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A02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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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안도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병호 |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안도리 안도의 황금 어장에 일본 어민들을 끌어 들인 사람은 이주회(李周會)이다. 이주회는 1843년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하였고, 병법을 배워 오위장이 되었다. 병인양요 때 결사대를 조직하여 프랑스 함대를 내쫓아 대원군의 신임을 얻기도 했다. 연일현감·외무위원을 역임하고 김옥균·우범선과 교류하면서 개국론을 주장하였다. 임오군란 후 대원군 일파로 지목되어 안도와 인접해 있는 금오도로 유배되었다.
갑신정변으로 일본으로 망명한 이주회는 3년을 일본에서 살면서 간다[神田]에서 와다나베[渡邊]의 딸과 동거하였다. 서화를 만들어 일본인 동거녀에게 팔아오게 하는 가난한 생활 속에서 다케다 한시[武田範之]를 비롯한 낭인패들과의 폭넓은 교분도 시작되었다. 죄를 용서 받아 귀국한 이주회는 자원해서 금오도도사(金鰲島都事)로 부임했다. 유배 생활을 할 때 개발 가능성을 점쳐 둔 곳인데, 그의 노력에 의해 섬은 4개 부락 6백여 호의 볼 만한 마을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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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도
다케다가 이 섬으로 이주회를 찾아온 것이 1892년이다. 일대의 황금 어장을 개발하기로 협의한 다케다는 친구 낭인 유키 도라고로[結城虎五郞]와 함께 어선 8척에 일본 어부 30명을 이끌고 다시 금오도로 왔다. 1893년 3월이었는데, 이것이 전라도 앞바다에 일본 어선이 침입한 첫 번째이다. 이 선단은 안도를 중심으로 우수한 장비로 부근 어장을 닥치는 대로 훑기 시작했다.
고기는 엄청나게 잡혔으나 일본 배에는 저장 시설이 없어 처리가 곤란했다. 현지에서 싸구려로 팔아 치우는 수밖에 없었는데, 덕분에 고기 값이 폭락하여 조선 어민은 굶어 죽을 지경이 되어 버렸다. 먹을 사람이 없어진 생선은 논밭의 비료로 쓰였다. 황금 어장만 망쳐 놓은 채 빈털터리가 된 그들은 부근 어촌과 장삿배를 털어 쌀과 찬거리를 마련해 가면서 간신히 일본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