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19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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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巨文鎭址 |
영어의미역 | Geomunjin Fort Site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동도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병호 |
[정의]
조선 말기 거문도 점령 사건 이후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유촌리에 설치된 진.
[개설]
영국 해군의 거문도 점령 사건이란 1885년(고종 22)부터 1887년까지 약 2년 동안 영국동양함대사령관 포트 해밀턴 중장이 불법 점령한 사건을 말한다.
[변천]
영국군 철수 후 경략사 이원희를 보내 동도 유촌리에 거문진을 설치하였고, 첨사 겸 수방장 신석효로 하여금 창사를 건립케 하였다. 그러나 8년 만인 1895년 7월, 돌산의 방답진과 더불어 폐진하고 초도·손죽도를 상도로, 거문도를 하도라 하고 집강을 두었으며, 흥양군 소속에서 여천군으로 개편되었다. 그 후 1896년 돌산군에 편입되었다가 다시 1908년, 오늘날의 삼산면으로 구획되었다.
[위치]
거문진 터는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동도 유촌리 마을 뒤쪽 밭 661m²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발굴조사경위 및 결과]
당시 영국은 남하하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하고 진지를 건설하였으며, 3개의 항만출입구에 방어시설을 구축, 6개 처에 포대를 가설하고 수병 800~900명과 군함으로 섬 주위를 수비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참판 엄세영과 독일인 외무협판 묄렌도르프, 청국의 북양수사제독 정여창이 군함에 동승하여 철수를 요구했으며, 러시아가 남하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결국 철수하였다.
[현황]
당시 객사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이 없고, 다만 밭 가운데 주춧돌 4개만 남아 있다. 상당수의 나머지 주춧돌은 본 터에서 약 30m 거리에 있는 이정필 집 담장에 쌓여 있다. 뿐만 아니라 거문진이 폐진되자 목재는 뜯어서 서도 장촌리의 사립낙영학교[지금의 서도초등학교] 건축에 사용되었다. 영국 해군의 거문도 점령을 증명하듯 산기슭에는 지금도 33m²정도의 영국군 묘지가 자리잡고 있다.
[의의와 평가]
영국의 거문도 점령 당시 해밀턴 중장은 동도 망치산에서 그 당시 본국 왕에게 “이렇게 좋은 항을 점지하여 주었다.”고 하면서 기도를 올렸다는 것으로 보아 이 거문도가 해군 점령기지로서의 최적지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영국군이 철수한 이후에 이곳에 진을 설치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