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22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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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竹林里車洞堂山祭 |
영어의미역 | Village-Ritual Ceremony of Chadong Village, Jungnim-ri |
이칭/별칭 | 차동마을 촌제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의례/제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죽림리 차동마을 |
집필자 | 나경수 |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죽림리 차동마을에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지내는 마을 제사.
[개설]
죽림리 차동 당산제는 마을 공동으로 음력 1월 중경 오후 4시경에 올리는 마을제사이다. 중경은 10일에서 20일 사이를 말하는데, 10일 안에 좋은 날을 받아서 당산제를 지낸다. 이를 ‘차동마을 촌제’라고도 하며, 마을의 수호신은 ‘당산할아버지’이다.
제관은 3명으로 그 중에 유사가 초헌관의 역할까지 담당한다. 그렇기에 유사를 다른 제관보다 더욱 신중하게 고려하여 선정한다. 그러나 아헌관, 종헌관은 제를 모시는 당일 제장에 참석한 사람 중에서 정한다. 당산제를 지내는 비용은 호당 얼마씩 거출(갹출)을 한다.
[연원 및 변천]
옛날에는 음력 섣달그믐에 당산제를 지냈었다. 하지만 음력 1월 중경으로 날짜를 옮긴 이유는 20년 전에 서로 유사를 하지 않으려고 차일피일 미루다 설을 넘겨버려서 제일을 정월 중경으로 변경하였다고 한다. 날짜를 옮겼어도 당산제는 중단하지 않고 잘 하든 못하든지 계속 지내오고 있다. 일제강점기나, 여순사건이 있었을 때에도 마을에서는 당산제를 지냈었다고 한다.
[신당/신체의 형태]
당산할아버지가 좌정한 신체는 숲이다. 이곳은 제단과 몇 그루의 나무로 이루어져 있다. 나무들은 모두 고목으로 그 종류는 팽나무, 회나무(이팝나무), 귀목나무, 밤나무 등이다. 특정하게 당산나무라고 지정된 나무는 없다. 이곳은 마을 입구 옆 언덕부근에 위치한다. 이 당산제장은 지금까지 한 번도 바뀌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서 제를 모셔왔다.
[절차]
시간에 맞추어 유사는 장만한 제물을 차를 이용하여 제장으로 운반한다. 제장에 도착하면 제물(과일, 고기류(소고기), 전, 포, 떡(팥시루), 나물, 메 두 그릇(당산할아버지, 할머니), 탕, 국 두 그릇, 수저 두 개, 초, 향 등)을 제단에 진설한다. 제단에 올리는 제물 이외에 그 근처에 거리밥 제물을 놓는다. 거리밥은 큰 양판에 당산제에 올린 제물과 같은 종류를 한꺼번에 담아서 숟가락을 여러 개 꽂아 둔 것이다.
그런 후 초헌, 축, 아헌, 종헌 순으로 진행한다. 축문은 제가 끝나면 불에 태운다. 그리고 제장에 참석한 사람 중 잔을 올리고 싶은 사람은 나와서 잔을 올리고 절을 한다. 이후 밥 한 그릇에 제물을 골고루 담아 나무뿌리 밑에 묻는다. 이를 ‘물밥’이라고 한다. 당산제의 절차가 끝나면 유사는 거리밥이 있는 곳으로 간다. 거리밥의 일부를 당산제장 주변에 흩뿌리고, 남은 음식은 당산제 제물과 함께 마을로 가지고 돌아온다.
[축문]
옛날에는 산신제 축문과 같은 내용의 축문이 있었다. 이 축문은 마을에 보관되었으나, 보관하신 분의 연세가 많아 현재 축문이 어디에 보관되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또한 현재 젊은 사람들은 이를 잘 읽지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기에 현대식으로 고쳐서 축문을 읽는다.
[부대행사]
마을 사람들 모두가 제물을 나눠 먹는다. 차동마을에는 컨테이너 박스를 마을회관으로 사용고 있다. 그래서 이곳에서 음복을 하거나, 아니면 맞은편에 규모가 약간 있는 하우스에서 음복한다. 당산제에 대한 결산은 그날 보고하지만, 마을총회에서 다시 보고한다.
[현황]
죽림리 차동 당산제에 대한 관심이 적어지고 더욱 간소화된 것은 3년 전 마을 이주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부터이다. 당산제도 2007년을 마지막으로 지내게 되었다. 마을의 모든 산과 논 등이 허물어지고 없어지지만 당산할아버지가 좌정된 곳은 공원으로 만들어지기에 그곳은 그대로 유지된다고 한다. 그렇더라도 주민들이 뿔뿔이 흩어지니 마을회의에서 당산제를 지내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2007년 당산제를 지내면서 당산할아버지에게 내년부터 제를 지내지 못하게 되었다고 고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