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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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歷史 |
영어의미역 | Histor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
집필자 | 정동락 |
[정의]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경상북도 고령군의 역사.
[개설]
고령이라는 지명은 통일신라시대 757년(경덕왕 16)에 대가야군(大加耶郡)을 고령군(高靈郡)으로 개칭할 때에 처음 등장한다. 조선시대 1413년(태종 13) 고령현(高靈縣)에 현감이 내려와 다스리기 시작하였고, 1895년(고종 32) 지방 관제를 개정하면서 경상도 고령현을 고령군으로 개칭하였다. 1896년 경상북도 고령군으로 되었으며, 1979년 고령면이 고령읍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현재 1읍 7면].
고령군은 경상북도의 남서부에 위치하고 있다. 행정 구역상 동쪽 끝은 다산면 호촌리의 낙동강 사문진나루터로 달성군과 경계를 이루며, 서쪽 끝은 쌍림면 산주리 매화재로 합천군 야로면과 접해 있다. 남쪽 끝은 우곡면 객기리에 있는 낙동강의 객기나루터로 경상남도 합천군과, 북쪽 끝은 다산면 노곡리로 성주군 용암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선사시대]
고령 지역은 다산면 곽촌리와 상곡리 일대, 개진면 구곡리와 반운리 등지에서 확인된 구석기시대 유적을 통해 이 시기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아직까지 신석기시대 유적은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낙동강을 비롯한 회천·대가천·안림천 등의 하천 유역에 형성된 충적 평야와 구릉에서 유적들이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청동기시대의 유적인 고령 장기리 암각화와 고령 안화리 암각화 등을 비롯한 암각화와 무문토기산포지·고인돌·입석 등은 대가천과 회천, 안림천, 용소천, 낙동강 변 등 고령 일대의 거의 모든 수계에서 확인된다.
[삼한시대]
삼한시대의 고령은 변한(弁韓)에 속하였다. 이 시기 고령 지역에 존재했던 소국(小國)은 종래에는 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이라고 보아 왔으나 근래에는 반로국(半路國)으로 보는 학자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소국의 중심지는 개진면의 반운리·양전리 일대로 추정하고 있다. 이 시기의 유적으로는 반운리 와질토기 유적이 있다.
[대가야시대]
삼한시대의 소국인 반로국이 성장하면서 주변 세력을 병합하여 대가야로 발전하게 되었다. 대가야는 4세기 대 이래 발전 과정을 거쳐 5세기 대 이후가 되면 가야 여러 지역을 대표하는 국가가 된다. 즉, 가야 사회는 5세기를 전후하여 전기에는 김해의 금관가야가, 후기에는 대가야가 중심 국가로서 역할을 하였다.
특히, 대가야는 5세기 이후 크게 발전하여 5세기 중엽인 479년 중국의 남제(南齊)에 사신을 파견하여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이란 작호를 제수 받았다. 전성기 때 대가야의 영역권은 고령 지역을 중심으로 합천·거창·함양·산청 등 영남 지역은 물론, 남원·장수·진안·임실·구례·순천 등 호남 지역이 포함되어 영역 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추어 나가고 있었다.
대가야 토기에 ‘대왕(大王)’ 또는 ‘하부사리리(下部思利利)’란 글씨가 새겨진 것이 있는데, 이는 왕도인 고령에 있는 대왕이 하부라는 지방을 다스리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대가야는 522년(법흥왕 9)에는 이뇌왕(異腦王)이 신라의 이찬(伊湌) 비조부(比助夫)의 누이와 혼인하여 결혼 동맹 관계를 체결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라의 영토 확장 과정에서 562년(진흥왕 23) 9월 이사부(異斯夫)와 사다함(斯多含)이 이끄는 신라군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고 말았다.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 이후 고령 지역은 대가야군(大加耶郡)으로 편제되었다. 통일신라의 9주 5소경 제도 아래에서는 청주(菁州)[후에 강주로 개명]에 속하여 적화현(赤火縣)[후에 야로현으로 개명]과 가시혜현(加尸兮縣)[후에 신복현으로 개명] 등을 영현으로 거느렸고, 757년(경덕왕 16)에는 고령군(高靈郡)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후삼국시대에는 신라와 후백제와의 접경 지역으로 군사·교통의 요충 지역으로 인식되었다. 그로 인해 고령은 고양대도호부(高陽大都護府) 또는 영주목관(靈州牧官)으로 불렸다고 한다.
[고려시대]
940년(태조 23) 태조 왕건(王建)[877~943]에 의해 전국 군현에 대한 새로운 통치 조직이 구축되면서 고령군은 경산부(京山府)[성주]의 속현(屬縣)이 되었고, 야로현과 신복현이 떨어져 나가 세력이 약화되었다. 그 후 1175년(명종 5) 감무(監務)가 파견되면서 행정 단위로서의 지위가 높아졌다. 고령은 낙동강의 수운을 통해 바다와 연결되고 있는 까닭에 고려 말에는 왜구들이 출몰하여 박위(朴葳)에 의해 격멸된 적도 있었다. 한편, 1376년(우왕 2)에는 고령 지역에 큰 기근이 들어 굶어 죽는 자가 속출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
조선 건국 이후 8도(八道) 체제가 확립되고 집권화가 추진되는 과정에서 1413년(태종 13) 고령에도 감무 대신 현감(縣監)이 파견되었다. 재지사족(在地士族)들의 중앙 정계 진출이 활발해지는 가운데, 이곳 출신의 박(朴)·신(申)·유(兪)씨 등도 중앙으로 진출하여 명문으로 성장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령은 의병 활동의 주요 근거지가 되었다. 특히, 고령 출신의 의병장 송암(松庵) 김면(金沔)은 의병을 모집하여 우지(牛旨)·지례(知禮)·고령 등지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 또 정유재란 때에는 박정완(朴挺琬)이 고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상주목사 정기룡(鄭起龍)[1562~1622]과 함께 고령 용담천(龍潭川)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1615년(광해군 7)에는 성주에서 강상죄(綱常罪)가 발생하자 도리어 성주를 거느리기도 하였으나, 1617년(광해군 9)에 곧 환원되었다. 이후 고령현으로 한말까지 유지되었다.
[근·현대]
1895년(고종 32) 전국적인 지방 제도 개편으로 고령은 군으로 승격하여 대구부(大邱府)에 속하게 되었고, 이듬해인 1896년 13도제 실시에 따라 경상북도 고령군이 되었다. 또한 1905년 행정 구역을 조정하면서 인곡·덕곡·노다·다산 등 4개 면이 성주군으로부터 고령으로 편입되어 행정 구역이 다소 넓어졌다. 한말에 전국적으로 애국 계몽 운동이 전개되자 고령군에서도 유지들에 의해 1906년 영신학교(靈信學校)가 설립되어 민족자존 의식을 고취하였다.
1919년의 3·1운동에서는 덕곡면·우곡면 등지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났으며, 그 직후 영남 유림이 주축이 되어 일어났던 이른바 파리장서사건에도 고령의 유림들이 다수 가담하였다. 또 1920년대부터 청년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고령청년회를 비롯한 7개 단체가 성립되어 야학·강습회 등을 개최하면서 민족 실력 양성 운동에 참여하였다. 해방 직후의 혼란기에는 1946년 대구의 10월 항쟁의 영향이 미쳤으며, 1950년 6·25전쟁 시에는 북한군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다. 1979년에는 고령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1읍 7면의 행정 구역을 갖추었고, 2015년 4월 고령읍이 대가야읍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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