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16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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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掘江 |
영어음역 | Gulgang |
영어의미역 | Gulgang Stream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시전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정훈 |
[정의]
조선시대 선박의 수리, 정박 등을 목적으로 세운 군사 시설.
[개설]
굴강(掘江)은 조선시대 선박의 수리·보수, 군사 물자의 하역, 특수 목적 선박 등의 정박을 목적으로 세운 중요한 군사 시설로, 방파제와 선착장의 역할을 함께 수행하였다. 굴강은 선박을 대피하기 위해 만든 구조물이 작은 만(灣)처럼 굽어 있는 데서 유래한 명칭으로 추측된다. 여수 지역에는 진남관 앞(水塲), 시전동, 방답진 세 곳에 굴항(굴강)이 있었다.
[좌수영 수장(水塲)]
진남관 앞 망해루 밖의 해변에 위치했던 본영 선소의 일부시설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시가지 조성을 위한 매립으로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호좌수영지』에 “전선은 본판 길이가 주척(周尺) 70자 판옥전선 1척, 60자 1척, 41자의 귀선(龜船) 2척, 33자의 병선(兵船) 1척, 34자의 병선(兵船) 겸 방패선 1척 있었다. 본판길이가 주척 19자인 사후선 8척, 7파(把) 반의 해골선(海鶻船) 1척, 50자의 전선(戰船) 6척, 향곡선(餉穀船) 4척, 방군선(防軍船) 1척 등 총 26척의 전선이 있었다.”고 쓰여있다. 『여수동사』에는 “수장의 길이는 1,200자, 높이가 7자 되는 규모라고 하였다.” 위의 전선수와 본영선소로서 관할 5포의 전선들이 수시로 들어오는 것까지 감안하면 그 규모가 상당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시전동 굴항(굴강)]
여수선소유적 내의 굴강(굴항)이다. 시전동 굴강(굴항)은 천연적인 해안 요새를 택해 만든 인공호이다. 면적 1,338㎡, 직경 42m 내외의 타원형이다. 깊이는 석축 상면에서 5~6m 정도로 추정된다. 굴강 북쪽 입구는 폭이 약 9m이고 둘레에 쌓았던 석축은 대부분 유실되었다. 굴강 내부의 한 곳과 입구 동서 양쪽에 노출된 하부에 남아 있는 석축은 굴강 석축의 바닥 부분에 해당하는 것이며, 그 높이는 1m 정도이다.
석축에 쓰인 석재는 대개 40~50㎝의 자연석과 깬돌[割石]을 사용하였다. 쌓는 방법은 자연석을 막쌓기로 하고 뒤채움은 특별히 보강한 흔적이 없으며, 석축 후 남은 돌과 흙을 같이 채운 것으로 추측된다. 굴강 내부 석축은 굴강 중심을 향해 약 50~60도의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바닥에 가까워질수록 경사가 완만한 반면, 입구와 가까워질수록 경사가 급하다. 현재 남아있는 굴항은 1989년 제2차 선소 굴강 복원 공사 때 복원된 모습이다.
1980년 해군사관학교와 1985년 명지대학교에서 발굴조사 한 결과, 시전동 굴강(굴항)에서는 철촉 20점, 철정 54점, 철환 3점, 철편 15점, 동선 7점, 치아 2점, 벼루 5점, 평와편 14점, 기타 54점 등 총 565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집수구와 단조로도 발견되었는데 집수구의 남쪽면은 자연암반층이다. 북쪽면은 인공의 흔적이 보이고 암반의 중심 부분에는 원래 암반층 내에 있었던 직경 10~20㎝의 자각돌이 여러 개 빠져 있다. 암반 웅덩이에서 물이 솟아 나오므로 수조로는 아주 적합하다. 단조과정에서는 철기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열을 급격히 낮춰야 하므로 지속적으로 물이 공급되어야 한다. 단야로가 이곳에 위치하는 것은 그러한 점이 고려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여수선소유적은 1872년 지방도 순천부의 여천선소유적[현 여수선소유적]의 지도에서 자세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전선 2척과, 선소창(船所倉), 수군기(水軍器), 모군창(募軍倉)등의 명칭이 표기되어 있다. 여기에서 정확한 명칭이 확인되어 선소 관련 연구에 중요한 사료가 된다.
시전동 굴강 서남 방향으로 20m 부근에는 세검정(洗劍亭)과 군기고, 풀뭇간이 복원되어 있고 계선주(繫船柱)와 벅수가 있다.
2009년 여수시의 “천선소유적[현 여수선소유적] 복원 종합 정비계획” 의해 현재는 토지 매입을 완료해 거주민들은 이주하였다. 주변의 민가들은 철거되고 임시 주차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방답진 굴강(굴항)]
돌산읍 군내리 980번지와 987번지 일대이다. 여수시 돌산읍 방답진 서문 터 밖으로 조그마한 만이 있어 적의 침입으로부터 전선을 보호하거나 즉시 출동시킬 수 있도록 인공적으로 깊게 판 굴항이 있다. 방답진에는 『호남읍지(湖南邑誌)』에 의하면 전선 2척, 병선 2척, 협선 4척 등 전선 8척과 군관 50명, 기패관 25명, 진무 45명, 지인 25명, 군노 25명, 기수 50명, 사령 25명, 사생 50명, 화포장 22명, 포수 68명, 사공이병 18명, 승노군 302명 등 수군 장졸 705명이 배치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방답진선소는 ‘전라좌도순천방답진지도(全羅左道順天防踏鎭地圖 圭 10510)’, ‘호남연해형편도’ 등을 종합해 보면 옛 방답진성 서문지 바로 앞쪽에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방답진 첨사가 임금님께 그려 바친 수군 전략 지도에는 전선(戰船)을 만들어 바다로 내려 보내고 수리하는 곳인 방답진 굴항이 나타나 있다. 그밖에 각종 무기를 보관하는 수군(水軍) 무기고, 군인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저장하는 즙물고(汁物庫), 세검정 등이 나타나 있다.
전라좌도순천방답진지도에는 전선 8척과 수군기, 3채의 건물이 표기되어 있다.
[의의와 연구과제]
방답진 굴강(굴항)은 최근 복원 기록 등이 없어 조선시대의 형태 그대로인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의 굴강(굴항) 연구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시설이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해안 정박시설의 의미로 사용한 ‘굴강(掘江)이라는 용어는 근대 이전에는 사용한 용례가 없다. 국어사전에도 “굴강”은 ‘개골창 물이 흘러 나가도록 길게 판 내, 또는 성 주위에 둘러 판 못’ 정도로 하천과 관련된 용어로 설명되었다. 깊이 있는 연구로 굴강의 시원이라고 할 수 있는 “굴항(掘港)”으로의 용어 정정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