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A0104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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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안도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병호 |
조선시대에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안도리 안도는 금오도와 마찬가지로 왜구가 침입해 왔던 길목 또는 그들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명종실록(明宗實錄)』을 보면, 1546년(명종 1) 9월 25일 기사에 전라도수사 김세한(金世澣)의 계본(啓本)을 정원에 내리면서 전교한 내용이 적혀 있다.
“바닷물 속에 들어가 조개·미역 등 해산물을 채취하거나 국가의 각급 제사에 쓰는 어포(魚鮑)를 떠서 소금에 말려 진상하는 사람[鮑作干]이 해물(海物)을 캐기 위하여 바다에 들어갔는데, 14일에 큰 왜선(倭船) 3척이 안도(安島) 동라구(冬羅仇)에 정박하여 돌아오는 길을 막았다. 이에 첨사(僉使) 김덕로(金德老) 등이 추격하여 왜인 5명을 죽이고 도검(刀劍) 등의 물건을 노획하였다.”
위 자료에 의하면 여수 지역의 자연 환경이 해조류나 어패류 서식에 알맞은 조건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시대에 이를 채취하는 전문적 집단인 포작간(鮑作干)이 있었다. 이들이 안도에서 활동할 때 왜구들이 동라구(冬羅仇)[현재의 동고지로 추정됨]에서 방해함으로써 방답진 군대가 출동하여 이들을 물리쳤다. 외국 배들이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 안도에 도착하기도 했다. 『현종실록(顯宗實錄)』 1668년(현종 9) 7월 21일조에 중국 배 관련 내용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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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고지
“이달 7일에 당선(唐船)[중국 배] 한 척이 표류하다가 방답(防踏)[돌산]에 가까운 안도(安島) 앞 포구에 들어와 정박했는데, 우리나라의 전선(戰船)과 크기가 같았다. 사람들은 모두 머리가 길고 수염이 있었으며,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대략 30~40명쯤 되었는데, 나무를 하고 물을 긷고는 바로 배를 띄워 떠났다. 전라좌수사가 계문하였다.”
안도에는 태풍이나 홍수와 같은 자연 재해가 발생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한 가슴 아픈 사연도 있었던 것 같다. 『일성록(日省錄)』 1777년(정조 1) 2월 28일조를 보면, 전라감사 이보행(李普行)이 순천 안도에 사는 정덕수(鄭德水) 등이 물에 빠져 죽었다고 치계한 데 대해 하교하기를, “본도로 하여금 휼전을 거행하도록 하라.”하였다고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