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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02243
한자 郡內里東內堂祭
영어의미역 Village-Ritual Ceremony of Dongnae Village, Gunnae-ri
분야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유형 의례/제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 동내마을
집필자 나경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간신앙
의례시기/일시 음력 섣달 그믐날 18시
의례장소 마을 옆 본산 정상의 당집
신당/신체 영위당(삼신녀 신상)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 동내마을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기 위해 지내는 마을 제사.

[개설]

군내리 동내 당제는 해마다 음력 섣달 그믐날 오후 6시경에 마을 옆 본산 정상에 있는 당집에서 지내는 마을 공동의 제의이다. 당제를 모실 때 들어가는 비용은 20만 원인데, 군내리에 속해 있는 중앙, 동내, 남외, 서외마을 공동의 동계인 ‘대동회’에서 자금지원을 받는다. 이 중에서 제물 장만에 6~7만원이 쓰이고, 나머지는 제장과 그 주변을 청소하는 비용이다. 제장과 주변의 청소는 3~4일 전에 일꾼을 사서 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동수(마을의 연장자)와 마을 임원들이 하기도 한다.

당제에서 가장 중요한 제물은 명태이다. 이밖에 굴비, 돼지고기, 과일, 나물 등을 제물로 올린다. 제물로 올릴 음식 장만은 전에는 당제주집에서 했고 지금은 이장집에서 하는데, 고춧가루는 여전히 쓰지 않는다. 그리고 당제에 올릴 제물과 집안 선영에 올릴 제물은 엄격하게 구분하여 보관한다.

이 마을에는 여자의 달거리와 관련된 영험담이 전하고 있다. 20여 년 전에 당제주를 맡은 집의 여자가 달거리를 했는데, 제를 모신 다음에 원인 모를 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래서 여수시 덕충동에 있는 점쟁이를 찾아갔더니 당제를 잘못 모셔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여 다시 정성을 들여 당제를 모셨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한다.

[연원 및 변천]

군내리 동내 당제의 유래는 구체적으로 전해지지 않지만, 마을 사람들은 옛날부터 모셔왔기 때문에 지금도 모시고 있다고 한다. 제의 날짜는 지금까지 바뀐 적이 없으나 제사를 모시는 시간과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은 마을의 사정에 따라 변하고 있다. 제의 시간은 현재 오후 6시경에 모시고 있다.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은 50여 년 전까지는 단골이었고 10여 년 전까지는 ‘당제주’였는데, 현재는 마을 이장과 개발위원장이 맡고 있다.

또한 30여 년 전까지는 마을 뒤쪽 ‘화약고’라는 골짜기에 있는 나무에게 간단하게 인사를 올리고 헌식을 했는데 지금은 전승이 끊겼다. 이장과 개발위원장이 제의를 주관하면서부터는 당제주를 선정하지 않지만, 10여 년 전까지는 양력 12월말에 열리는 마을총회를 통해 깨끗한 사람으로 당제주를 선정했다. 당제주를 선정할 때는 달거리를 하는 여자가 있거나 산고가 들었거나 초상이 난 집을 제외했으며, 주로 아이가 없거나 식구가 적은 집 중에서 당제주를 선정했다. 당제주는 제일 5일 전에 당제 준비에 들어갔으며, 당제와 관련된 모든 것을 당제주가 맡아서 했다.

단골이 있었을 때는 단골이 시키는 대로 당제주가 제수장만을 하고, 제물을 운반하고, 제장에 모닥불을 피우고, 진설을 했다. 그리고 제의가 끝나면 남은 제물을 모두 싸서 단골집에 가져다주었다. 단골이 떠난 뒤에는 당제주가 당제를 주관했다. 제물을 장만하여 가족과 함께 제당에 올라가 제사를 모시는 것은 물론이고, 본산 깨끗한 곳에서 황토[일명 지덕]를 퍼와 대문 양쪽에 놓고, 금줄을 치고, 제를 모실 때 불 피울 나무를 미리 마련해 제장에 쌓아 두어야 했다. 또한 당제주는 제주를 빚어야 했는데, 제를 모시기 열흘 전에 마을에서 나락 두 가마니를 가져다주면 방아를 찧고 가장 먼저 제주부터 담갔다.

제일 5일 전에 금줄을 치면 당제주의 바깥출입이 금지되기 때문에 장은 총무[일명 정곡]가 여수에 나가 봐다 줬다. 또한 제주가 담배를 피우면 마을에서 담배를 사다 넣어주기도 했다. 당제주는 부부간의 합방도 금지되었다. 제를 모신 다음에도 3일 동안 금기가 이어졌다. 정월 초사흗날 동수, 개발위원장, 이장 등을 집으로 초청하여 당제를 잘 모셨다는 이야기를 한 다음부터 금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전에는 제를 모실 시간이 되면 마을 사람들도 집밖에 나가지 않았다.

