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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두리 원봉두·백수동 당산제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02252
한자 鳳頭里原鳳頭-洞堂山祭
영어의미역 Village-Ritual Ceremony of Wonbongdu and Baeksudong Village, Bongdu-ri
분야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유형 의례/제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봉두리
집필자 나경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간신앙|마을신앙
의례시기/일시 음력 섣달 그믐날 자정
의례장소 마을회관 뒤 느티나무 앞
신당/신체 당산나무(느티나무)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봉두리 원봉두마을백수동마을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지내는 마을 제사.

[개설]

봉두리 원봉두·백수동 당산제는 매년 섣달 그믐날 모시는 마을 제사이다. 제관은 깨끗하고 착실한 사람으로 매년 3명을 정한다. 제관은 주로 제를 지내기 10여 일 전에 마을회의에서 결정한다. 그러나 요즘에는 제관을 선정하는데 어려움이 있어 노인회원들을 대상으로 일정한 순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제관을 맡아 하고 있다. 제사 비용은 마을 사람들이 조금씩 돈을 모아 조성한 마을 공동자금으로 충당하는데 예전부터 당산제를 지내기 위해 따로 돈을 걷거나 하지는 않았다.

[연원 및 변천]

당산제를 언제부터 모시게 되었는지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으나, 매년 섣달 그믐날 자정 경에 제를 지내고 있다. 그간 당산제 지내는 것을 중단하거나 거른 적은 없으며, 제일 또한 변동된 적이 없다.

[신당/신체의 형태]

제장은 마을회관 뒤쪽에 있는 느티나무이다. 주민들은 이를 당산나무라고 부르며, 현재 이 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수령 250년에 수고 16m로 기록되어 있다. 예전부터 제장은 여기 한 곳이었으며, 제장이 변동되지는 않았다. 당산나무의 신격에 대하여 주민들은 목신에게 제를 지내는 것이라고 하며, 혹은 나무귀신이라고도 한다.

[절차]

제를 지내는 당일에 제관들이 제물을 장만하고, 제를 지낼 준비를 하기 때문에 제관 이외의 사람들은 마을회관 출입을 삼간다. 제관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사흘간 금기를 지킨다. 제를 지내기 전 사흘간 초상집이나 산고가 든 집을 가지 않고, 제사 음식이나 개고기도 먹지 않는 등 조심을 한다. 제를 지낸 후에도 사흘 간 집밖의 출입을 금하고 조심한다.

제물이 준비되면 제관들은 마을회관에서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며 기다린다. 제관들은 각자의 집에서 깨끗한 옷을 입고 오며, 자정이 되기 전에 미리 제장으로 제물을 운반하고 제물을 진설한다. 제물로 올리는 것은 사과, 배, 대추, 밤 등의 과일과 나물, 포, 돼지머리 등이며 메와 국은 각각 세 그릇씩 올린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내외를 위한 것과 잡신들을 위한 밥을 한 그릇 더 놓는 것이다. 제물을 담는 제기는 마을회관에 별도로 마련되어 있는 것을 사용한다. 제를 지내면서는 굿을 치지 않으며, 제를 지내는 데는 제관들만 참석할 수 있다.

제물의 진설이 끝나고 자정 무렵이 되면 제를 지내는데, 유교식 제차를 따른다. 제관 세 명이 각각 초헌, 아헌, 종헌을 하고, 집사가 축문을 읽는다. 다음으로 축문을 소지하는데, 특별히 백지를 소지하지는 않는다. 제물로 올렸던 음식을 땅에 묻거나 뿌리지 않고, 음복을 한 후 남은 음식은 마을회관으로 가지고 돌아간다. 마을회관에서 사람들은 이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으며, 그 중 일부를 조금씩 남겨 둔다. 이는 사흘 후 당산나무 앞에서 인사를 드릴 때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사흘 후에는 당산에 가서 간단하게 음식을 차려 놓고 굿을 치며 인사를 드린다. 이때 금줄을 걷어 낸다.

[축문]

축문은 예전부터 정해진 내용이 있어 일진과 제관의 성명만 바꾸어 쓴다.

[부대행사]

봉두리 원봉두·백수동 당산제를 지낸 다음 사흘 후 굿을 치면서 당산에게 인사를 드리고는 그날 하루 굿을 치고 논다. 굿을 칠 때는 꽹과리, 징, 장구, 북 등의 사물을 사용하며, 이 농악기는 평소 마을회관에 보관하던 것이다. 굿을 치는데 보통 15명 정도가 함께 하며, 마을회관 앞에서 판을 벌인다. 예전에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굿을 쳐 주면서 액을 몰아내 주는 마당밟기를 하였는데, 이는 1980년대 말부터 중단되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 인터뷰(봉두리 주민 방중균, 남, 72세, 2007. 6. 10)
  • 인터뷰(봉두리 주민 김병태, 남, 80세, 2007.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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