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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02232
한자 纛祭
이칭/별칭 군기제
분야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유형 의례/제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집필자 주석봉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제례
의례시기/일시 진남제 기간 중 5월 4일
의례장소 전라남도 여수시 진남관
신당/신체 홍둑 2개|흑둑 2개

[정의]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군신을 상징하는 군기인 둑[纛]에 지내던 제사.

[개설]

둑제는 군신을 상징하는 깃발에 지내는 제사의식으로 고대부터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둑에 제사를 지낸 데서 유래됐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에 처음으로 둑기의 모습이 확인되지만 둑제의 시행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승리의 신인 치우의 머리를 형상화한 둑기는 소의 꼬리나 검은 비단으로 만들어 ‘대조기’라고도 불린다.

조선왕조에 들어와 처음 국가의례로 정비된 둑제는 문신들의 석전제(釋奠祭)에 비견되는 무신들의 유교의식이었다. 둑제는 그 시행 지역과 규모에 따라 한양의 둑제와 각 지방[兵營, 水營]의 둑제로 구분된다, 둑제는 군신(軍神)을 상징하는 4개의 둑기에 제사를 지내면서 「납씨곡(納氏曲)」, 「정동방곡(靖東方曲)」 등의 음악과 노래에 맞춰 「간척무(干戚舞)」, 「궁시무(弓矢舞)」, 「창검무(槍劍舞)」를 추는 등 조선시대 예악문화(禮樂文化)의 정수를 담고 있는 소중한 무형문화유산이다.

[연원 및 변천]

1. 고려시대의 둑제

우리나라에서 둑제가 처음으로 행해진 시기는 자세하지 않다. 『삼국사기(三國史記)』기록을 살펴보면, 후삼국시대에 둑기의 기록이 확인되나 둑제의 시행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둑기의 존재가 처음으로 확인되는 시기는 고려 고종[1192~1259] 때이다. 당시 둑기를 세워 군사를 모집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둑기는 당시 군령권을 상징하는 의미로 인식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1281년(고려 충렬왕 7) 3월 2차로 일본에 출정하기 직전 궁의 남문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어서 1287년(충렬왕 13) 6월 기록에는 일본으로 출정하는 내안(乃顔)을 위하여 궁문에서 왕이 친히 둑에 제를 지냈는데, 이때 왕이 군사의 열병을 마친 후에 둑제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처음 등장한 둑제의 기록은 모두 고려·몽고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 2차례 둑제를 지낸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둑제는 잡사(雜祀)의식으로, 충렬왕과 공민왕 때 잠시 실행된 적이 있으나 계속 이어지지는 못하였다.

2. 조선시대의 둑제

조선조에 들어와 둑제가 처음 시행된 기록은 건국한 지 7개월 만인 1393년(태조 2) 1월 16일로 확인된다. 이 둑제는 둑신이라 불리는 ‘홍둑[紅纛]’과 ‘흑둑[黑纛]’을 대상으로 정월에 지내는 제사였으며, 1394년(태조 3) 1월 27일에 다시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1421년(세종 3)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국가의 사전(祀典)으로 정비되었으며, 1474년(성종 5)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가 편찬되면서 길례의 소사 가운데 하나로 둑제가 확립되었다.

둑제는 임진왜란(1592~1598) 중에도 계속되었다. 『난중일기(亂中日記)』를 살펴보면, 1593년(선조 26) 2월초 5일 경칩에 비가 오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둑제를 시행하였다. 1594년(선조 27) 9월초 9일에 장흥부사를 헌관(獻官)으로 삼고, 흥양현감을 전사관(典祀官)으로 삼아 둑제를 시행하였다. 1595년(선조 28) 9월 20일 사경(四更, 새벽 1~3시)에 둑제를 행하였는데, 사도첨사(蛇渡僉使) 김완(金完)을 헌관으로 삼아 지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둑제는 새벽 1~3시경에 시행했으며, 이순신 장군이 제관(祭官)을 하되 인근 지역의 수령들이 헌관이나 집사관(執事官)으로 참여하였고, 왜적을 무찌르게 해 달라는 출사제문(出師祭文)을 지어 읽게 하였다는 점이다. 그후 둑제는 1618년(광해군 10) 명나라를 돕기 위해 떠나는 도원수 강홍립 장군을 위해 지냈고, 1894년 갑오개혁으로 종래 예조에서 궁내부로 담당부서가 바뀐 채 조선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신당/신체의 형태]

둑제는 반드시 ‘둑소[纛所]’ 또는 ‘둑소묘([纛所廟]’라고 불리는 곳에서 거행되며, 한양을 비롯한 전국의 병영과 수영이 있는 곳에 둑소가 설치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둑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종묘(宗廟)나 문묘(文廟)에서 무무(武舞)를 출 때에 사용하는 둑이고, 다른 하나는 둑제를 지낼 때 사용하는 둑이다. 서로 모양이 다르며,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둑은 후자이다.