대동회에서 제사비용을 지원받기 전에는 동산인 본산에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나락 두 가마니를 팔아 당제주에게 주었다. 이와 함께 당제주는 본산에서 나무를 하여 땔감으로 쓸 수 있는 권리를 갖기도 했는데, 반드시 동수장이 지정해준 구역 내에서만 나무를 해야 했다. 또한 당제주에 선정되면 마을 공동작업인 부역[일명 울력]에서 제외되는 특권을 누렸고, 당제를 잘 모시면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서로 당제주를 맡으려 했던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신당/신체의 형태]

제장은 마을 옆 ‘본산’ 정상에 있는 당집으로, 높다란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는 당집에는 ‘영위당(靈位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당집을 ‘영위당’이라 부르지 않고 주로 ‘본산제당’이라고 부르며, ‘삼신당’, ‘성황당’ 등으로도 부른다. 당집 안에는 세 개의 여신상과 성황당 위패 등이 모셔져 있는데, 제의의 대상이 되는 신격은 ‘삼신녀’이다.

[절차]

오후 6시경에 이장집에서 장만한 제물을 동수, 개발위원장, 이장 등 임원들이 가지고 본산의 제당에 올라가 문을 열어놓고 촛불을 켠다. 그 다음 명태, 과일, 나물 등의 제물을 진설한다. 진설이 끝나면 술을 올리고 절을 한 다음에 제당 담장 밖에 있는 돌 옆에 음식을 묻으면 제의 절차가 모두 끝난다. 제의가 끝나면 간단하게 음복을 하고, 나머지 음식을 마을회관으로 가지고 와서 마을 사람들과 나눠 먹는다.

단골이 있어 제를 주관했을 때는 인적이 끊긴 밤늦은 시간에 호롱불을 켜 들고 본산제당에 올라갔다. 제당에는 단골과 당제주 가족만 올라갔는데, 당제주는 제물을 바지게에 싣고 짊어지고 올라갔다. 제당에 도착하면 먼저 모닥불[일명 나뭇불]을 피우고 사기접시에 참종이를 비벼 세워 불을 밝혔다. 그런 다음 단골의 지시에 따라 진설을 하고 나면, 단골이 “동도칠성님네, 서도칠성님네, 남도칠성님데, 북도칠성님네”로 시작되는 독경을 하면서 제신들을 불러들이고 굿을 시작했다.

그 이후의 모든 제의 과정은 단골이 맡아서 했다. 당제주는 단골이 굿을 하는 동안 내내 나뭇불을 피웠는데, 아무 나무나 쓰지 않고 연기가 나지 않는 깨끗한 참나무만 썼다고 한다. 그리고 제가 끝나면 제물을 싸서 단골집에 가져다주고, 다음날인 설날 새벽 상주들이 성묘를 가기 전에 참종이로 밝혀놓은 불을 끄기 위해 다시 제당에 올라갔다.

단골이 떠난 뒤로는 당제주 가족들만 제당에 올라갔다. 삼신녀 앞에 제물을 진설하고 세 분의 삼신녀에게 각각 메를 올리고, 제당 담장 안쪽에 있는 돌과 담장 밖에 있는 돌에도 메를 올렸다. 그리고 삼신녀 앞에 놓여 있는 항아리에 쌀을 한 움큼씩 넣고 창호지를 덮어 묶어 놓았다. 참종이로 불을 밝히고 새벽에 올라가 불을 끈 것도 당제주를 선정했을 때까지는 전승되었다. 지금은 메를 올리지 않고 항아리에 쌀을 넣지도 않는다. 또한 참종이로 불을 밝히는 대신 촛불을 밝히며, 제가 끝나면 곧바로 촛불을 끄고 내려온다.

[부대행사]

20여 년 전까지는 정월 초하룻날부터 매구[일명 정당]를 쳤는데, 가장 먼저 본산제당에 올라가 인사를 올린 다음 마을을 돌면서 매구를 쳤다. 군내리 4개 마을 모두 굿패가 있어 매구를 치면 아주 떠들썩했다. 정월 초하룻날에는 부둣가에서 도지굿을 했으며, 정월 초엿샛날에는 4개 마을 굿패가 함께 매구를 치면서 남외마을 앞 부둣가로 나가 제물을 차려놓고 “잡귀잡신 다 데려 가십시오”라고 빌면서 헌식제를 올리기도 했다.

[현황]

군내리 동내 당제는 인근 마을의 당제가 빠른 속도로 중단되어 가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전승을 낙관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아직은 마을의 안녕을 위해 막걸리 한 잔을 제물로 올리더라도 없애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주민이 많아 형식적으로나마 유지되고 있다.

[참고문헌]
  • 인터뷰(군내리 동내마을 주민, 정창기, 남, 76세, 2007. 4. 27)
  • 인터뷰(군내리 동내마을 개발위원장, 김광웅, 남, 67세, 2007.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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