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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1596
한자 安亭里山內堂山祭
이칭/별칭 당산제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의례/제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안정리
집필자 한미옥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중단 시기/일시 1936년 - 안정리 산내 당산제 중단
재개 시기/일시 1937년 - 안정리 산내 당산제 재개
중단 시기/일시 1950년 - 안정리 산내 당산제 중단
재개 시기/일시 1954년 - 안정리 산내 당산제 재개
성격 민간 신앙|마을 신앙|마을 제사
의례 시기/일시 음력 1월 14일 자시
신당/신체 조탑|당산나무 2기|당산 할아버지|산제당|철륭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안정리 산내 마을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지내는 마을 제사.

[개설]

안정리 산내 당산제는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흗날 밤 12시에 마을 중앙에 있는 당산을 비롯하여 모두 세 곳에서 마을의 무병과 풍년을 기원하며 마을 공동으로 지내는 제사이다. 이를 그냥 ‘당산제’라고도 한다. 산내 마을의 본래 이름은 ‘산안’으로, 마을의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그렇게 불렸다고 하며, 이후 행정 구역 명칭 변경으로 ‘산내(山內)’가 되었다.

[연원 및 변천]

안정리 산내 당산제에 대한 역사는 기록이 없어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마을이 성촌했을 당시부터 당산제를 지냈을 것이라고 한다. 2001년 마을 회관 준공 기념비의 기록을 보면, “[마을의] 동[쪽] 계곡에 자리 잡고 있는 만일사(萬日寺)에서 무학 대사가 만일 기도 정진 시 이성계 장군이 찾아왔다는 설이 있는 바, 마을의 역사가 700년이 넘는다고 추측되나 확인할 수는 없고, 병자호란 시 밀양 박씨 도걸(到杰) 선생께서 이곳에 피란하여 정착한 이후로 마을이 형성되어 오늘에 이르렀으니 4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음을 볼 때, 산내 마을 당산제는 대략 4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후 1936년에 당산나무에 불이 나서 당산제를 중단하였는데, 그해와 그 다음 해에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자꾸 일어나서 다시 제를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6·25 전쟁 이후 3년 동안 마을에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제를 모시지 못하였다. 이렇게 안정리 산내 당산제는 역사적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서 몇 번의 부침이 있었지만 여전히 그 맥을 이어 가고 있다. 그러나 마을의 인구가 점점 줄어들고, 고령화되고 있어 언제까지 당산제를 지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신당/신체의 형태]

안정리 산내 당산제를 모시는 제당은 2013년 현재 모두 세 군데이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당산과 마을 뒷산 언덕배기에 위치하고 있는 당산나무와 터, 그리고 마을 오른편의 위쪽에 있는 당산나무가 그것이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당산이 ‘큰당산’으로 신격(神格)은 ‘당산 할아버지’인데, 1936년의 화재로 당산나무는 불타 없어졌으므로 현재는 그 대신에 돌로 조탑을 쌓아 모시고 있다. 마을 뒷산의 조그마한 당산나무가 있는 제사 터를 ‘산지당[산제당(山祭堂)]’이라고 부르며, 마을 오른편의 위쪽에 위치하고 있는 당산나무를 ‘철륭’이라 부르고 있다. 산제당의 당산나무, 그리고 마을 오른편 산자락에 위치한 철륭의 당산나무의 수종은 모두 느티나무이다.

[절차]

1. 제관 선정, 제비(祭費), 제물, 금줄과 황토

당산제를 위한 제관과 화주는 제사 당일 선출하며, 제관이 축관을 겸한다. 제관과 화주는 유고가 없고 깨끗한 사람이 맡는데, 과거에는 선출해서 뽑았지만 지금은 매년 두 명씩 돌아가면서 의무적으로 맡아서 하며, 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예외가 될 수 없다고 한다. 제관과 화주들은 과거에는 제를 모시기 일주일 전부터 목욕재계하고 깨끗한 옷을 입어 정결을 유지해야 하는 등 행동에 제약이 많았지만, 현재는 당일 제사로 끝나기 때문에 당일 금기만 지키면 된다고 한다.

제비는 마을에서 ‘공사’를 해서 그해 들어갈 제사 비용을 정한다. 그에 따라 호구전으로 걷는데, 대략 가구당 1만 원씩 추렴한다. 물론 교회를 다니는 집에서도 제비는 내놓으며, 단지 제사에만 참여하지 않는다.

제물 준비를 위해 임실군 강진면의 갈담장이나 순창장에 나가 장을 본다. 화주는 새벽부터 목욕재계를 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장에 가며, 장에 다녀와서 음식 장만을 할 때도 다시 옷을 갈아입는다. 제물로는 조기와 명태, 북어 등의 생선과 탕국[명태, 홍합, 새우], 시금치, 콩나물, 도라지, 고사리 등의 나물, 두부, 메밀묵과 밤, 사과, 배, 귤, 곶감, 닭, 꼬막, 돼지머리 등을 올린다. 제물을 살 때는 값을 깎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상인이 달라는 대로 값을 치러야 하고, 물건은 반듯하고 예쁜 것만 사야 한다.

