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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02164
한자 海洋都市麗水-船舶
영어의미역 Coast City Yeosu's Ships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병호

[개설]

여수의 선박은 민가의 어선뿐만 아니라 전함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이는 예부터 여수가 어항이면서 조선 초기에 설진된 진례만호진·돌산포만호진·내례만호진, 성종 때 설진된 전라좌수영, 중종 때 설진된 방답첨사진의 관방이 있었고, 여수 근해에 풍부한 어장과 수많은 섬들이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여수에서 본격적으로 여객선이 운행된 것은 1950년대부터이며, 여수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기 시작한 1960년대 이후로는 각종 탱커와 화물선들이 여수 앞바다를 누비고 다닌다.

[전통의 배-한선]

우리나라 전통 배인 한선(韓船)의 특징 중 하나가 평평한 배의 밑부분인데, 이는 조석간만의 차가 심한 서남해안에 적응하기 위해서이다. 배밑이 평평하면 만조 때 밀물을 타고 갯가로 들어와서 간조인 썰물 때는 그대로 갯바닥에 편하게 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를 ‘평저선 구조’라고 하는데, 한선의 기본적인 구조인 셈이다.

한선의 시초는 원시시대부터 사용되어 온 뗏목배라고 할 수 있다. 뗏목배와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져 사용된 것이 통나무를 반으로 쪼갠 다음 돌도끼로 속을 파낸 구유처럼 생긴 통나무배였다. 쇠로 만든 연장을 쓰게 되는 철기시대에 들어와서는 널판때기를 만들 수 있게 되고, 나무에 구멍을 뚫고 나무못을 박을 줄 알게 되어 바닷배의 시조(始祖)라고 할 수 있는 ‘거룻배’가 만들어졌다.

이후 더 많은 짐을 싣거나 사람을 더 태우기 위해서 노를 젓지 않고도 바람의 힘을 빌려 멀리까지 왕래할 수 있는 ‘야거리’를 만들었는데, 이로써 나무를 쪼개어 자르고 결합한 뒤에 연결한 완전한 구조선(構造船)이 만들어진 것이다. 문명과 산업이 발달함에 따라 배의 필요와 수요가 늘어나고 점점 더 큰 배를 만들게 되자, 뱃전을 일곱 쪽으로 올리고 돛대도 두 대를 세우는 ‘당두리’를 만들었다. 당두리는 한선의 기본 선형이라 할 수 있다.

한선의 기본 선형은 평평한 배밑과 턱을 따내고 널판때기를 겹쳐서 쌓아 올린 뱃전, 가로다지 널판때기로 대어 막은 이물비우와 고물비우, 배의 대들보라고 할 수 있는 멍에, 멍에 아래의 뱃전에 구멍을 뚫어서 꿰어 걸은 장쇠, 배밑을 가로로 꿰어 박은 기다란 나무창인 가새, 뱃전을 위에서 아래로 꿰어 박은 나무못인 피새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형태는 서양이나 중국의 선형과는 다른 것으로, 우리나라의 지리와 지형적 조건, 형편에 알맞게 독특하게 창안되고 발달해 온 것이다.

한선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전함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이는 조선시대에는 민간의 해양 활동이 통제된 반면에 수군제도와 조운제도가 발달했기 때문이다. 특히 고려 후기부터 극성을 부렸던 왜구의 영향으로 전함(戰艦)이 발달하였는데, 조선시대 전함의 전형이 된 판옥선을 비롯해 거북선과 방패선 등 우수한 성능을 갖춘 전함들이 다수 제작되었다. 조선 중기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이처럼 우수한 전함의 건조 덕택이라고 볼 수 있다.

수군이 해체된 조선 후기에는 기선이 세곡 운송에 활용됨으로써 전통적인 군선과 조운선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또한 지토선(地土船) 등 민간 선박들도 소위 개량선박의 보급정책으로 인해 급격히 그 구조가 변경되었다. 여수의 한선은 1885년 거문도 사건 당시 영국군이 그린 삽화에서 정확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를 전후해 순수한 우리의 한선은 그 맥이 끊기고 말았다.

