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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부터 1910년까지 전라남도 여수의 역사. 1392년 조선 개국시 여수현령 오흔인(吳欣仁)이 신왕조에 불복하였다 하여 1396년(태조 5)에 여수현과 돌산현이 폐지되고 순천도호부에 속한 여수면이 되었다. 소라포부곡은 소라포면, 율촌부곡은 율촌면이 되었으며 삼일포향은 삼일포면으로 개칭되었다. 또한 돌산현은 여수면으로 흡수되고, 인근 섬들은 낙안, 광양, 흥양[현 고흥] 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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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 지역의 가축 사육을 목적으로 만든 목초지, 건물, 목책 등을 설비한 토지. 목장은 국방용·교통용·식용 등으로 일정 동물을 사육하는 곳을 말한다. 조선시대에 목장은 병조 사복시(司僕寺) 소관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별도로 감목관을 두었다가 후에는 지방 수령이 맡거나 도서 지방에 수군이 있는 경우에 해당 수군의 장이 겸하게 하였다. 감목관 아래에는 감목을 두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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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3년 조선과 일본 간에 맺은 무역 조약. 1419년(세종 1) 대마도를 근거지로 하여 말썽을 부리던 왜인들을 정벌한 후, 한동안 조선·일본 사이의 왕래가 중단되었으나 대마도주의 간청으로 다시 부산포(釜山浦)·내이포(乃而浦)·염포(鹽浦) 등 삼포(三浦)를 개항하여 무역과 근해에서의 어획을 허락하면서 후환을 염려하여 종전에 비하여 상당한 제한을 가하는 구체적 조약을 체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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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선조 31)까지 일본의 조선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 남해안 지방에 왜구들이 자주 침략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비변사(備邊司)라는 합좌기관(合坐機關)을 설치하여 대비하기도 하였으나, 선조 때 조정 내부는 대체로 당파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이(李珥)가 10만양병설을 주장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조정에서 각 도에 왜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성곽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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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이순신이 임진왜란을 대비하여 전라남도 여수시 종화동에 축조한 쇠사슬로 만든 방비시설. 철쇄방비시설은 이순신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 2월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여 다가올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 대비해 구축한 방비시설 중 하나이다. 즉, 이순신이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예상하고 만든 방비시설로서 왜구가 야간에 좁은 수로를 지날 때 쇠사슬에 걸려 피해를 입도록 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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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현(지금의 여수시)이 세 번 폐현되었다가 네 번째 복현(復縣)을 이룬 것. 1396년(태조 5)에 조정에서 새로운 왕조(王朝)의 건국에 관한 교지(敎旨)를 전국에 내렸는데, 당시 여수의 현령(縣令) 오흔인(吳欣仁)은 태조의 혁명을 단호히 반대하며 사신을 거절하였다. 이로 인해 태조는 대노하여 여수의 폐현을 명하고 순천부에 예속시켰다. 순천에 예속된 여수 백성들은 훗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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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여수현을 다시 설치하기 위하여 벌인 동맹 운동. 1896년 2월 완도나 돌산 같은 섬마저 군이 되었으나 여수 만은 열심히 복현 운동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설군(設郡) 문제가 실패하여 여전히 순천부 관할에 묶이게 되었다. 이에 형편에 맞지 않은 조정의 처사에 분개하여 1896년 3월 18명이 고장의 비원을 풀기 위해 동맹하였다. 전라남도 여수현에서 발생한 삼복삼파 이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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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여수 지역에 설치한 전라좌도 해안 경비를 담당했던 수영(水營). 전라도 지역에 왜구의 침범이 잦아지자 전라좌도 수군을 강화하기 위하여 1479년(성종 10) 정월에 내례만호진(內禮萬戶鎭)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全羅左道水軍節度使營)이 신설되었다. 전라좌수영의 위치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내례포(內禮浦)로 기록되어 있으며,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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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좌수영 내에 있던 공청 건물.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에 따르면 좌헐소는 3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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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좌수영이 관할하던 행정구역. 전라좌수영이 관할하던 행정구역인 오관오포는 순천도호부(順天都護府)·낙안군(樂安郡)·보성군(寶城郡)·광양현(光陽縣)·흥양현(興陽縣)의 다섯 군현(郡縣)과 방답진(防踏鎭)·사도진(蛇渡鎭)·여도진(呂島鎭)·발포진(鉢浦鎭)·녹도진(鹿島鎭)의 다섯 진포(鎭浦)를 말한다. 전라좌수영 관할 오관오포 가운데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은 흥양현 경내에 일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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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전라남도 여수시 중앙동에 있던 수군기지. 1396년 진례만호진이 설립되어 28년간 계속되어 왔으나 1423년(세종 5) 1월 전라감사가 “도내 진례량의 병선을 내례량으로 옮겨 경상도 우수영[거제도]의 서편을 관장하는 남해도, 평산포만호진의 병선과 마주 대하여 봉화로 서로 연락하는 방어선으로 하는 것이 타당하다.” 