둑이란 정벌 대상의 머리를 창에 꿴 형상으로서 이를 통해 군대의 위용을 보이고자 한 것이다. 둑의 제작은 『운회(韻會)』에 의하면, “털이 긴 소인 모우(旄牛)의 꼬리로 만들고, 임금의 수레를 끄는 두 마리 말 가운데 왼쪽 비마(騑馬)의 머리에 싣는다”고 한다. 그 크기는 『광운(廣韻)』에 “크기가 말만 하다”고 했다.

둑의 형태에서 홍둑은 홍색 상모를 쓰며, 나무로 만든 자루에 주칠을 하고 하단은 쇠장식으로 마감한다. 상모 위에 동으로 만든 접시꽃 모양의 덮개를 씌우며, 덮개와 칼날에 분칠한다, 흑둑은 홍색 대신 흑색 상모를 사용한다. 둑의 자루 위쪽 양 옆으로 동그란 귀를 만들어 끈을 매달아서 받침대와 연결하여 세울 수 있다.

[절차]

1. 둑제의 고사유제 및 이안제·환안제

둑제는 제사를 지내기에 앞서 둑기를 옮기거나 이동할 때 사유를 알리는 고사유제(告事由祭)를 지냈다. 아울러 둑기를 편안히 옮기기 위한 이안제(移安祭)와 제자리에 옮겨 놓을 때 지내는 환안제(還安祭)를 지냈다. 이러한 제사 역시 재계(齋戒)는 둑제와 마찬가지로 3일 동안 하되, 2일은 산재(散齋)를, 1일은 치재(致齋)를 행하였다. 음악 없이 행사가 이루어지며, 그 절차는 둑제와 거의 비슷하나 헌작을 1작만 올리는 것이 차이가 있을 뿐이다.

2. 둑제의주

1) 시일(時日) 및 장소

『국조오례의』에 따르면, 둑제는 매년 춘추로 경칩과 상강에 시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경칩은 대략 1월 말에서 2월 사이에 거행하고, 상강은 10월 사이에 거행한 것으로 확인된다. 다만 군대가 출정할 때는 전쟁을 앞두고 날짜를 정해 거행하였다.

2) 참여자 및 재계

둑제는 문관은 참여하지 않고 무관만 참여한다. 둑제의 참여자는 한양이냐 지방이냐에 따라 조금 차이가 난다. 한양에서는 제관 이외에 감찰이 참여하고, 지방에서는 훈련원 관리가 참여한다. 제사에 참여하는 자는 제사 하루 전에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는다. 재계는 제사기일 전 3일 동안 산재와 치재로 이루어진다.

산재는 2일 동안 이루어지는데 금기사항은 술을 마시지 않고 파, 부추, 마늘을 먹지 않으며 조상(弔喪)과 문병(問病)을 하지 않고, 음악을 듣지 않고, 형벌을 가하지 않는다. 산재가 끝나면 마지막 1일은 치재를 제소(祭所)에서 행하되 오로지 제향에 관한 일만을 본다.

3) 둑제의 찬실(饌實) 및 배설(排設)

둑제의 상차림은 소사(小祀)에 기준하여 이루어졌다. 제기는 기본적으로 변(籩), 두(豆), 보(簠), 궤(簋)를 기본으로 하여 크게 북쪽의 신위(神位)를 중심으로 좌팔변(左八邊), 우팔두(右八豆)의 형식으로 진설하였다.

4) 진설(陳設)

제사 1일 전에는 둑소 안팎의 청소를 하고, 제관의 막차와 찬만을 설치하는데 이를 진설이라 한다.

5) 행례(行禮)

① 행사 시각보다 5각(五刻, 1시간 15분) 전에 전사관(典祀官)이 찬(饌)을 담는다.

② 3각(45분) 전에 여러 제관과 훈련원 관원이 무복(武服)을 입는다. 찬인(贊人)의 인도로 훈련원 관원이 문외위(門外位)에 나아간다. 집례(執禮)가 찬자(贊者), 알자(謁者), 찬인(贊引) 등을 거느리고 먼저 섬돌 사이의 배위(拜位)에 나아가 겹줄로 서쪽을 상위(上位)로 하고 북향하여 사배(四拜)하고 나서 각기 자리로 나아간다. 공인(工人)과 악무(樂舞)가 들어와 자리에 나아간다.

