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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양원 역사 - 여수로의 집단 이주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D010102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무성

광주에 있던 한센병 치료소의 환자 수가 600여 명에 이르자 1925년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1번지[산돌길 148] 신풍마을에 터를 닦고 애양원(愛養院)을 건립하였다. 애양원이란 이름에는 서로 사랑하고 보호하고 도우면서 살아가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 다른 말로 ‘사랑의 동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당시 돈 77,000원으로 논과 밭 40,000평을 확보하여 공사가 시작되었고, 나중에 100,000평을 추가로 확보하였다. 시설이 마련되자 1928년 한센병 환자 600여 명이 이곳으로 옮겨와 지금의 애양원의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 1935년에 애양원으로 이름이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여수애양재활병원은 1926년 선교사 윌슨(Robert M. Wilson)이 세운 삐도와 루프라는 병원을 전신으로 하고 있다. 한센병 환자를 대상으로 한 근대적인 병원으로서는 여수에서 최초로 세워진 것이다. 의료 장비는 원조 형태로 외국 선교사들을 통하여 들여왔다. 신풍리에 터를 잡은 이후 오늘날까지 개원 이념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신풍마을 입구에 위치한 애양병원 내에는 70여 년 된 높이 30m, 둘레 1m의 피칸(Pecan)이란 나무가 있다. 1925년 미국 장로교 선교사 윌슨이 병원 개원 기념으로 심은 것으로 희귀 수종 제69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또한 애양원에는 윌슨에 의해 설립된 성산교회가 있어 한센병 환자들의 신앙 활동의 근거지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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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양병원 내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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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교회

애양원이 있는 애양마을은 율촌면사무소로부터 6.1㎞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로서 뒤편으로는 도성마을과 인접하고 있다. 마을 오른쪽으로는 신흥마을과 접하고 있어 애양마을·신흥마을·도성마을은 애양원과는 아주 밀접한 생활권을 예전부터 형성하고 있었다.

낯선 외국인들이 의지할 데 없는 병든 자들을 자신의 가족마냥 사랑으로 치료하고 먹고 사는 문제까지도 배려를 하였다. 박애 정신의 산실로 애양원은 그 기조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당시 애양원의 터를 닦고 다지는데 큰 역할을 하였던 윌슨 의료 선교사는 애양원 초기의 모습을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관심은 한센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환자들이 최대한 자립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우리는 여러 방법으로 도와주었다. 목수·석공·농부로서 일하면서 독립적으로 경제력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었다. 100에이커에 달하는 아름다운 이곳에 부지를 정리하여 환자들의 생활공간을 만들어갔다.

병원을 중심으로 주변에 남자 숙소 25동과 여자 숙소 25동을 모두가 참여하는 울력의 형태로 지어나갔다.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아주 기쁜 마음으로 작업하였다. 이어 140동의 건물도 들어섰다. 계속 증축된 건물들은 창고 등 다양한 용도로 이용되었다.

애양원은 바삐 순환하는 소규모 공동체로서 당시 절망과 좌절로 삶에 비관적인 체험들이 마음 깊숙이 배어 있는 이들에게 밝은 미래를 준비를 하도록 하였다. 행복이 약속된 새로운 삶에 대한 자신감을 마련해 주었다. 이들은 결코 더 이상 거리를 배회하거나 행정당국의 감시 대상이 아니었다. 건강한 한 인격의 주체로서 내내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희망이 있기에 처음의 비관적이고 수동적인 자세에서 아주 능동적인 자세로 작업에 참여하였다. 우리는 가급적이면 참여자들이 일을 스스로 결정하고 처리할 수 있도록 기다리면서 이들에 대한 재생의 의지를 심어 주었다. 많이 알지도 배우지도 못하였지만 능동적인 참여자로 입장이 바뀜에 따라 일에 대한 관심과 헌신도도 아주 높은 편이었다.”

환자들의 자립형 공동체가 설립되었던 도성마을은 면소재지로부터 약 6.8㎞ 떨어진 곳에 있는 특수 마을이다. 좌측으로는 광양만과 접하고 있다. 산간도로로 통하는 선착장이 조그맣게 자리잡고 있다. 도성마을에 들어서면 여느 마을과는 달리 최근에 생활 근거지 구축이 되어 달라진 모습을 바로 느낌으로 접할 수 있었다. 초기에 나무를 주 연료로 사용하였던 흔적들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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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마을 선착장

‘도성’이라는 마을 이름은 미국 선교사 토플의 한국식 이름인 ‘도성래’에서 딴 것이다. 토플은 1976년 중순 무렵에 애양병원에서 치료받은 음성 나환자들에게 집단 이주 단지를 만들어 생활 터전을 마련하고 도성농원이라는 집단 농장을 만들어 자립적인 생활 기반을 제공해 준 사람이다. 그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고자 하는 주민들의 자발적인 뜻에 따라 자연스럽게 붙여졌던 것이다.

