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5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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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麗時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나하나 |
[정의]
고려 시대 전라북도 순창군의 역사.
[행정 조직]
『고려사(高麗史)』 지리지에 따르면 940년(태조 23)에 처음 주·부·군·현의 이름을 고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러나 이때 개편된 주·부·군·현은 모두 16개소인데, 이들 대부분은 신라의 고도이거나 9주 5소경 지역이었다. 당시는 통일 전쟁이 종식된 지 5년 후로 격동하는 사회의 안정과 확대된 영역, 늘어난 인민을 통치하기 위한 정치·행정·교통 중심의 최소한의 개편이 있었다.
그러다가 성종[재위 981~997] 대에 이르러서 주·부·군·현과 관(關)·역·강(江)·포(浦) 등 전국의 각 지명을 고쳤다. 이것이 바로 757년(경덕왕 16)에 고친 것을 그대로 채용하거나 새로 정하여 더 중국식인 한자 이름으로 바꾼 것으로 지명에서 백제나 신라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분위기를 일신함으로써 통치권의 강화를 꾀한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의 순창군에서도 도실군[순화군]이 순주(淳州)로 개칭 승격되었고 역평현(礫平縣)이 적성현으로 개칭되었다.
성종 연간에는 지명을 고쳤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지방관의 파견이 이루어지는데, 938년(성종 2) 처음 12주에 목(牧)이 설치되고 995년(성종 14) 10도제가 시행되어 2경유수(二京留守) 5도호부사(五都護府使) 12군절도사(十二軍節度使) 및 방어사(防禦使)·관찰사(觀察使)·도단련사(都團練使)·단련사(團練使)·자사(刺史) 등의 수령이 많은 고을에 배치되었다. 10도의 관할 지역은 580여 곳이었다. 당시 순주는 전주[순의군 절도사(順義軍節度使)], 영주[고부(古阜)], 마주(馬州)[옥구] 등과 함께 10도 중 하나인 강남도(江南道)를 구성하였다. 다만 당시 어떤 직책이 순주에 배치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005년(목종 8) 10도제가 폐지되고, 수령의 수도 감축되어 2경과 양계(兩界) 4도호부, 12주만이 남게 되었다. 1012년(현종 3) 다시 개편되어 12주[절도사]가 폐지되고, 그 대신 5도호부 외에 75도[안무사(按撫使)]가 설치됨으로써 수령이 대폭 증설되었다. 5도호부 말고도 75개 고을에 수령을 배치하여 다시 적극적인 통치 태세를 취하였던 것인데, 그때 순주도 도의 하나로 안무사가 배치되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1018년(현종 9) 또다시 새로운 지방 통치 제도가 시행되며 대체로 고려 말까지 지속되는데, 그 제도는 외형상으로는 개경과 서경 및 12계수관도(十二界首官道)였다. 12계수관은 4도호부와 8목[황주·광주(廣州)·충주·청주·전주·나주·진주·상주]이었다. 이 제도 아래서는 12계수관과 수령이 배치된 고을이라는 뜻의 수령관(守令官)[넓은 의미에서는 계수관까지 포함]이 있었는데, 그들은 직할 지역과 함께 다수의 임내(任內)[속(屬)·부·주·군·현·부곡(部曲)·향·소(所)·장(莊)·처(處)] 등을 관할하였다. 임내는 수령이 배치되지 않고 이웃 수령관의 수령에게 위임 통치되던 곳으로 실은 수령만 없을 뿐 독자의 경역(境域), 주민, 관사(官司), 인리(人吏), 관노비(官奴婢), 공관(公館), 공수위전(公須位田) 등을 보유하고 과세와 부역 등 행정 사무가 별도로 영위되던 고을이었다.
한편 이와 같은 1018년의 체제에서 지금의 순창군에서는 순주가 순창현(淳昌縣)으로 고쳐져 격이 낮아졌으며, 순창현은 적성현(赤城縣)과 함께 전주 계수관(全州界首官)의 관내인 남원부(南原府)에 속하였다. 비록 수령관이 되지 못하고 주에서 현으로 강등되었지만 여하튼 순창이라는 이름이 이때에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1175년(명종 5)에는 남원부에 속하던 순창현에 감무(監務)[1106년 신설된 수령관으로 임내이던 주·부·군·현에 배치]를 두어 수령관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1314년(충숙왕 1) 순창현이 군(郡)으로 승격되고 그와 동시에 그때까지도 남원부의 임내였던 적성현이 몇 개의 소와 함께 순창군에 이속되었다. 『고려사』에는 이때 순창현이 군으로 승격된 것은 국통(國統) 정오(丁午)의 고향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고려 후기 순창군 지역의 지방 통치 체제를 살펴보면 제일 상위 기관으로 안렴사도(按廉使道)로 전라도가 있었고 그 아래 계수관으로 전주목(全州牧)이 있었으며 다시 그 아래 수령관과 임내가 있었다. 순창의 경우 수령관과 임내로 되어 있었는데 수령관으로 지사(知事)가 있고, 그 아래에 임내에 직촌(直村)[순창읍 일원], 적성현, 복흥현(福興縣)[현재 복흥면 일대], 치등소(置等所)[현재 쌍치면 일대], 유등촌소(柳等村所)[현재 유등면 동부], 감물토소(甘勿吐所)[현재 인계면 동남부], 잉좌소(芿佐所)[현재 인계면 동북부]가 있었다. 또 다른 수령관 도로 순창도가 있었고, 그 임내에는 고도암소(古道巖所)[현재 적성면 동부]가 있었다.
