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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태동기의 어려운 상황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D010103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무성

애양원과 관련된 마을들은 나환자 공동체로서 자연스레 형성되었다. 초기엔 질병이 만연하여 의사인 선교사들만이 이들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피부병 등 일반 서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국가 차원에서 해소할 수 없었다. 의료진의 절대적인 부족과 의약품의 상시적인 부족은 일제강점기에 더욱 극심하였다. 당시 선교사들은 질병의 가장 큰 요인으로 한국인들의 위생 관념 결핍을 꼽았다. 당시 초가집 구조와 화장실에 대하여 한 외국인 의료 선교사는 아래와 같이 표현하였다.

“진흙으로 벽을 쌓았고 지붕은 볏짚이나 기와로 덮여 있지만 너무 낮아서 처마가 땅에서 180㎝에 불과하다. 천장은 낮고 후면을 도로를 향하게 하고 거기에 굴뚝을 내서 연기가 여러분의 코 정도의 높이에서 뿜어 나오는 조그마한 낮은 오두막집을 상상해 보라.

변소는 도랑에 걸쳐 지었지만 그것도 주로 여자들이나 사용하고 남자들과 어린 아이들은 흔히 도로에서 용변을 봐 도로라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사실 도로 전체가 화장실이라고 할 정도이지만 다행히 매년 우기가 오면 자연적으로 씻겨나가서 깨끗해진다. 특히 일본인들이 한반도의 식량들을 강제 공출해 감으로서 영양분 섭취가 극도로 부족하여 당시 한국 사람들은 몸의 저항력이 아주 약한 편이었다.

당시의 열악한 환경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는 항상 풍토병이 도사리고 있었으며 여름이 되면 역병이 만연함으로써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순식간에 앗아갔다. 한국에서는 온갖 종류의 질병이 끊임없이 위협해 왔다. 특히 한센병은 흔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주 혹독한 질병이었다. 오랜 세월 치료 방법이나 진단도 없었으며 감염되면 친지나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길거리로 내쫓겨 다니면서 구걸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손양원(孫良源)[1902~1950] 목사는 1939년 7월 14일 부임해서 목회했으며 1945년 9월 10일부터 10월 15일까지 병원장을 겸임하였다. 일제는 애양원에 대해 초기에는 비협조적이었다가 나중에는 아예 말살하려는 정책을 집요하게 펼쳤다. 일제의 노골적인 탄압으로 애양원의 실질적인 운영자인 윌슨은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일제의 형식적인 운영으로 인하여 애양원은 해방 공간까지 그 기능을 제한적으로밖에 수행할 수 없었다. 1948년에 미국 남장로교의 한국선교회에서 그 운영권을 되찾아 본래 설립 취지에 맞추어 정상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1956년에 재단법인 애양원으로 운영 주체를 바꾸고 한센병 환자들의 사회 복귀를 위한 분야로 관심을 넓혀갔다. 그 성과로서 음성 나환자 227세대를 정착촌에 옮길 수 있었다. 1976년에는 치유된 나환자를 중심으로 인근에 도성농원을 조성하여 자립의 터전을 마련하였으며 시혜적 복지가 아닌 생산적인 복지로 전환하여 능동적인 작업을 계속 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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