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9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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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瑜 |
이칭/별칭 | 유옥(兪玉),옥천(玉川),건곡(虔谷)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최범호 |
[정의]
고려 후기 순창 출신의 충신.
[가계]
본관은 옥천(玉川). 자는 유옥(兪玉), 호는 옥천(玉川)·건곡(虔谷). 아버지는 옥천 부원군 조원길(趙元吉)이다.
[활동 사항]
조유(趙瑜)[1346~1428]는 1346년(충목왕 2) 순창에서 출생하였으며, 진사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중현대부(中顯大夫) 전농시 부정(典農寺 副正)에 이르렀다. 고려 말에 정치가 날로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고 더 이상 벼슬할 생각이 없었다.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 왕조에 대한 절의(節義)를 지키려 두문동(杜門洞)[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것에 반대한 고려 유신이 모여 살던 곳으로,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 기슭]으로 들어가 ‘두문동 72현(賢)’ 중 한 명이 되었다. 이후 순창으로 낙향하였다.
당시 고려의 풍속이 부모의 상(喪)을 당하면 모두 백 일 만에 탈상(脫喪)을 하였으나, 조유는 천성이 효성스러워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더불어 삼년상을 치르니 당시 사람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아버지와 어머니 상을 당하여서 몸소 흙을 져다가 봉분(封墳)을 짓고 도합 6년 동안 시묘(侍墓) 살이를 한 사실이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대동야승(大東野乘)』 등의 문헌에 전한다. 만년에 순창에서 순천(順天) 부유현(富有縣) 겸천(謙川)으로 옮겼다. 1428년(세종 10)에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부조현언지록(不朝峴言志錄)』에 ‘수양산의 달빛이 내 마음을 비추네[首陽山月 照我心肝]’라는 시구(詩句)가 전한다.
[묘소]
묘는 전라남도 순천시 주암면 주암리 주암동(住巖洞) 을좌(乙坐)에 있는데, 진선(進善) 김원행(金元行)이 비문을 짓고, 교리 조영순(趙榮順)이 글씨를 썼다. 또 좨주(祭酒) 송병선(宋秉璿)이 묘갈명(墓碣銘)을 짓고,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사용하였으며, 전자(篆字)는 응교(應敎) 정희(鄭憘)가 썼다.
[상훈과 추모]
1428년 조정에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세종이 사신을 보내 일품 관리의 예로 장사 지내게 하고 묘소를 지키는 집 3호(戶)를 내렸다. 그리고 ‘효자 전부정 조유의 정려[孝子前副正趙瑜之閭]’라는 정려(旌閭)를 내리고, 어제시(御製詩)를 내리니 지금까지도 집안에 전하여 오고 있다. 정려는 본래 순창 건곡(乾谷)에 있었는데, 1661년(현종 2)에 부유현(富有縣), 지금의 순천시 주암면 죽림리 겸천(謙川) 위로 옮겨 세웠다. 대제학(大提學) 남유용(南有容)이 기문(記文)과 비문을 짓고 승지(承旨) 이의철(李宜喆)이 글을 썼다. 1720년(숙종 46)에 고을의 선비들이 겸천사(謙川祠)를 지어 배향하였으며, 1868년(고종 5)에 서원이 철폐된 이후에는 단(壇)을 설치하여 제사를 모시다가 1895년에 중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