[유적과 유물]
고려 시대 순창의 모습을 보여 주는 유적지와 유물은 그다지 많지 않다. 대표적인 유적지로는 산성이 있으며, 유물은 대부분 불교 유물로 구성되어 있다.
홀어머니산성은 순창읍 서쪽 약 2㎞ 지점에 있는데, 순창 남쪽으로 흐르는 경천(鏡川)을 남쪽에 두르고 있는 표고 150m 내외의 2개의 봉우리를 감싸고 있는 포곡식 석성이다. 가장 오래된 지리지인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홀어머니산성은 교룡산성, 금성산성 등과 함께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미 고려 이전에 축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영조[재위 1724~1776] 대에 엮은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권27 성곽조에는 늙은 할미가 아홉 아들을 거느리고 성을 쌓았다는 설화가 실려 있다. 이는 아마도 ‘대모(大母)’라는 이름에서 유래된 것 같다. 옛 성곽은 고려 시대에서 근대에 걸쳐 관곡(官穀)을 저장한 관창(官倉) 구실을 한 것으로 보고 있으나, 성곽은 이미 삼국 시대부터 존재하여 군의 치소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 순화리 삼층 석탑
순창군 순창읍 순화리 순창 여자 중학교에 있는 순화리 삼층 석탑(淳化里三層石塔)은 고려 시대 이전 옥천사(玉川寺) 경내에 건립되었던 것이라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다만 탑 가까이에 기와와 그릇 조각이 산재하여 부근에 옛날 사찰이 있었음을 추측하게 할 뿐이다. 탑은 화강암으로 조성하였으며, 탑의 하부가 땅속에 묻혀 있어 기단부를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단층의 기단으로 보인다. 기단부의 지대석은 서북쪽 일부가 지상으로 노출되어 있고, 다른 부분은 땅속에 묻혀 있다. 4매의 화강암으로 조합된 기단의 면석 중앙에 1개의 탱주(撐柱)와 우주(隅柱)[귀기둥]를 조식하였다. 그리고 기단 갑석의 상면에는 1층 탑신을 받치는 하단 테두리를 장식하는 방식으로 처리하였으며, 1층 탑신은 4매의 판석으로 조합하였다. 2층 이상은 모두 하나의 화강암을 이용하였다.
1층의 옥개 받침은 별석으로 만들었으며, 옥개 받침을 5단으로 처리하였다. 2층 이상은 옥개석과 옥개 받침을 하나의 화강암을 이용하였다. 그리고 옥개석과 상면 낙수면은 경사도가 약하게 보이며, 네 모퉁이는 두텁고 못이 높은 탑신 받침을 조각하였다. 순화리 삼층 석탑은 고려 시대의 탑형이나 지역적인 특성을 가미한 맛을 풍기고 있다. 3층 옥개석 위에는 하나의 돌에 조각한 노반(露盤), 복발(覆鉢), 앙화(仰花)가 얹혀 있다.
순화리 삼층 석탑의 총 높이는 5.8m이다. 지면에서 지대석까지는 약 1.3m이며, 여기에 하대 갑석을 괴고 다시 그 위에 지면에 접한 방형 대석을 얹어 하대 갑석이 되게 하였다. 상대 갑석은 2매의 장방형 판석을 조합한 것으로 그 위에 높이 0.66m, 1면 1.4×1.4m의 방형 상대 중석을 짜서 맞추었다. 이것은 우주와 중간의 탱주를 모방하여 조각한 것으로 판석 2개를 우주로 하여 방형으로 짜 맞추었다. 상대 갑석은 두께 0.11m의 장방형 판석 3개를 조합한 것으로 1변 2.1×2.1m이다. 상면 중앙 1변 0.95m 넓이의 각형 받침 1단이 1층 탑신을 받치고 있다.
