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310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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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興國寺 應眞堂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흥국사길 160[중흥동 17]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조미선 |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흥국사에 있는 조선 후기 당우.
[개설]
흥국사 응진당은 보물 제1333호로 지정된 「흥국사 십육나한도(興國寺 十六羅漢圖)」를 보관하고 있던 전각이다.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하고 좌우에 십육나한의 소상을 모시고 벽에는 「흥국사 십육나한도」를 봉안하였다.
[위치]
흥국사의 대웅전 뒤편 팔상전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다.
[변천]
응진당은 나한당(羅漢堂)이라고도 하며 석가모니의 열여섯 제자를 모시는 당우이다. 나한은 아라한의 약칭이며 아라한은 응진(應眞)의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석가모니 제자들을 모시는 전각이기 때문에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주위에 십육나한의 소상을 모시는 것이 통례이다. 흥국사 응진당 앞 현판에는 1624년(인조 2) 계특 대사가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유재란으로 폐허가 된 사찰을 중건하고 나서 세운 여수 흥국사 중수사적비(麗水 興國寺 重修事蹟碑)에는 “해파와 정유재란으로 말미암아 집은 무너지고 기와는 와해되어 그 장엄하고 웅장한 전당과 요사들이 완전히 소실되고 상주집물(常住什物)[상주물]은 하나도 남겨진 것이 없어 빈 산에 달만 오락가락할 뿐이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소실된 흥국사를 계특 대사가 재건할 때 응진당도 같이 중창한 것으로 보인다. 흥국사 응진당에 대한 이전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1753년(영조 11) 경파 대사가 중수했으며, 1963년 다시 응봉 대사가 중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2013년 11월~12월 주지 명선이 보수하였다.
[형태]
주지 명선이 2013년 보수하기 전의 흥국사 응진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이었다. 측면에는 크게 풍판을 달았으며 토벽으로 처리하였다. 낮은 죽담을 처마 끝보다 넓게 만들고 세실 청판분합문을 달았다. 낮은 방형 초석에 원형 기둥을 세웠다. 주심포 양식으로 장여를 단순하게 처리하였다.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단순하지만 국화문과 연화문을 장식해서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다른 내부 구조도 지극히 간결하여 소박한 맛을 주었다. 보안이 허술하고 문화재 도난이 빈번해서 「흥국사 십육나한도」는 흥국사 의승수군유물전시관으로 옮겨 놓았다.
보수 후 흥국사 응진당은 정면은 부연을 달아낸 겹처마이고 후면은 홑처마로 구성되었다. 기단은 막돌을 가지런히 놓고 원형 기둥 중앙에는 높은 디딤돌을 놓았다. 빗살문 청판분합으로 문 아래 판벽을 설치해서 문지방이 높아졌다. 천장은 종보 높이에서 마감하고 종량 부분은 우물천장으로 하였다. 벽면에서 종보 높이까지는 빗천장을 사용해 내부 공간을 넓게 보이도록 조성하였다. 빗천장은 양쪽 옆벽 위에서부터 안쪽으로 올려 꼭대기에서 맞붙은 천장 구조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사천장(斜天障)’, ‘합장천장(合掌天障)’이라고도 하며, ‘맞배천장’으로도 부른다. 우물천장은 일반적인 연화무늬와 국화문으로 장식하였다. 빗천장의 경우는 화병과 더불어 피어오르는 꽃을 표현하기도 하고 기하학무늬를 표현하기도 하는 등 고색창연함을 보여 주고 있다. 벽면을 제외한 3면에 단을 조성하고 위계를 고려해 불단을 조정하고 불상을 배치하였다. 불단에는 특별한 장식은 하지 않았다. 불상 뒤 벽면에 6폭의 「흥국사 십육나한도」 영인본을 봉안하였다.
[현황]
2020년 현재 흥국사 응진당에는 보물 1333호인 「흥국사 십육나한도」의 영인본이 봉안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흥국사 십육나한도」는 총 6폭으로 마직 바탕에 채색을 하였다. 1723년(경종 3) 의겸과 천신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할 때 완성한 불화이다. 예술성이 매우 뛰어난 작품으로, 원래의 자리에 보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