[전라좌수영의 핵-전함]

판옥선은 1559년(명종 14)에 만들어진 조선시대 수군의 주력함으로, 갑판 위에 상갑판을 꾸미고 그 위에 사령탑인 장대(將臺)를 설치한 구조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다층 전투함이다. 갑판 위로 올린 구조물을 ‘판옥’이라고 한 데서 ‘판옥선’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조선시대 수군의 주력함으로, 막강한 화력과 튼튼함, 기동성을 가지고 있었다. 거북선과 비교할 때, 2층 판옥이 있다는 점만 다를 뿐 기본적인 구조는 유사했다.

거북선이 적의 지휘선을 공격하고 적 함대의 전열을 흐뜨리는 기동 돌격대의 성격을 띠었다면, 판옥선은 그 뒤를 이어 막강한 화력으로 본 전투를 이끄는 전함이었다. 판옥선의 크기는 대·중·소로 구별되었으며, 대형은 화포 중에 천자총통·황자총통·천자총통을 모두 적재하였고, 중형은 지자총통·현자총통·황자총동, 소형은 황자총통만을 적재하였다.

임진왜란 때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왕에게 올린 보고서에 전선에 대해 언급된 내용이 있는데, 이를 통해 치수와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통영(임진왜란 당시의 삼도수군통제영은 전라좌수영인 여수에 있었다)의 제일 큰 전선인 상선(上船, 또는 座船: 통제사가 타는 배)의 치수는 배의 길이 105자, 너비 39자 7치이다.

아래층의 신방 도리에서 위의 패란(방패 위에 있는 도리를 말하며, 언방(偃防)이라고도 한다)까지의 높이는 5자이다. 또한 수영(水營)에 속해 있는 각 관읍(官邑)과 진포(鎭浦)의 전선의 치수는 배밑 길이 65자, 한판 너비 15자, 이물 쪽 너비 12자 5치, 고물 쪽 너비 7자 5치이고, 배의 한판 높이는 8자이다.

통영의 좌선이나 부선의 멍에는 열여섯 개씩이고, 배밑은 열다섯 개를 이어 붙였다. 각 관읍이나 진포에 있는 전선의 멍에는 열다섯 개씩이고, 배밑은 열두 개에서 열세 개의 나무를 이어 붙였다. 이물비우는 직판(直板) 널빤지로 15쪽을 이어 붙였고, 뱃전 위에 멍에를 걸었다. 그리고 양쪽 뱃전의 멍에 뺄목에 큰 노를 아홉 척씩 걸고 젓도록 되어 있다. 배밑은 네모진 통나무 열다섯 개를 이어 붙였는데, 물 속에 잠겨 있으므로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물돛대와 고물돛대가 있고, 고물꼬리에는 널판을 깔지 않고, 난간이 없이 비어 있다.

판옥전선은 이층으로 되어 있는데, 일층은 삼판 일곱 쪽을 이어 붙여 올린 뒤 멍에를 걸고 그 위에 귀틀을 짜고 겻집을 깐 곳까지를 이른다. 이층은 멍에 뺄목 위에 신방도리를 걸고서 그 위에 기둥을 세우고, 판옥이나 다락을 꾸민 데까지를 이른다. 상장 위에는 이물과 양쪽 뱃전을 따라가면서 여장을 설치하였다.

상장의 언방 위에 뱃집 멍에를 걸고 널빤지를 까는데 이것을 청판(廳板)이라고 한다. 상장의 청판에서 이물돛대와 한판돛대를 뉘었다 세웠다 할 수 있게 장치를 하였다. 또 청판 위 한가운데에 다락을 만들었고, 그 위에 좌대를 만들고 가마지붕을 씌운 뒤 장막을 쳤다. 통제사는 이 좌대에서 모든 배와 군사를 지휘한다. 이 좌대를 장대라고 하였다.