제물은 금줄을 쳐 놓은 마을 회관에서 화주를 비롯하여 깨끗한 여자들이 목욕재계하고 만든다. 음식을 만드는 동안 서로 말을 하거나 간을 봐서는 안 된다. 현재는 당일 장을 봐서 제물을 장만하지만, 과거에는 제주(祭酒)를 직접 담가서 올렸기 때문에 일주일 정도 정성을 들여야만 했다. 또한 술을 담그면서 화주 집에 금줄을 치기 때문에 그때부터 다른 사람들은 화주 집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술을 담글 때 쓸 우물 주위까지도 금줄을 쳐서 정성을 들였다고 한다.

금줄은 제사 일주일 전에 화주와 제관 그리고 당산나무에 치고, 금토[황토] 또한 같은 곳에 깔아 놓는다. 과거에는 우물에도 금줄을 쳤지만 현재는 수돗물로 하므로 그곳에는 금줄을 치지 않는다.

2. 제의 진행

안정리 산내 당산제는 오후 6시가 넘어가면서 본격적으로 모셔진다. 제물이 모두 마무리되면 화주가 제관 집으로 가서 알리고, 제관은 비로소 나와서 제사를 모시기 시작한다. 제일 먼저 마을 뒷산에 있는 ‘산지당’에서 제를 모신다. 제상에는 미역자반 1조각, 마른 북어포, 메밀묵, 밤, 대추, 곶감, 과자, 귤, 사과, 배, 백설기[시루 째 올림], 술[소주] 등이 올라간다. 산제당의 제물이 비교적 간단한 것은 산제당의 산신님이 비린 것을 먹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며, 본래부터 삼색실과만 올리고 메는 올리지 않는다고 한다. 제사는 ‘강신→ 재배→ 초헌→ 재배→ 소지 올리기→ 음복’ 등의 순으로 간단히 모신다. 음복한 후에는 제물을 조금씩 뜯어서 주변에 던지는 고시래[고수레]를 한다.

산제당에서의 제사를 마치고 다시 마을 회관으로 가서 제물을 챙긴 뒤에 ‘철륭’으로 간다. 철륭에서의 제물은 팥 시루떡과 메 두 그릇[할아버지, 할머니], 미역국, 김과 명태포 전, 미역자반, 곶감, 대추, 밤, 탕[새우, 홍합, 명태의 삼탕], 닭, 두부 전, 메밀묵, 조기, 삶은 돼지고기, 껍질 벗긴 찐 달걀, 사과, 귤, 배, 꼬막, 도라지, 고사리, 시금치, 콩나물, 무나물, 과자 등이다. 철륭에서의 제사 순서도 역시 유교식 제차에 따르며, 산제당보다는 좀 더 격식을 갖춰서 초헌, 아헌, 종헌, 음복, 헌식을 모두 한다.

철륭에서의 제가 끝나면 다시 마을 회관으로 가서 제물을 챙겨 큰당산으로 간다. 제물로는 메 두 그릇과 닭국, 돼지머리, 메밀묵, 삶은 닭, 북어포, 꼬막, 과자, 명태포 전, 두부 전, 나물 다섯 가지, 조기, 돼지고기 탕감, 삶은 계란, 사과, 배, 귤, 대추, 밤, 미역자반, 김, 팥 시루떡[시루 째] 등이 올라간다. 제사는 유교식 제의 절차를 그대로 따르며, 제가 진행되는 동안 옆에서 화주 부인들과 제관 부인이 “할아버지, 당산 할아버지 동네 사람들 건강하게 해 주시고, 아무 탈 없이 되게 해 주시고, 농사도 잘되게 해 주시고, 젊은 청년들 탈 없이 해 주시고…….”라는 말로 비손을 한다.

큰당산에서의 제를 마지막으로 안정리 산내 당산제는 끝이 난다. 본래 산내 마을에서는 당산제를 모실 때 산제당과 철륭에는 굿[농악]을 치지 않고 큰당산에서만 굿을 쳤다고 한다. 그러나 십여 년 사이에 마을에서 농악을 칠 사람들이 없어서 지금은 치지 않는다.

[축문]

과거에는 마을에 유식한 분이 계셔서 축을 읽고 썼지만, 그분이 돌아가신 후에는 축문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2005년 이후 안정리 산내 당산제에서는 축문을 읽지 않으며, 2013년 현재 보관하고 있는 축문도 없다.

[부대 행사]

마을 가운데 있는 ‘큰당산’에서의 제의까지 마치면 안정리 산내 당산제는 공식적으로 끝이 난다. 이후 마을 주민들이 모두 마을 회관에 모여 함께 음식을 먹는다.

[현황]

안정리 산내 당산제는 2015년 현재에도 미약하지만 단절되지 않고 전승되고 있다. 그러나 워낙 마을에 인구가 적고, 그나마도 고령이어서 언제까지 당산제가 지속될지는 알 수 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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