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B020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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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서도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병호 |
멸치는 갈치와 마찬가지로 빛을 쫓아다니는 추광성(追光性) 어종(魚種)으로 서도리에서는 불을 밝혀 멸치 떼를 유도하여 포획한다.
챗배를 이용하여 멸치를 잡는 시기는 연중 음력 5월, 6월에 집중된다. 이때 밤마다 멸치를 잡기 위해 수십 척의 배가 호수와 같은 바다 가운데서 불을 밝힌 채 작업하는 광경은 육지에서 보면 일대 장관을 이루고 있어 또 하나의 홍국어화(紅國漁火)를 거문도 내해(內海)인 삼호(三湖)의 여름 바다에 연출한다. 갈치 배들의 불은 정지되어 있어 여성적이라면 멸치 배들의 불배[集魚船]는 이동을 하고 다니기 때문에 남성적이다.
지금은 사라진 서도리 멸치잡이의 변천사를 남성현[60세]은 다음과 같이 소상하게 정리하고 있다.
멸치 어장은 챗배로부터 시작했다. 근대 어로의 방법은 일본에서 들어온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멸치를 잡는 어장인 챗배는 우리의 고유한 방법이라고 한다. 챗배란 불로 멸치를 유도하여 그물을 들어 올려 잡는 방법으로 그물을 달아매는 기다란 막대기를 ‘채’라고 하는데 보통 네 개의 채가 있다.
일명 ‘자잣배’라고도 하는데 대개 10여 명씩 승선하고 큰 배의 경우 노 젓는 사람이 네 명이 된다. ‘자잣배’라고 하는 것은 작업을 하면서 호흡을 맞추기 위해 배를 발로 쿵쿵 울리면 ‘자-자-’라는 소리가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멸치를 잡는 방법은 집어등(集魚燈)에 불을 붙여서 멸치를 유도하여 그물로 뜨는 원리이다. 집어(集魚)를 위해서 밤에 불을 이용하게 된 것은 일본인들에 의해 전수받은 방식이고 그 이전의 거문도 어획 방법에서는 야간에 불을 켜고 어획하는 방법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을 밝히는 등(燈)은 가스나 등유가 들어오기 전에 사용한 전통 방법으로 소나무의 옹이인 관솔을 잘게 조각을 내어 철사로 얽어 만든 얼개에 넣어서 불을 밝혔다고 한다. 특히 1930년대에는 전등을 집어등으로 사용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라고 자랑하고 있다.
챗배는 주로 얕은 바다에서 작업을 하게 되는데 멸치를 유도하기 위해 일단 갯가에서 비교적 떨어진 먼 바다까지 노를 저어 가서 불을 붙여 멸(멸치)을 모은다. 멸치를 모은 상태에서 멸치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갯바당(갯벌)으로 유도하고 이 작업이 끝나면 배를 틀어서 멸치와 배의 위치를 전환, 멸치를 갯가 구석으로 몰아넣은 상태를 만든다. “멸이야!”라는 함성과 함께 갯대를 눌러 그물의 입구를 벌리면, 솔불을 그물 안쪽으로 순간적으로 밀어 넣어서 멸치를 그물 안에 들어가도록 한다. 이때 그물의 크기에 비해 멸치가 너무 많이 들어가지 않도록 불사공(불을 관리하는 사람)은 순간적인 판단 하에 솔불을 끈다. 멸치가 너무 많이 잡히면 그물이 찢어지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갯대를 누르면 허릿대 밑에 위치한 그물의 아랫부분이 밑으로 쳐지게 되어 그물 입구가 벌어지고 그물 윗부분은 허릿대에 고정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때 유일하게 허가했던 어업법으로 ‘홀치기’가 있는데 이는 일제가 어장과 어종 보호를 위해서 그물코와 통수를 제한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는 한편 보다 적극적인 어종 보호책의 일환으로 ‘면허’와 ‘허가’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면허’에 해당할 만한 어획법이 거문도에는 없었던 듯하고 거문도 내에서 비교적 규모가 큰 홀치기가 유일하게 허가가 필요한 것 같다.
챗배가 주로 젓갈용 멸치를 잡았다면 홀치기는 마른 멸치를 만들기 위한 조업으로 5~6톤 크기의 무동력선 두 척으로 행하는 어획법으로써 배 한 척에 9명이 타는 노동 집약형 어업이다. 선주는 선원에게 일당 내지 월급을 지불했으나 선원의 수가 9명이나 되므로 어장의 형성이 잘 안 되면 급료 지불에 부담을 느끼는 어법이다. 어획 방법은 그림에서 보듯이 불배 한 척이 불을 밝혀 집어를 하고 나머지 한 척으로 작업을 하는데, 불배 대용으로 조명을 부기에 띄어서 바다에 고정시켜 두는 점이 변화한 점이다. 전체 그물의 길이는 100m 정도였으나 이후에는 500~1,000m에 이르렀다. 그물의 구조 자체는 매우 간단하였으며, 단지 그물을 잘 오므리기 위해서는 아랫줄 부분을 먼저 당겨야 쉽게 홀쳐진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멸치는 잡는 사람도 먹지 못했을 정도로 비싸서 잡는 즉시 일본으로 무역했다고 한다.
1960년대 흉어기를 거치면서 들망이 도입되었는데 챗배가 한 척으로 하는 멸치잡이 배인데 비해 들망은 네 척이 동원되는 비교적 규모가 큰 멸치잡이 어법이다. 솔불로 멸치를 유도하는 방식은 기본적으로 챗배와 동일하나 챗배에 불사공이 있는 것과는 달리 들망에서는 불배가 있어 멸치를 유도해서 잡는 방식이다. 망선(모선)에 대를 가로로 걸치고 여기서 운반선 1과 2에 연결해 그물을 펴둔 상태에서 불배가 멸치를 유도해 망선 쪽으로 이동하면 자연히 멸치가 그물에 들어가도록 고안되었다. 작업 인원은 운반선에 1~2명, 망선에 5~6명, 불배에 1~2명으로서 최대 12명, 최소 8~9명이 작업에 소요된다. 당시의 재래식 어획법 중에서는 비교적 규모가 큰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들망은 약간의 상업성이 가미되어 있는 일종의 기업화된 어획법으로 순수한 재래식 어획법이라 보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