는 장계를 조정에 올려 세종이 이를 윤허함으로써 진례만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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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3년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에 설치한 수군 진(陣). 방답첨사진은 지금의 돌산읍 군내리에 있었던, 왜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된 최일선 수군거진(水軍巨鎭)이었다. 원래 돌산은 고려시대까지는 돌산현으로 독립된 행정단위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후 여수현과 함께 폐현시켜 순천부의 일개 면으로 귀속시켜 버렸다. 1523년(중종 18) 전라좌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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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6년 전라남도 여수시 삼일동 신덕포에 있던 수군기지. 조선 건국 당시에는 전라도 해안을 지키는 전라도 처치사영(處置使營)이 옥구(沃溝)에 있다가 1408년(태종 8) 12월에 옥구가 전라도 해안선의 중앙에 위치하지 못한다는 전라도 도절제사(都節制使)의 상계(上啓)에 따라 무안현 대굴포(大堀浦)[전라남도 함평군 학교면 곡창리]로 옮겼다. 수군처치사(水軍處置使) 밑에서 전라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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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덕양리에 있는 전라선과 여천선의 역. 1454년(단종 2)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여수 지역에는 역원이 없고, 1486년(성종 17)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3개가 있었다고 되어 있다. 무상원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덕양역으로 이동한 것 같다. 덕양역은 오수역(獒樹驛) 관할로 리(吏) 222, 노(奴) 86, 비(婢)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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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산곡마을에 있던 역원. 역원은 삼국시대부터 있던 제도로 공문서의 전달과 여행 중인 관리의 숙박 또는 관물의 운송을 담당하였다. 병조의 소관으로 관할 역에는 찰방이 있고 찰방역에는 몇 개의 역이 소속되어 있다. 1454년(단종 2)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는 역원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1486년(성종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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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시 전라좌수영 내에 있던 창고. 겸제창은 전라좌수영 내에 설치된 6칸 창고로,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에 재원의 마련 방법과 사용처가 기록되어 있다. 『호좌수영지』의 기록에 의하면, 겸제창(兼濟倉)에서는 매년 말에 쌀 20석씩을 군향미(軍餉米) 모중(耗中)에서 본창에 갈라 나눠주고 출사(出使)의 양료(粮料)에 보급한다. 감색(監色)은 재임 중에 겸정한 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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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좌수영 내에 있던 공창. 1721년(경종 1) 절도사 박세정(朴世梃)이 창건하였다.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에 따르면 도무창은 13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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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좌수영 내에 있던 공창. 보군창(補軍倉)은 1673년(현종 14)에 절도사 원상(元相)이 창건하였고, 1767년(영조 43) 절도사 김종만(金鍾萬)이 중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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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시 전라좌수영 내에 있던 창고. 조량창은 전라좌수영 내에 설치된 10칸 창고로, 마료(馬料)와 각종 하인마(下人馬)의 공궤(供饋), 고자사령료(庫子使令料), 동서통장료(東西統長料) 등의 지급 등을 맡았다. 『호좌수영지』의 기록에 의하면, 조량창(助粮倉)에 마료조(馬料租) 50석은 동서토민(東西土民)이 연례 납부하여 이것으로 본부 하인 말을 공궤(供饋)하고 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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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좌수영 내에 있던 공창.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에 따르면 주사창은 8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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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시 전라좌수영 내에 있던 창고. 포량창은 전라좌수영 내에 설치된 3칸 창고로, 고자(庫子), 사령(使令), 포군(砲軍), 포수(砲手)에 대한 부료(付料)와 각종 피물의 첨가(添價) 등을 관리하였다. 포량창(咆粮倉)에서는 돈 1,700냥을 생식(生殖)하여 부료(付料) 및 피물(皮物) 첨가로 하고 색리(色吏)를 회계색으로 겸정하고 요조(料租) 1석, 고자(庫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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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좌수영 내에 있던 공창. 1664년(현종 5)에 세워진 건물로 수용군에게서 수취한 액수와 사용처를 적어 놓았다. 해현창은 17칸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전라좌수영 남북의 동선 동측에 위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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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7년(선조 20) 손죽도 앞바다에 침입한 왜구와 전라좌수군이 벌인 전투. 1587년 1월 말경에 일본 규수의 오도(五島)와 평호도(平戶島) 출신들이 탄 왜선 두어 척이 흥양 녹도진[현재 고흥군 녹동] 앞바다를 침범했다. 보통 때 같으면 동남풍이 부는 4월 이후에 왜선이 들어오는데, 이번에는 예상을 깨고 일찍 침범했다. 녹도 만호 이대원이 경황이 없어 주장에게 보고하지도 않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