1층 탑신은 높이 0.9m의 방주석에 우주를 뚜렷하게 조각하여 돌출하게 하였으며 탱주는 없다. 1층의 층개석은 높이 0.6m, 1변 1.86×1.86m의 방형으로 낙수면의 경사를 완만하게 하여 추녀의 반곡이 거의 없다. 1989년 조사 당시 북동쪽으로 약 7° 기울어져 있었다. 이것은 탑의 지대가 학교 교사의 지면보다 높은 것으로 지반의 한쪽이 침하되면서 일어난 현상으로 보인다.
3. 남계리 가마탑[남계리 석탑]
순창군 순창읍 남계리 238-2번지에 있는 남계리 가마탑은 탑의 기단부와 탑신의 옥개석으로 보이는 일부만 남아 있다. 기단부는 비교적 완전하게 남아 원형 그대로인 듯하나, 탑신의 옥개석은 뒤집어 기단부 위 중앙에 올려놓았다. 지역 주민들은 남계리 가마탑을 흔히 돌가마라 부른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주민들에게 전한다. 옛날 초행길을 떠난 신부의 가마가 이곳에서 잠시 쉬어 가게 되었는데, 가마를 메고 가던 사람들이 쉬는 틈을 이용하여 좀 떨어진 주막으로 가 술을 마시고 돌아와 보니 가마에 타고 있던 신부가 죽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신부의 영혼을 달래 주기 위해 이곳에 돌로 가마를 만들어 놓고 매년 정월 14일 밤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렇게 하여 불린 돌가마가 곧 남계리 가마탑이다.
하대석은 1변 1.85m, 높이 0.19m이다. 하대 중석은 1변 1.2m, 높이 0.22m이며 네 변을 테두리를 장식하는 방식으로 처리하였다. 그 위에 0.16m 하대 갑석을 올려놓았다. 상대 중석은 4개의 돌을 이용하여 탱주와 우주를 테두리를 장식하는 방식으로 처리하여 면석을 나타내었다. 상대 중석은 1변 1.03m, 높이 0.54m이다. 상대 갑석은 1변 1.19m, 높이 0.11m이다. 상대 갑석 위 가운데 부분에 높이 0.35m, 1면 길이 0.7m의 옥개석을 뒤집어 올려놓았다. 옥개석은 옥개 받침과 낙수면을 하나의 돌을 이용하여 처리하였다. 남계리 가마탑은 석재의 가공 수법이나 석탑의 형태 등을 볼 때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4. 강천사 오층 석탑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 강천사 내 대웅전 앞뜰에 있는 강천사 오층 석탑은 1316년(충숙왕 3)에 덕현 선사(德賢禪師)가 강천사를 중건할 때 세웠다고 한다. 6·25 전쟁 때 공산당 잔당들에 의해 강천사의 모든 건물들이 소실되었는데, 이때 강천사 오층 석탑도 화를 입어 붕괴되었다고 한다. 1959년 당시 주지인 영일(映日) 김장화(金獎華)가 중수하였다. 탑의 높이는 2.5m이며, 2·3·4층의 옥개석이 총탄에 의해 일부가 파손되어 있다. 그리고 탑 주위에는 파손된 석등의 중대석과 보주가 일부 남아 있으며, 당간지주 4기와 가공된 석재가 몇 개 흩어져 있다.
[인물]
고려 시대 순창군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오 국사(丁午國師), 설공검(薛公儉)[1224~1302], 조렴(趙廉)[1290~1343]이 있다.
정오는 순창 출신으로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3대에 걸쳐 대선사와 국통으로 추대되었던 당대 불교계의 거두이며, 1314년 순창을 군으로 승격시키게 된 계기가 된 인물이다.
설공검은 처음에 교동현(喬桐縣) 감무로 임명되었다가 선발되어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가 되었고 고종[재위 1213~1259] 말년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원종[재위 1259~1274] 때에 군기감(軍器監)으로 임명되었고 세자를 따라 원나라에 갔다. 그 공로로 여러 차례 조동되어 우부승선으로 임명되었다. 충렬왕[재위 1274~1308] 초년에 밀직부사로 승진하고 필도적(必闍赤)이 되었으며, 감찰대부와 지첨의부사를 역임하였다. 얼마 후에는 참리(參理)로 승직되었는데 퇴관할 나이가 되었다 하여 물러갈 것을 요청하니 찬성사로 높여서 치사(致仕)케 하였다. 그 후 또 중찬으로 올려서 치사하였다. 나이 79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설공검과 비슷한 시기의 순창 출신으로 조렴이 있다. 조렴의 자는 노직(魯直)으로 충숙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또 원나라의 제과에 합격하여 원의 요양등로총관지부사(遼陽等路摠管知府事) 벼슬을 받고 본국에서 전리 좌랑(典理佐郞)이 되었다. 조렴이 종묘(宗廟)의 제도에 관하여 쓴 논문이 『예지(禮志)』에 실려 있다. 충혜왕 초년에 정언(正言)으로 임명되었다. 1343년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