공동체 생활에서 뺄 수 없는 것이 선대로부터 후대로 자연스럽게 전승되어 온 그 마을의 풍속이다. 오랜 세월 축적되고 전승되어 온 세시풍속 중 상당한 부분은 기독교의 국내로의 급속한 확산으로 인하여 인위적으로 소멸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당제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도성마을에서도 더 이상 볼 수 없다.

당시에 종교 간의 화합과 유기적인 융합으로서 상호간에 존재를 인정할 필요성이 도성마을에서도 절실하였다. 그러나 민족 고유의 풍습을 비과학적인 미신이라 단정하여 철저히 말살함으로써 농어촌의 급격한 해체를 재촉하는 요인이 되었다. 일부에서는 한국에서 기독교의 제국주의적 양면성과 관련짓기도 한다.

의료 분야에서 선교사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민족 공동체를 단기간에 해체하여 민족 고유의 풍속을 소멸시키는 폐해도 심각하였다는 것이다. 도성마을도 종교 특히 기독교 성지로서의 상징적인 의미와 함께 전래 풍습의 단절이라는 부정의 의미들이 교차한 공간이라는 평가들이 동시에 나오고 있다.

섣달 그믐날 여럿이 모여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드렸다. 어른들을 공경한다는 의미를 지닌 이 풍습은 최근까지 계속되어 왔다. 음식을 나누어 먹는 풍습은 협동적이면서 함께 어울리는 공동체적인 풍속으로 예전보다 흥취는 덜하지만 여전히 남아 있다.

한 해 첫 보름이 되는 날을 상원(上元)으로서 으뜸으로 여겨 중요한 세습으로 삼았다. 까마귀에게 밥 준다고 하여 오쟁이나 소쿠리에 오곡밥을 담아 나무와 지붕에 달아 두었다. 까마귀가 먼저 다 먹은 곡식을 중심으로 농사 준비를 하였다. 보름에 나물을 먹으면 여름에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하여 나물을 찬으로 차례를 지냈다. 이를 나물명절이라고 하였는데, 호박고지·무고지·버섯·고사리·토란대·고구마 줄기 등이 주종이었다.

삼월삼짇날을 답청일이라고 하여 화전을 부쳐 먹고 약수를 마시며 화전놀이를 하였다. 화전놀이는 일종의 공동체 생활을 놀이로서 표출한 것이다.

중양절인 9월 9일에는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지붕 위의 박을 따 삶아서 바가지를 만들었다. 박고지는 나물로 무쳐서 개울에서 잡은 물천어를 곁들여 잔치를 벌였다.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동짓날엔 마을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팥죽이라는 새알죽을 같이 먹으며 어려운 이웃들을 위로하기도 한다.

신흥마을은 1925년에 애양병원이 설립되어 병원 관련자들의 숙소 등이 들어서면서 형성되었다.

애양교회 건물은 증개축으로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 않았다. 단지 석조 골격과 창문 형태 등은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서양 선교사에 의해 건축된 여수에서는 보기 드문 건물이었다. 1900년대 초반 한국 선교사(宣敎史)를 살펴볼 수 있는 근대 종교 건축물로서 등록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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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양교회

애양병원 건물은 1926년 미국 포사이트(Wiley H. Forsythe) 의료 선교사가 세운 한센병 환자용 병원이었다. 상부 구조가 다소 변형된 점이 있으나 골조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1999년 애양원역사관으로 수리되어 보존되어 있다. 일반인을 위하여 당시의 의료 기구와 사진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고, 등록 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애양원 건물은 그 자체로도 보존 가치가 있다. 애양원은 1925년과 1928년 두 차례에 걸쳐 이전되었다. 그만큼 애양원이 정착하는 과정에서도 어려움을 겪었음을 징표로서 보여주고 있다. 그간 몇 번의 증개축 과정을 겪었지만 건물 자체는 사료적으로도 매우 의미가 있다.

애양원에는 병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사랑의 동산’으로서 애양원은 90년 가까이 한센병 환자들에게는 아주 반가우면서도 고마운 장소로 통한다. 애양원이 단순히 여수의 특정 지역에 국한되어 온 협소한 지명으로서의 의미를 벗어나 봉사의 산실로서의 그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당시에 그 누구도 신경 쓸 수 없는 상황에서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박애에 입각한 사랑으로 보살핀 덕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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