여러가지 자료를 종합해 보면, 임진왜란 이후 전함이나 관용선의 이물비우는 세로다지 곧은 널판이나 곡목의 형태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가로다지로 되어 있는 보통 배와 구별된다. 또 전함 삼판의 꼬리 부분이 위로 솟구쳐 올라간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는 전함의 위용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나, 현호를 늘리기 위한 조선기법으로 볼 수 있다.

거북선은 임진왜란에서 큰 전과를 거둔 전함으로, 갑판 위를 판자로 덮은 다음 그 위에 창칼을 꽂은 것이 특징으로, 1592년(임진년) 임진왜란에서 사용되어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난중일기(亂中日記)』에는 거북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장차 왜적의 침입을 염려해 따로 전선(戰船)을 만들었는데, 배 위를 둥그스름하게 판자로 덮고 그 위에 창칼을 꽂았다. 적군들이 배에 기어오르거나 뛰어내리면 창칼에 찔려 죽게 된다. 배의 앞에는 용두(龍斗)를 달고 그 용의 입을 통하여 대포알을 쏘았다. 뒤에는 거북꼬리를 달고 총구를 냈다. 배의 좌우에는 각각 여섯 개의 대포구멍을 냈다. 거북배에는 돌격장이 타고 함대의 선봉이 되어 나아간다. 적이 에워싸고 덮치려 하면 일시에 대포를 쏘아 가는 곳마다 휩쓸어 임진왜란에서 크게 공을 세웠다. 모습이 엎드린 거북과 같으므로 ‘거북배’라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거북선의 구조에 대한 자세한 설계도나 치수는 전해 오는 것이 없다.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와 조정에 올린 장계(狀啓), 조카 이분(李芬)의 행장과 몇 가지 단편적인 자료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 따름이다.

거북선이라는 이름은 조선왕조 『태종실록(太宗實錄)』에 처음 나온다. 태종 13년 2월에 “왕이 임진나루를 지나가다가 거북배와 왜선으로 꾸민 배가 수전 연습을 하는 것을 보았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태종 때의 거북선은 평전선만이 있을 때였으므로 1592년의 거북선과는 그 구조가 달랐다고 보아야 한다.

『난중일기』에서는 1592년 2월 초파일에 “거북배에 쓸 돛감[帆布] 스물아홉 필을 가져왔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4월 초하루에는 “돛을 만들기 시작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거북선에는 이물돛대와 한판돛대가 있었다. 옛날에 삼베나 면포돛은 관선이나 싸움배에만 썼고 일반 배에서는 부들로 짠 돛을 달았다. 행선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바람이 불면 돛을 올리고 출발하는데, 도중에 바람이 적거나 행선을 서두를 때는 큰 노를 걸고서 노질을 재촉하여 행선한다.

거북선에는 약 아흔 명의 노젓는 군사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식 큰노 한 척에 네 명이 둘씩 마주 서서 젓고, 우두머리 한 명이 더 붙어서 모두 다섯 명이 젓게 된다. 전라좌수영 거북선에는 한쪽 뱃전에 여덟 척의 노가 달려 있다. 1592년 임진왜란 초기에는 전라좌수영에 영(營) 거북선, 순천 거북선, 방답 거북선 등 세 척이 있었으나, 정유재란 때는 1593년에 추가로 만든 거북배를 포함하여 모두 다섯 척이 있었다.

사후선은 본진보다 앞서 가서 적의 동태를 살피고 알리는 배로, 선단의 맨 앞으로 나가 적의 동태를 살피고, 적선을 발견하게 되면 신기전으로 신호를 보내 알리는 역할을 하는 척후선이었다. 전체 길이 13.5m 정도의 소형선으로, 승선 인원은 5~6명이었다. 신호를 보내기 위한 신기전통을 탑재하였고, 뱃전 좌우에 노 두 척을 걸었다.

