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18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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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麗水節度使安潚事蹟碑 |
영어의미역 | Stele of An Suk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연등동 436-2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병호 |
문화재 지정 일시 | 1998년 8월 13일 - >여수절도사안숙사적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 203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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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여수절도사안숙사적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재지정 |
성격 | 비 |
건립시기/일시 | 1823년 |
관련인물 | 안숙 |
높이 | 172㎝ |
너비 | 65.5㎝ |
소재지 주소 | 전라남도 여수시 연등동 436-2 |
소유자 | 국유 |
문화재 지정번호 |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연등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전라좌수사 안숙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적비.
[개설]
여수 절도사 안공 사적비는 1823년(순조 23)에 세운 것으로, 1809년(순조 9) 절도사(節度使)로 부임한 안숙은 문무를 권장하고 좌수영을 수리하여 주민들의 구제에 심혈을 기울였고, 부하 군졸을 가족처럼 여겼다. 또한 서민의 혼례, 장례 등 길흉사를 돕는 등 선정 정치의 모범을 보였다.
안숙은 좌수영 본영의 거북선이 낡아 훼손되자 충무공 이순신 때의 도본(圖本)을 참고하여 이를 복원하였으며, 환곡(還穀)의 폐단을 바로잡아 주는 등 많은 공을 세워 백성들이 안숙을 믿고 따랐고, 이듬해 안숙이 직을 떠나자 사적비를 세워 그의 치적을 기렸다고 전한다.
[형태]
조대와 비갓을 갖춘 비로서,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양식을 보이고 있다. 높이는 172㎝이고, 너비는 65.5㎝이다.
[금석문]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의 휘는 숙이요 자는 성숙이요 본은 □이니 기미년(1809년)에 본영에 부임하여 군기와 집물(什物)을 빠짐없이 보충하고 파손을 복원하고 성첩과 관사를 완축 중수하니 영문이 광채가 낫다. 그 해에 가뭄이 심하여 가을에 거둘 것이 없으니 공이 크게 근심하여 먼저 황급한 것을 기록하였다가 동짓달부터 감사를 방방곡곡에 파견하여 식구를 계산하여 식량을 배급할 때 비록 야심하나 회보를 들은 후에야 잠을 잤다.
구할 인원이 사백삼십칠 명이고 섣달 이십사일에 굶주린 자에게 구휼한 것은 곧 공의 사진(私賑)이다. 영내에 명령하되 바야흐로 이런 해를 당하여 이삼등(二三等)을 아울러 고루 나누어주라 하고 곡식은 반드시 친히 검사하고 죽을 쑤어 친히 맛보고 백성에게 급식하니 영하의 백성들이 모두 살아갈 의욕이 생겼다.
경오 정초(正初)를 당하여 공진(公賑)을 열어 매월 삼등(三等)으로 분급(分給)하되 초등(初等)은 이등(二等)에 초부(抄付)하고, 이등(二等)은 삼등(三等)에 초부(抄付)하니 정월내(正月內) 기구(飢口)가 이천구백오십사 명을 기록하고 본영의 변비(辨備)된 것 및 본부의 이전곡이 구백 석인데 순보외(巡報外)에 첨가된 인구를 계산하여 이것으로 주진(周賑)하고 그래도 부족하면 영문에 별도로 구획이 있으니 어찌 각례(恪例)에만 구애(狗碍)하여 당연히 진급할 기구(飢口)를 감식할 수 있겠는가. 민원을 따르는 것이 옳다 하여 사월까지에 진급이 끝났다.
공이 크게 반육(飯肉)을 장만하여 환영(環營)에 후궤(厚饋)하니 군민이 춤추며 감송하여 환성이 우뢰 같았다. 사망자가 사십일인인데 각각 필목과 백미 몇 말을 주고 이장을 시켜 매장을 조심하도록 부탁하고 걸인에게는 막사를 설치하여 별도로 거처하게 하였다.
급식은 영속과 같이 하고 버리고 갈 때에는 의복과 농기구를 주고 낯모르는 시체에는 매구당 목일필(木一疋) 초석이립(草席二立) 공석오립(空石五立)을 주고 매장하는데 감독한 자는 두미(斗米)를 주고 연말에 상을 당하여 매장을 못한 자에게는 만원에 따라 전곡(錢穀)을 주고 간혹 남의 애복을 빌려 입고 기중(其中)에 혼입(混入)한 자는 공이 모르는 척하되 막좌(幕左)가 말하기를 저런 사람 때문에 과비(過費)한다고 말하면 그렇지 않다고 이해시켰다.
본영에 있는 거북선이 점점 고제(古制)를 잃게 되자 공이 도본을 참구하여 익숙한 목공으로 하여금 충무공의 구일절도사(舊日節度使) 전규(前規)로 제작하니 이에 동영과 각 수영 및 청남북 방어영이 다 이 배 모양을 그려 『병학지남(兵學指南)』 오십여 권을 인쇄하였다.
공이 영좌영(嶺左營)으로 있을 때 새로 발간한 것을 주색(州色)에 연막(聯幕)하고 칠진산성 승군허(僧軍許)에 각각 두 권씩 주고 나머지는 활 쏘는 시험장에 상품 자료로 하고 돈 백민을 내어 고구전을 보충하고 공무여가에 무사들을 소집하여 병법을 강론하고 궁술을 연습시켰다. 동서 삿 동민들이 석창으로써 도리어 폐단이 되니 공이 영관본읍에 순찰하여 석창을 제법 하고 수납의 폐단을 돌렸다.
공의 제곤(制閫)하는 방략과 활민하는 경륜이 가히 한껏 구비하다고 말하겠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부유(婦幼)와 군졸들이 전송하는 데 분주하여 수레를 붙들고 체읍(涕泣)하는 자도 있었다. 보살펴준 사랑이 흡족한 나머지 비석을 세워 영세토록 잊지 못할 것을 도모하노라. 숭정기원후 넷째 계미년 십일월일에 절충 김이각은 짓고 유학 정집원은 씀"
[현황]
안숙 절도사의 업적 및 정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1994년, 사업비 1,200만 원을 들여 정면 1칸, 측면 1칸의 굴도리 맞배지붕 비각을 신축하여 여수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1998년 8월 13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03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