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313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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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學生慶州李公諱鍾原妻孝烈婦金海金氏紀行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1540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유화 |
건립 시기/일시 | 1931년 3월 - 학생 경주 이공휘종원 처 효열부 김해김씨 기행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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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학생 경주 이공휘종원 처 효열부 김해김씨 기행비 - 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1540 |
원소재지 | 학생 경주 이공휘종원 처 효열부 김해김씨 기행비 - 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1540 |
성격 | 효열 기행비 |
관련 인물 | 이종원|김해김씨|이재현|정기로|이홍우 |
재질 | 화강암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209㎝[총 높이]|137㎝[비석 높이]|49㎝[너비]|19㎝[두께] |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에 있는 일제 강점기 세워진 이종원의 처 김해김씨 효열 기행비.
[개설]
김해김씨(金海金氏)의 아버지는 김교민(金敎敏)이고, 남편은 이종원(李鍾原)으로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건립 경위]
경주이씨 37세손 이종원과 결혼한 김씨 부인이 남편이 조사(早死)한 후 부모에게 효를 다하고 외아들 이홍우(李洪兩)를 훌륭히 훈육하며 가게를 유지하여 효율부로 향천되자 이를 후손에게 알리고자 경주이씨 문중에서 학생 경주 이공휘종원 처 효열부 김해김씨 기행비(學生慶州李公諱鍾原妻孝烈婦金海金氏紀行碑)를 건립하였다.
[위치]
학생 경주 이공휘종원 처 효열부 김해김씨 기행비는 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1540번지에 있다.
[형태]
기단석 위에 오석으로 된 비신을 세우고 화강암으로 둘레돌을 두른 다음 그 위에 비갓을 올렸다. 총 높이는 209㎝이고, 비석 높이는 137㎝, 너비는 49㎝, 두께는 19㎝이다.
[금석문]
비신 전면 중앙 우측에는 ‘학생 경주 이공휘종원 처(學生慶州李公諱鍾原妻)’, 중앙 좌측에는 ‘효열부 김해김씨 기행기(孝烈婦金海金氏紀行碑)’라고 쓰여 있다.
후면에는 “무릇 정치를 함에는 오륜으로 근본을 삼고 윤기를 밝힘은 삼강으로 먼저를 삼으니 충효열이 또 삼강의 착한 행실이 됨으로 여기에서 한 가지만 있어도 반드시 정문을 세워서 표시하였으니 대개 풍성을 세우고 백성을 인도하여 착한 일을 권면하는 의리라 하겠다. 이제 안찰해 보면 전남 여천군 삼일면 적량리에 고인 이공 종원의 아내 김씨 효열의 탁월한 행실은 옛사람에 비하여 보더라도 자못 양보하지 못한다. 김씨의 본관은 김해니 대제학 서산공 휘 은대의 후손 휘 교민의 딸이라 그 남편 집안 세덕인즉 경주이씨 병조판서 휘 석으로 현조를 삼고, 증조의 휘는 달권으로 통정대부 공조참의를 증직하고, 조의 휘는 상영이요. 고의 휘는 규완이요 호는 심정이니 무과에 급제하여 선략장군을 지냈다. 김씨가 시집가기 전부터 이미 정조와 지행이 있었는데 남편 집에 시집가 능히 부인의 도리를 잡아서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에게 효도하고 남편에게 공경하니 시댁에 집안들이 모두 이르되 김씨 부인 같음이여! 훌륭한 가문에서 배움이 있다고 하였다. 