[「간척무」, 「궁시무」, 「창검무」가 차례로 들어와 계상(階上)에 벌려 선다] 찬인의 인도로 배제관이 자리에 나아간다. 찬인의 인도로 훈련원 관원이 자리에 나아간다. 알자와 찬인의 인도로 여러 제관이 모두 문외위에 나아간다.

③ 1각 전에 찬인의 인도로 감찰, 전사관, 대축, 축사(祝史), 재랑(齋郞)이 섬돌 사이의 배위에 나아가 겹줄로 서쪽을 상위로 하여 북향하여 선다. 집례(執禮)가 ‘사배’라고 말하고, 찬자가 전창(傳唱)하면[집례가 말을 하면 찬자가 모두 전창한다] 감찰 이하가 모두 사배한다.

찬인의 인도로 감찰이 자리에 나아간다. 찬인의 인도로 여러 집사자가 관세위(盥洗位)에 나가서 손을 씻고 자리로 나아간다. 재랑이 작세위(爵洗位)에 나아가 작을 씻어 비(篚)에 담아 받들고 준소[일명 술 단지 있는 곳]에 나아가 점(坫) 위에 놓는다. 알자의 인도로 헌관이 자리에 나아가 선다. 알자가 헌관(獻官)의 왼쪽에 나아가서 유사(有司)가 삼가 갖추었음을 사뢰고 행사하기를 청하고 물러가 자리에 돌아간다. 집례가 ‘사배’라고 말하면, 헌관 이하가 모두 사배한다.

④ 집례가 ‘행전폐례(行奠幣禮)’라고 말하면, 알자의 인도로 헌관이 관세위에 나가 북향하여 서서 손을 씻고 수건으로 닦고서, 신위 앞에 나아가 북향하여 섰다가 끓어 앉는다. 집사 한사람이 향합(香盒)을 받들고 집사 한사람이 향로를 받들어 끓어 앉아 올리면, 알자가 도와서 세 번 향을 피워 올리고 집사가 향로를 신위 앞에 드린다.

대축(大祝)이 폐비(幣篚)를 헌관에게 주면 헌관이 폐백(幣帛)을 잡아서 폐백을 바치는데, 폐백을 대축에게 주어서 신위 앞에 드리게 한다. 알자가 도와서 헌관을 부복(俯伏)하였다가 일어나서 몸을 바르게 하고, 인도하여 내려가 자리로 돌아가게 한다.

⑤ 「간척무」가 나온다.

집례가 ‘행초헌례(行初獻禮)’라 말하면, 알자가 초헌관을 인도하여 올라와서 준소에 나아가 서향하여 서게 한다. 음악을 연주한다. [「납씨곡(納氏曲)」] 집준자가 멱(羃, 덮개)을 들고 술을 따르면 집사가 작에 술을 받는다. 알자가 헌관을 인도하여 신위 앞에 나아가 북향하여 섰다가 꿇어앉게 한다. 집사가 작을 헌관에게 주면 헌관이 작을 잡아 바치는데, 작을 집사에게 주어서 신위 앞에 드리게 한다.

알자가 헌관을 도와서 부복하였다가 일어나서 조금 물러나서 북향하여 꿇어앉게 한다. 음악이 그친다. 대축이 신위의 오른쪽에 나아가 동향하여 끓어 앉아서 축문을 읽는다. 이를 마치면 음악을 연주한다. 알자가 헌관을 도와서 부복하였다가 일어나서 몸을 바로 하게 한다. 음악이 그치면 인도하여 내려가 자리로 돌아가게 한다. 「간척무」가 물러난다.

⑥ 「궁시무」가 나온다.

집례가 ‘행아헌례(行亞獻禮)’라고 말하면 알자가 아헌관을 인도하여 올라와서 준소에 나아가 서향하여 서게 한다. 음악을 연주한다, [「납씨곡」] 집준자가 멱을 들고 술을 따르면 집사가 작에 술을 받는다. 알자가 헌관을 인도하여 신위 앞에 나아가 북향하여 섰다가 꿇어앉게 한다. 집사가 작을 헌관에게 주면 헌관이 작을 잡아 바치는데, 작을 집사에게 주어서 신위 앞에 드리게 한다. 알자가 헌관을 도와서 부복하였다가 일어나서 몸을 바로 하게 한다. 음악이 그치면 인도하여 내려가 자리로 돌아가게 한다. 궁시무가 물러난다.

⑦ 「창검무」가 나온다.

