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00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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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倭寇侵入 |
영어의미역 | Japanese Invasi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
시대 | 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김병호 |
성격 | 왜구 침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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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연도/일시 | 1200년대(고종 대) |
종결연도/일시 | 1587년(선조 20) |
관련인물/단체 | 이대원 |
[정의]
13~16세기에 걸쳐 일본의 해적 집단이 여수 지역을 수시로 침입하여 인명을 해치고 재산을 약탈한 사건.
[개설]
왜구는 일본의 해적집단으로 일본 중세기의 혼란기에 중앙 통치력이 지방에 미치지 못할 때 가까이는 한국, 멀리는 중국 연안까지 침입하여 큰 해를 주었다. 이 해적들은 주로 서부 일본의 연해민으로서 생활필수품인 쌀 등을 구하기가 어려워 해적활동을 하였다.
[경과]
우리나라에 왜구의 침입이 심해진 때는 13세기 고려 고종 때부터였다. 고려 말인 충정왕, 공민왕, 우왕에 이르는 사이에 더욱 극심해졌다. 왜구는 고려 전역을 침범했으나 특히 일본에 가까운 남해안 지역에 침입이 많았다. 전라남도 지역의 왜구 침입 상황 중에서 여수가 속한 순천이 7회의 침입을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여수는 전라남도 지역에서 왜구의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곳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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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순천부[여수] 지역에 침입한 왜구의 규모가 충정왕 2년(1350) 4월 100여 척, 5월 66척으로 되어 있다. 70~100척 내외의 배로 침구했다면, 규모가 결코 작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여수 지역은 남해안 방위의 요충지가 되어 많은 진포가 설치되는 군사 지역이 되었다. 특히, 공민왕 때 유탁(柳濯)이 장생포에서, 정지(鄭地)가 관음포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치는 전과를 올려 「장생포곡(長生浦曲)」이라는 전승가가 불리게 되었다. 이처럼 여수에 침입한 왜구의 규모가 크고, 그 침입이 잦았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지역에 비해 인명 살상과 재화 및 문화재의 피해가 더 많았음을 의미한다.
조선은 태종과 세종 양 대에 걸쳐 국방력의 확충과 새로운 무기 체제 정비 그리고 수군의 전력 강화에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인 결과 북으로 4군 6진을 개척하고 남으로는 대마도를 정벌하여 왜구의 침입을 근절 시킬 수 있었다. 여수 지역에는 1423년 내례만호진이 설치되었다가, 1479년(성종 10)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이 설치됨으로써 전라남도 동남부의 해안 방비를 총괄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속적인 평화와 국제 정세의 혼란으로 국방력이 허술해졌으며, 북으로는 여진이 강성해지고 남해안으로는 왜구들이 대규모로 쳐들어와 을묘왜변 등을 일으켜 임진왜란의 발발을 예고하였다.
특히 을묘왜변 후 전라도 일대에 왜구의 침입이 계속되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년 전인 1587년(선조 20) 2월 10일 일단의 왜구가 흥양현 일대에 침입하자 당시 녹도 만호 이대원(李大源) 장군이 이를 격파하였다. 그리고 1주일 후인 2월 17일 대규모의 왜구가 재침하였을 때에도 이대원 장군은 여수의 손죽도까지 추격하여 전투를 벌였으나 전라좌수영과의 협력이 원할히 이루어 지지 않고 기상 상태가 아군에 불리하여 결국 패하고 말았다. 특히 이 전투에서 패하게 된 것은 당시 전라좌수사였던 심암(沈巖)이 먼저 있었던 전투에서 이대원 장군의 전공을 시기하여 손죽도 전투에서 아군이 수적으로 절대적인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구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왜구가 전라도 내륙지역으로 더 이상 진출하지 않아 그 피해가 소규모로 끝났으나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불과 5년 전에 발생한 손죽도 전투는 당시 조선 국방 실태의 허술함과 일본의 조선 침략 야욕을 드러낸 사건이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