처음으로 출생한 아들 이름은 홍우인데 부모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여 가문이 자연 화목하였는데 어찌하여 가운이 매우 혹심하여 남편께서 병에 걸리어 여러 달을 백약이 무효하고 위급함에 이르러서는 다리 살을 베어 약을 조화하므로 겨우 3일을 연장하였으나 마침내 천명이라 어찌 할 수가 없는즉, 남편을 잃은 아픔은 가히 국속을 변화시킬 만하였다. 김씨의 이때 나이 27세이다. 남편을 따라 죽으려 시신 곁을 떠나지 않았는데 시어머니가 그런 뜻을 가만히 알고 억지로 만류하고 울면서 달래고 이르되 슬픈 일이구나! 우리 며느리는 모름지기 일절만 고집하지 말라. 우리 두 사람이 복이 없어 그러함이니 죽어도 참으로 아까울 것이 없으나 저 네 살 된 고아를 누가 양육하겠느냐? 우리 가문의 후사를 남기기는 참으로 며느리의 의리를 잡는 어떠함에 달려 있으니 다시 생각해 보라 하니 김씨가 감동하고 섬기고 기를 것을 생각하여 스스로 수절할 것을 맹세하며 남편의 상사를 이미 마친 후에 미망인으로 자처하고 한 번도 웃는 말로 사람을 대하지 않고, 오로지 홀시어머니의 봉양으로 마음을 삼고 음식의 제공과 의복의 드림을 시기에 맞추어 어김이 없었다. 경신년 가을에 시어머니가 노병환으로 신음하여 점차 위중함에 대변을 맛보고 병세를 시험하였는데 의원이 말하기를 합병증에서 온 것이라 함에 약 쓰기를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운명에 임박하여 손가락을 끊어 피를 드림으로 다행히 수일간을 연명했다. 상사를 당하여 슬픔과 예를 다하며 3년간에 제사 올리기를 한결같이 생시에 섬기듯 하고 삼베옷을 입고 평생에 고치지 않으니 대개 그 추상열일과 같은 절개는 듣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코끝이 시큰하여 용모를 변동할 것이다. 또 아들을 의방으로 교육하여 아버지가 없음으로써 그 교육을 해이하거나 사랑에 빠져 그 독책을 잃지 않았고 그 고아도 역시 어머니의 교훈을 잘 따라서 학업에 부지런하였으므로 문한이 우뚝하게 이루어 아들로 어머니 섬기는 예절에 구비하고 가문을 창립하는 도리를 성취하였으니 김씨는 또한 훌륭한 아들이 있다고 하겠다. 아울러 가히 비석에 기록하라. 명에 이르되 여사로 여사의 행실이 있으니 오직 효와 오직 열이로다. 내가 그런 사람을 구하매 천백 명에서 하나도 드물었네. 아! 김씨야말로 이 양절을 온전히 하였구려. 조녀의 짝이요 진부의 배필이기도 하였네. 실적을 기록하고 행장을 적어 비석에 새기니 지금 사람의 모범이요. 후세 사람의 긍식이 되리라. 신미 삼월 하순 자헌대부의 정부찬정장예원경 원임시강원첨사 완산 이재현 짓고 창원 정기로 쓰다[大凡為治以五倫為本明倫以三網為先忠孝烈又為三綱之善行有一於此必表而旌之盖樹風聲而導民勸善之義也今按全南麗川郡三日面積良里故李公鍾原之妻金氏孝烈卓行視之古人殆不讓焉矣金氏籍金海大提學西山公諱銀戴后諱敎敏女也其夫家世德則慶州人兵曹判書諱碩為顯祖曾祖諱達權,贈通政大夫工曹參議祖諱尙榮考諱圭莞號心亭武及第宣略將軍也金氏自未笄時已有貞操至行及歸于夫家克執婦度孝於舅姑敬於君子夫黨成曰婦哉金氏也擩染法家者有以也初生子男名洪雨慰悅親心家門自爾雍和矣夫何家運孔酷其夫嬰疾累月百樂無靈至危割股肉和藥僅延三日而竟於天命而無奈矣則域哭之痛可變國俗也金氏時年二十七矢欲從殉不離尸側姑微悉其旨强挽泣論曰哀我賢婦須勿固執一節吾兩人祚薄死因無惜彼四歲幼孤誰可拊育乎吾門有後亶由乎賢婦執義之如何矣更以思之金氏感念事育自誓守節夫喪旣畢處之以未亡人一未嘗以言笑對人專以偏姑之養為心甘旨之供衣裳之獻以時無違當庚申秋姑以老症呻吟漸至危重嘗糞驗症宜云合症者餌藥靡不用極及革斷指注血幸以数日延壽也及喪哀禮備至三年祭奠一如事生麻衣所着不改平生盖其秋霜烈日之節令人酸鼻而動容矣且教子義方不以無父而弛其教溺愛而失其督其孤亦克遵母訓勤於學業文翰翹楚子於母之禮備於立家之道成金氏又有子哉竝可以書諸碑也銘曰 女有女行維孝維烈我求其人千百鮮一嗟哉金氏寔全兩節曺女是儔陳婦可匹記實誄行載勒之石今人之範後人之式 歲 辛未 季春下澣 資憲大夫議政府贊政掌禮院𨜮 原任侍講院詹事 完山 李載現 撰 昌原 丁基魯 書]”라고 쓰여 있다.
[현황]
2021년 6월 현재 학생 경주 이공휘종원 처 효열부 김해김씨 기행비 등이 있는 비석군 옆에서 주유소 공사가 진행 중이라 비석이 손상되거나 없어질 확률이 높아 관리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