사후선은 또 긴급한 군의 작전 명령 등을 쾌속으로 전하는 전령선과 연락선의 임무도 수행했다. 『난중일기』에는 사후선과 관련하여, "제1사후선은 본판(배밑) 길이가 열아홉 자이다. 1636년 2월에 새로 만들었다. 현판 좌우에 노 네 자루를 걸었고, 기선 인원은 사공 한 명에 능노군(能櫓軍)이 다섯 명으로, 도합 여섯 명이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방패선은 포판 위에 난간을 설치하고 방패를 세운 배로, 평선의 뱃전 밖에 신방을 걸고 난간을 세운 후에 방패를 세운 배이다. 선체 구조는 전함과 같았으며, 전투함인 동시에 적을 탐색하는 전투정찰의 임무를 겸하고 있다.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각선도본(各船圖本)』에는 방패선[兵船]을 45도 투시도법으로 그린 설계도와 제원(諸元)이 적혀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배밑의 길이는 39자, 너비는 6자 9치, 머리쪽(이물)의 너비는 4자 5치, 꼬리쪽(고물)의 너비는 4자이며, 뱃전 높이는 8자이다. 배밑은 일곱 쪽을 이어 붙였는데, 그림에서는 물에 잠겨 있어서 안 보인다. 뱃전 삼판은 일곱 쪽을 이어 올렸다. 고물에는 난간을 하지 않아 비어 있고, 세웠다 뉘었다 할 수 있는 돛대가 두 개 달려 있다.

고물에는 배의 방향을 잡아 주는 키가 있고, 이물에는 배를 매두는 닻이 있다. 뱃전 위에는 고물머리 멍에를 포함하여 열 개의 멍에가 걸려 있고, 이물머리에는 선멍에(덕판)가 있다. 가룡목은 삼판마다 좇아 내려가면서 양쪽 삼판을 꿰뚫어서 끼우는데, 멍에 바로 밑에 있기 때문에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바다가 일터-어선]

어선의 종류는 포획대상물에 따라 분류하거나 어업 방법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대상물이 무엇이냐에 따라 어장이 미리 결정되고, 그에 따라 어선의 크기와 규모 등이 정해지므로 대상물과 어업 방법을 결합시켜 고등어 건착망 어선, 멸치 권현망 어선, 조기 안강망 어선, 명태 트롤 어선, 남태평양 다랑어 주낙 어선 등과 같이 분류하기도 한다.

한편 용도에 따라 독항선, 공모선, 망선으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일반적으로 어선은 상선에 비하면 소형이면서도 외양에 장기 체류하며 능률적으로 어로 작업을 수행해야 하므로 내항성이 좋아야 하며, 크기나 모양은 수행하는 어업의 종류에 맞아야 한다.

어선이 대형화되지 못했던 때에는 냉동가공시설을 갖추지 못하여 이를 갖춘 모선에 따라 어로선이 선단을 조직하여 조업을 해야 했으나, 오늘날은 대부분의 어선이 대형화되어 냉동가공시설을 갖추고 있으므로 독자적으로 조업을 하는 경우가 많다.

여러 척의 어선이 커다란 공선을 중심으로 조업하면서, 어획물을 공선에서 처리하고 가공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의 공선을 모선(Mother Ship), 어로에 종사하는 배를 어로선(Catcher Boat)이라 하고, 이들 전체를 어선단이라 한다. 어획물의 종류에 따라서 고래 공선, 게 공선, 피시밀 공선과 송어·연어 공선 등이 있다. 모선은 어획물을 제조하고 가공하며, 이들 제품을 저장하는 창고로도 이용된다. 공선은 보통 수천 톤급의 배로서 많은 작업자를 태우게 된다.

[섬과 섬을 잇는 다리-상선]

선박안전법상 12명 이상의 여객을 수송하는 선박의 경우 정기 항로 여객선과 일반 관광선으로 분류된다. 여객선은 여객의 안전과 분위기 조성을 위하여 선박 내부에 여러 가지 설비를 갖추고 있으며, 만일에 대비하여 구명 설비도 완비해야 한다.

