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D0202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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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무성 |
1907년 포사이트(Wiley H. Forsythe)와 더불어 나환자를 돌보던 오웬 선교사가 순회 전도 중 급성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오웬의 뒤를 이은 윌슨 선교사가 광주 봉선리에 작은 집을 지어 나환자 10명을 수용하였다. 애양원의 전신인 셈이다. 후에 최흥종과 신정식, 쉐핑과 윌슨 선교사가 모금을 해 나환자 600명을 여천군 율촌으로 옮기면서 애양원이 세워졌다.
유화례 선교사는 1941년 신사참배 문제로 수피아여학교를 자진해서 폐교시켰다. 교육보다 우선한 것은 우상인 신사에 절할 수는 없다는 믿음이었다. 쉐핑과 최흥종 목사를 존경했던 유화례 선교사는 이 땅의 버림받은 이들을 향한 간절한 소망으로 애양원을 찾았다. 윌슨 원장은 이미 선교사 철수 정책으로 떠났고 애양원교회의 손양원 전도사 역시 신사참배 문제로 감옥에 있었다.
4개월간 목자 없는 애양원에 머물며 예배를 인도하고 문둥이들의 친구로 살았다. 대소변을 받아주고 몸을 씻겨 옷 입혀 주면서 도리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였다. 처녀 선교사로 궁벽한 땅에 찾아와 나환자들을 돌보며 정신대로 끌려간 수많은 제자들의 아픔을 달래고 버림받은 이들의 이웃이 되어줄 결심을 하게 된 것은 차라리 축복이었다.
애양원에서 봉사하는 동안, 가깝게 지낸 젊은 나환자 부부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다. 음성 나환자의 자녀는 생후 2년까지 분리 수용하면 전염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아이를 데려다 키우기로 했다. 여아는 겨우 생후 2개월째였다. 이름을 진주라고 지었다. 이전에도 쉐핑이 사내 고아 요셉을 입양했고 뒤를 이어 이일성경학교 교장이 되었던 도마리아 선교사 역시 나환자의 사내아이를 입양하고 이삭이라고 이름을 지은 바 있다.
처녀로 이 땅에 왔던 선교사들은 하나같이 당시의 갈 곳 없던 고아들을 입양하여 자식인 양 키웠다. 진주가 돌잔치를 치른 1942년 8월 25일 유화례 선교사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출국당했다. 그러나 엘리스 섬 건너의 화려한 뉴욕의 야경보다는 두고 온 진주가 내내 눈에 밟혔다.
해방 직후 조선으로 되돌아오려던 유화례 선교사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남장로교 선교부는 허락해 주지 않았다. 아직은 조선의 정세가 불안하다는 이유였다. 이에 동부 지역 여러 주를 돌며 조선 선교에 대한 도전을 하거나 성경을 가르치며 안식을 가졌다.
과거 언더우드 선배가 했던 것처럼 동원 사역을 통해 후원자도 만나고 선교 헌신자를 만나는 등 자신을 돌보는 일에 오히려 인색한 편이었다. 노환에 시달리던 아버지를 뵙고 언제 다시 돌아올 기약조차 없는 조선으로 되돌아가야만 하는 것 또한 선교사의 삶이다.
인간적인 육친의 아픔과 정리조차 내려놓아야 하는 사역자의 고통을 뉘라서 알아 주겠는가? 가슴이 미어지듯 노년의 아버지와 이별하는 눈물 속에도 진주에 대한 그리움과 조선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로 인간적인 아픔을 견디어 낼 수 있었다.
유화례는 5년만인 1947년에 귀환하였다. 도마리아와 함께 광주로 돌아 온 유화례 선교사를 손양원 목사가 애양원으로 초청하여 부흥사경회를 열었다. 집회를 인도하는 유화례 선교사나 손양원 목사도 ‘호남의 성녀 유화례’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는 놀라운 부흥이었다.
지옥 같은 나환자 공동체가 진정한 영성을 회복하고 임재를 체험하는 천국의 시간이었다. 역경과 낮은 곳에 임하시는 주님의 나라, 애양원에 새벽이슬 같은 은혜가 쌓여만 갔다. 유화례 선교사도 할 일이 많은 조선과 조선인이 못내 사랑스러워 진정한 감사가 넘쳐 났다.
해방된 조선의 정정은 여전히 불안하였다. 이념적 갈등에다 친일파와 민족주의자들의 극한 대립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여수와 순천뿐 아니라 광주와 나주는 물론 유화례 선교사가 개척하며 세웠던 주요 지역의 교회 공동체 모두가 혼란의 도가니였다. 믿음의 동역자 손양원 목사도 전쟁중 순교하였다. 형제 잃고 동역자를 잃은 유화례 선교사의 상심을 대신한 것은 나환자들의 찬양과 감사였다. 손양원 목사가 생명처럼 아끼고 사랑했던 애양원의 나환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