조금 있다가 집례가 ‘행종헌례(行終獻禮)’라고 말하면 알자가 종헌관을 인도하여 행례하는 것을 아헌의식과 같이 한다. 마치면 인도하여 내려가 자리로 돌아가게 한다.

⑧ 집례가 ‘음복수조(飮福受胙)’라고 말하면, 집사가 준소에 나아가 작에 복주(福酒)를 따르고 또 집사가 조(俎)를 가지고 나아가 신위 앞의 조육(俎肉)을 덜어낸다. 알자가 헌관을 인도하여 올라가 음복위(飮福位)에 나아가 서향하여 섰다가 꿇어앉게 한다. 집사가 헌관의 왼쪽에 나아가 북향하여 작을 헌관에게 주면, 헌관이 작을 받아다 마신다.

집사가 빈 작을 받아서 점에 놓는다. 집사가 북향하여 조를 헌관에게 주면 헌관이 조를 받아서 집사에게 준다. 집사가 조를 받아서 동쪽 계단으로 내려가 문을 나간다. 알자가 헌관을 도와서 부복하였다가 일어나서 몸을 바로 하게 하고 인도하여 내려가 자리로 돌아가게 한다. 집례가 ‘사배’라고 말하면 자리에 있는 자가 모두 사배한다.

⑨ 집례가 ‘철변두(徹邊頭)’라고 말하면 대축이 들어와 변·두를 거둔다. [거둔다는 것은 변·두 각 하나를 전에 있던 자리에서 조금 옮겨 놓는 것이다] 음악을 연주한다. [「정동방곡(靖東方曲)」] 거두는 것을 마치면 음악을 그친다. 집례가 ‘사배’라고 말하면 헌관 이하 모두 사배한다.

⑩ 집례가 ‘망예(望瘞)’라고 말하면 알자가 헌관을 인도하여 망예위(望瘞位)에 나아가 북향하여 서게 한다. 집례가 찬자를 거느리고 망예위에 나아가 서향하여 서게 한다. 대축이 비에 축판(祝版)과 폐백을 담아서 서쪽 계단으로 내려가 구덩이에 넣는다. 집례가 ‘가예(可瘞)’라고 말한다. 흙을 반구덩이 쯤 묻으면 알자가 헌관의 왼쪽에 나아가, 예를 마친 것을 사뢰고 헌관을 인도하여 나간다. 집례가 찬자를 거느리고 본 자리로 돌아가고, 찬인이 감찰과 여러 집사를 인도하여 섬돌 사이의 배위로 돌아가 선다. 집례가 ‘사배’라고 말하면 감찰 이하가 모두 사배한다.

[축문]

축문은 다음과 같다.

"유세차 계사년 이월ㅇㅇ삭초오일ㅇㅇ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 감소고우 둑신 복이 유신지령 재양무위 천명인 기우향지 식진명천 상 향(維歲次 癸巳年 二月ㅇㅇ朔初五日ㅇㅇ 全羅左道 水軍節度使 李舜臣 敢昭告于 纛神 伏以 維神之靈 載揚武威 蕆明禋 其右享之 式陳明薦 尙 饗)"

[부대행사]

둑제가 끝나면 음복을 하는 것은 하나의 관행이다. 아울러 옛날에는 관악과 기생이 성대한 가무를 베풀고 파했다고 한다. 다만 천변이 있을 경우에는 음악을 정지하였다.

[현황]

1999년과 2000년에 ‘진남제’ 식전 공개행사인 ‘전라좌수영 수군출정식’이란 프로그램으로, 그 당시 진남제전위원회 행사부장이었던 주석봉의 시나리오와 연출로 둑제가 재현되었으나 「납씨곡」과 「정동방곡」 등이 빠진 부분적인 시도였다. 그러다가 2007년 4월에 여수 진남관에서 둑제가 재현되었다.

2007년 12월 9일 문화관광부가 처음으로 추진한 전통예술 복원 및 재현사업의 일환으로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 둑제 재현행사’를 한국체육대학교 심승구 교수를 책임연구원으로 하는 학술적 고증과 여수시에 소재하는 향토민속문화보존회 정홍수 회장의 연출로 조선시대 삼도수군통제영이었고 전라좌수영 본영이었던 전라남도 여수시 진남관에서 수영(水營)둑제를 대상으로 재현되었다.

문화관광부가 처음 시행하는 전통예술 복원 및 재현사업 1호로 선정된 둑제는 악(樂), 가(歌), 무(舞)가 독특하게 결합된 것으로 조선시대의 수준 높은 문화를 원형 그대로 복원함으로써, 지역의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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