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B0202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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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서도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병호 |
햇볕이 따사로이 비추는 돌담 아래서 이귀순[73세, 거문도뱃노래 보존회장] 할아버지는 오늘도 삼치 낚시 준비가 한창이다. 일을 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삼치 낚시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자 삼치 낚시의 도사답게 대답이 일사천리다.
겨울에 삼치 파시가 섰을 때는 세 섬(동도, 고도, 서도)을 배를 밟고 건너다녔을 정도로 굉장했다고 한다. 전국에서 삼치잡이 어선들이 몰려들었는데 거문도 전체 수산물량의 70~80%가 삼치였고, 전국에서 위판된 어획고의 5%에 달했다.
그런데 1965년 한일회담 때 공동규제수역을 만들어 거문도 일대의 삼치어장을 일본사람들한테 다 뺏기고 삼치 가격은 똥값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원래 삼치는 비늘이 없어 제사상에도 못 오르는 천덕꾸러기여서 망할 놈의 고기라는 뜻으로 ‘망어(亡魚)’라고 했다고 한다.
삼치를 먹기 시작한 것은 일제 때 일본 사람들이 회(사시미)를 해서 먹기 시작하면서였는데, 일본 사람들은 입맛이 까다로워 삼치가 욕지 삼치인지, 청산 삼치인지, 제주도 삼치인지를 금방 구별했는데 일본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거문도 삼치인데 비싸서 사 먹기가 힘들었다. 당시 삼치 한 마리가 닭 두 마리 값이었으니까, 잘 사는 사람들이 한 마리 사 먹지 일반인들은 4~5 토막 나눠 놓은 것을 한 토막씩 사 먹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일회담 때 11개 항목 가운데 거문도 부근의 삼치 어장을 확보하기 위하여 일본은 9개 항목을 우리나라에 양보하고 공동규제수역을 백도 부근까지 끌어올리려 하자 서도리 출신이며 당시 수산전문위원으로 회담에 참석했던 남상규는 삼치 어장만은 양보할 수 없다고 강력히 반대하고 귀국해 버린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 후 한일회담이 체결된 다음해에 일본 어선들이 몰려와 삼치를 40만㎏을 잡아가 버려 수출 길이 막혀서 삼치 값이 똥값이 되어 버리고 최근에는 트롤 어선과 중국 어선이 설치는 바람에 고기가 잡히지를 않아 걱정이다.
서도리의 삼치잡이는 추석이 끝나면 시작하여 4월경까지 계속되는데 그것은 삼치가 월동하기 위하여 거문도를 경유하여 동지나해로 갔다가 봄이면 다시 올라와 고군산열도를 지나 진남포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는데 서도리 사람들은 삼치떼를 따라 다니지 않고 거문도에서만 잡았다. 삼치는 11월에서 1월까지가 제일 맛이 좋다고 한다.
삼치는 미끼를 비닐로 만든 속임낚시를 쓰고 있으나 옛날에는 비닐 대신 복어 껍질과 고양이 껍질을 사용했는데 서도리에서는 질기고 부드러운 고양이 껍질을 주로 이용하였다. 미꾸라지를 쓰는 경우도 있었는데 산 미꾸라지를 그냥 쓰면 낚시가 돌아 버리고 줄이 엉키기 때문에 미꾸라지를 두드려서 부드럽게 만들어서 사용하는데 심하게 두드리면 끊어지는 수가 있어 힘 조절이 필요하다고 한다.
낚시 방법은 연승인데 낚싯대에 30발 되는 낚싯줄에 낚시를 6개 달 수도 있고, 배의 고물에 세 줄의 낚싯줄을 드리우는데 그 길이가 50, 70, 90발로 다르며, 줄에 다는 납의 무게도 3, 5, 7관으로 차이가 나는데 이것은 낚싯줄의 깊이를 달리하여 서로 엉키는 것을 막고 수심에 차이를 둠으로써 삼치를 다양한 층에서 낚을 수 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최근에 질소를 싣고 가다가 침몰한 배 때문에 삼치를 많이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동안 최신 장비를 갖춘 트롤 어선들이 조업 구역을 어기며 거문도, 백도 근해에서 삼치를 잡아갔는데 사고가 나자 경비정이 배치되어 트롤 어선들이 접근을 하지 않아 삼치를 많이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평소에 주민들이 아무리 수산 당국에 진정을 해도 소용이 없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단속만 나오면 트롤 어선이 나타나지 않아 지금은 포기 상태라고 말하는 이귀순 할아버지의 눈길은 시종 삼치 낚싯줄에서 떠나지를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