여수에서 본격적으로 여객선이 운행된 것은 1950년대부터로, 이때의 운항 항로를 살펴보면 여수-부산은 태안호·태신호·장구호·장운호·동일호·오소호·창해호·흥초호·갑성호·부산호가 운항을 하였으며, 여수-목포는 경통호·유명호, 여수-남해는 창선호, 여수-남면은 조양호·통조호, 여수-고흥은 질자호, 여수-화양은 덕영호, 여수-고흥·진두는 여진호가 운항하였다.

최초의 고속여객선은 여수와 부산 간을 오고가는 엔젤호이다. 1971년 3월 15일부터 운항을 시작한 엔젤호는 여수와 부산 간 90해리를 시속 32노트로 달려 3시간 15분 만에 도착함으로써 부산과의 내왕에 새 장을 열었다.

객화선이라고도 부르는 화객선은 여객과 화물을 동시에 운반하는 선박이다. 수면 부분 이하의 선창에는 화물을 적재하고, 그 이상의 중갑판 및 상갑판의 선루에는 여객용 설비를 갖추어 여객을 탑승시키는 선박이다.

카페리선(Car Ferry)은 여객과 자동차를 싣고 운항하는 선박으로서, 자동차의 항송을 목적으로 하는 선박이다. 차량 갑판과 램프(육상에서 선박으로 가는 자동차 연락통로)를 설비하고 있으며, 자동차를 선박에 싣고 내리는 것은 운전자가 한다. 여수의 페리선은 중앙동 물양장을 중심으로 두 척이 운항하고 있는데, 한 척은 화정면을 거쳐서 남면의 금오도 한구미까지 운항하고, 다른 한 척은 연도까지 운항하고 있다.

유람선(Cruise Liner)은 관광 및 유람을 목적으로 사용되는 소형 여객선으로, 사적이나 명승지가 많은 강이나 호수 등을 회유하는 선박이다. 여수 지역에서는 오동도돌산대교, 여객선터미널을 중심으로 운항되고 있다.

화물선은 건화물선(Dry cargo ship)과 탱커로 나누어진다. 화물선은 화물의 운송을 목적으로 하는 선박인데, 비여객선의 대부분은 선박 안전법상 화물선에 속한다. 화물선은 화물의 운송이 주목적이므로 주거 설비 공간을 최소로 하고 선창 설비 공간을 최대로 하며, 하역 설비에 중점을 두어 일시에 대량의 화물을 안전하고 신속하게 운송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역사 속의 선박들]

여수에 나타난 최초의 기선은 삼오환(三五丸)이다. 삼오환은 일본 오사카에 사는 금정청병위(金井淸兵衛)의 소유로, 당시 부산과 삼천포 간을 은밀히 내왕하며 지형과 지물, 해저 등을 탐색하던 일본의 간첩선이었다. 그런데 의병들이 여수 지역으로 들어오자 일본인들의 사기 저하를 우려한 재여(在麗) 일본인 대표 연정등길(蓮井藤吉)이 선주에게 특별히 청하여, 일본의 국력을 과시하여 일본인들에게는 용기를 북돋워 주고 우리 국민들에게는 심리적 압박을 주기 위해 시위용으로 입항케 했던 것이다.

전라선이 개통된 날과 같은 날인 1930년 12월 25일, 여수와 시모노세키[下關] 사이에 정기 여객선인 2천5백 톤 규모의 흥아환(興亞丸)이 취항하였다. 일본의 천기기선주식회사(川崎汽船株式會社)에 의해 개척된 관려연락선(關麗連絡船)으로서, 매일 오후 3시에 출항하면 익일 오전 5시에 시모노세키에 도착하였다. 흥아환(興亞丸)과 2천 톤급인 조박환(朝博丸)이 매일 교대로 다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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