리고자 순창으로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된다. 김시서의 첫째 아들 김준현(金俊賢)이 복흥면 하리 사창(社倉) 마을로 들어가 정착하였고, 둘째 아들 김세현(金世賢)은 쌍치면 둔전리에 들어가 정착한 후 그 후손이 세거하고 있다. 2000년 통계청의 인구 조사 자료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1만 1270가구, 3만 6225명이 거주하고 있다.
[연원]
울산은 경상남도 동해안에 위치한 지명이다. 울산 김씨의 시조 김덕지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둘째 아들이다. 935년(경순왕 9) 10월 경순왕이 고려 태조(太祖)에게 신라의 천 년 사직을 양위하려 하자 형인 마의 태자와 함께 이를 극력 만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의 태자를 따라 개골산(皆骨山)[금강산의 겨울 이름]으로 들어갔다고도 하며, 또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고도 하나 이후 김덕지의 행방은 자세하지 않다. 김덕지의 14세손인 김환(金環)이 고려 때 벼슬이 삼중대광 영도 첨의사(三重大匡領都僉議事)에 이르고 학성군(鶴城君)[학성은 울산의 예 이름]에 봉하여짐으로써 후손들이 김환을 중시조로 하고 본관을 울산으로 하게 되었다.
조선 시대에 문과 12명을 비롯하여 무과 1명, 사마시 44명 등 모두 57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주요 인물로 호남의 명문 거유인 김인후, 초대 대법원장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 제2대 부통령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등이 있다.
[입향 경위]
울산 김씨는 호남의 명족으로서 김인후의 후예이다. 김인후는 인종(仁宗)·명종(明宗) 조의 성리학자로 우리나라 18현의 하나로 문묘에 배향된 인물이다. 말년에 순창의 쌍치면 둔전리 점암(鮎岩)에 은거하면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김인후의 5세손인 김시서가 선조의 유허를 찾아와 학문을 기리는 데서 울산 김씨가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김시서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서 학행으로 천거를 받아 경양도 찰방[경양도는 조선 시대 전라도 광주의 경양역(景陽驛)을 중심으로 한 역도(驛道), 찰방은 역참을 관리하던 종6품의 외관직]을 지냈다. 죽은 뒤 순창의 어암 서원(魚巖書院)과 화산 서원(花山書院)에 제향되었다.
김시서는 김준현과 김세현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 김준현은 복흥면 하리 사창 마을로 들어가 정착하였고, 김세현은 쌍치면 둔전리에 터를 잡아 정착하였다. 따라서 하리 사창 마을과 둔전리는 김시서의 자손이 세거하고 있는 집성촌이다. 이후 사창 마을에 살던 김시서의 8세손인 김학수(金鶴洙)가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그의 아들 김상희(金相熙)는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을 지냈다. 김상희의 아들이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김병로이다. 또 김시서의 9세 사손인 김상기(金相璣)는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애국지사이기도 하다.
[현황]
2000년 순창 지역 울산 김씨는 65가구, 14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930년 국세 조사에서 복흥면 하리 사창 마을에 35가구, 쌍치면 둔전리 둔전 마을에 38가구가 집성촌을 이루어 세거하고 있었으나, 1989년 순창군에서 실시한 인구 통계 자료에 의하면 사창 마을에 4가구, 둔전 마을에 4가구가 남아 있을 뿐이다. 아마도 산업 사회의 발달과 교육과 취업을 위해 도시나 다른 지역으로 이거한 것으로 보인다.
[관련 유적]
복흥면 상송리 산4번지에 낙덕정(樂德亭)이 있다. 낙덕정은 1900년(고종 37) 상송리에 거주하던 김노수가 선조 김인후의 학덕을 기리고자 세운 팔모 단층의 팔모지붕에 한 칸 방으로 된 정자다. 김병로가 어린 시절 낙덕정에서 공부하며 한때를 보냈다고 한다. 1975년 2월 5일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72호로 지정됐으며, 울산 김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쌍치면 둔전리 산6번지에는 영광정(迎狂亭)이 있다. 영광정은 1910년 한일 합방[경술국치]이 되자 울산 김씨 금옹 김원중이 뜻을 같이 하는 동지 8명[김원중, 이항로, 김정중, 설문호, 이봉운, 안종수, 송국빈, 김요명]과 일본에 반대하는 사상을 널리 알리고자 지은 정자이다. 1990년 6월 30일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134호로 지정되었다.
쌍치면 둔전2길 83에 훈몽재 유지(訓蒙齋遺址)가 있다. 훈몽재는 1548년(명종 3) 김인후가 아내의 고향인 순창의 점암촌에 이거하고, 초당을 세워 ‘훈몽’이라는 편액을 걸고 강학했던 곳이다. 2012년 11월 2일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었다. 둔전리에는 어암 서원 유허비(魚巖書院遺墟碑)도 있다. 어암 서원은 1827년(순조 27) 지방 유림의 공의로 김인후·이이(李珥)·정철(鄭澈)·김시서(金時瑞)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김인후가 강학하던 훈몽재(訓蒙齋) 곁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던 서원이었으나 1871년(고종 8)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