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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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분파. 개신교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반발하는 종교개혁에 의해 성립된 루터교, 장로교, 감리교, 성공회 등 기독교의 여러 종파를 총칭하는 말이다. 호남 지역의 기독교 복음 전파에 가장 크게 공헌한 사람은 북장로교 소속의 언더우드 선교사였다. 현재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개신교의 주요 분파로는 장로교, 성결교, 감리교, 침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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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학동에 있는 연극 공연 단체. 극단 파도소리는 문화의 시대에 맞는 삶의 질 향상과 지역공연예술의 활성화, 지역연극인 양성, 지역작가배출과 역사, 인물, 설화등 지역소재를 배경으로 작품을 창작하여 지역문화를 국내는 물론 연극의 K-Culture를 구현하겠다는 취지로 1987년 9월에 창단했다. 1988년 5월 소울사랑방 소극장에서 「고양이가 쥐를 잡네」로 창단공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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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손양원(孫良源) 목사는 1902년 6월 3일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에서 손종일 장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칠원공립보통학교에 다니던 1915년에는 일제의 궁성요배(宮城遙拜)를 거부하여 퇴학당했으며, 서울 중동중학교에 재학 중 아버지가 3·1운동으로 투옥되자 다시 퇴학 처분을 받았다. 1917년 10월에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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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孫良源) 목사는 1902년 6월 3일 경상남도 함안에서 태어나 1919년 서울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20년 부친이 항일 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하였다. 1920년 일본 츠가모중학교[巢鴨中學校]에 다시 입학하여 1923년 졸업하였으며 1926년부터 1934년까지 부산 감만동 나환자 교회에서 조사(전도사)로 시무하였다. 1938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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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두 아들을 떠나보내는 장례식장에서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 속에서 두 아들이 총살당한 계기를 제공한 안재선을 아들로 삼겠다는 그 뜨거운 사랑은 손양원 목사를 대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녹일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손양원 목사는 안재선을 부산 고려성경고등학교에 수학하도록 하여 전도사로 키웠다. 안재선은 성경학교 졸업 후 잠시 부산의 어느 교회 전도사로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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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0월 19일 제주 4·3사태를 진압하기 위해서 여수에 집결했던 군인들 중 사회주의 계열 군인 일부가 봉기하였다. 이들은 불과 네 시간 만에 여수 시내 경찰서와 파출소, 군청, 역 등 주요 기관을 장악하고 이어 순천까지도 점령하였다. 이 당시에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손동인과 손동신은 순천사범학교와 순천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이 두 형제는 학교 안에서 기독교 복음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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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에 있는 손양원 목사의 순교를 기리는 기념관. 기념관은 시옷(ㅅ)자 형태인데, 손양원 목사의 성씨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삼위일체를 상징하며 동시에 손양원 목사와 그의 두 아들들을 상징하기도 한다. 건물 벽 12면은 이스라엘 12지파와 예수의 12제자를 상징한다. 6계단은 안식일에 들어가는 과정을 상징한다. 천정의 원뿔은 신자가 하늘을 향해야 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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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섬과 전형적인 리아스식 해안을 자랑하고 있는 여수시는 다양한 볼거리는 물론 역사와 문화적인 면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특히 비취빛 바다 위에 점점이 떠 있는 317개의 섬 하나하나가 신비로울 만큼 아름답기에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한려해상국립공원과 다도해해상국립공원 등 두 개의 해상국립공원이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여수항을 ‘동양의 나폴리’라 부르는 것은 상업항과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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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양원이라는 한센병 집단 치료소는 병을 고치는 공간인 동시에 한센병 환우들의 삶과 눈물, 기쁨과 슬픔이 함께 있는 곳이다. 대다수의 한센병 환자들은 가족과 헤어지는 아픔이 있고 더 나아가서 사회로부터 멸시당하는 고통이 있었다. 심적인 아픔은 육체적 아픔보다도 더 컸으며 이로 인한 영적인 왜곡은 심각한 병으로 전환될 수 있었다. 우월순 의사는 영적인 치유를 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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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에 있는 인공 관절 치환 수술을 전문으로 하는 사회복지법인 병원. 한센병 환자 및 일반장애인들에게 의료적, 직업적, 정신적으로 재활을 도모하고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는 등 전인치유의 사업을 수행함으로써 복지사회 건설에 기여하고자 설립하였다. 1909년 포사이트 선교사가 길에 쓰러진 나환자를 치료한 것이 본원 설립의 동기가 되었다. 1911년 4월 25일 당신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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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 목사는 1948년 10월 25일, 여순 사건으로 두 아들이 잃게 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여순 사건은 빨리 진압되어 바로 정세가 바뀌어서, 손동인·손동신 형제를 죽인 자들 중의 하나인 안재선이라는 학생도 체포되어 총살당할 처지에 놓였다. 그 소식을 들은 손양원 목사는 계엄사령관에게 찾아가서 석방을 간청하였다. “내 죽은 아들들은 결코 자기들 때문에 친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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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덕양리에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소속 교회. 기록이 소실되어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원로 교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선교사 변요한이 순천과 우학리 교회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시절 늘 역참(驛站)이 있던 덕양리에서 말을 바꿔 타고 다니면서 교회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건립하게 되었다고 한다. 예배와 전도, 교육, 봉사, 국내 및 국외 선교 사업을 하기 위해 설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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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포사이트(Wiley H. Forsythe)와 더불어 나환자를 돌보던 오웬 선교사가 순회 전도 중 급성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오웬의 뒤를 이은 윌슨 선교사가 광주 봉선리에 작은 집을 지어 나환자 10명을 수용하였다. 애양원의 전신인 셈이다. 후에 최흥종과 신정식, 쉐핑과 윌슨 선교사가 모금을 해 나환자 600명을 여천군 율촌으로 옮기면서 애양원이 세워졌다.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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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양원과 관련된 마을들은 나환자 공동체로서 자연스레 형성되었다. 초기엔 질병이 만연하여 의사인 선교사들만이 이들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피부병 등 일반 서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국가 차원에서 해소할 수 없었다. 의료진의 절대적인 부족과 의약품의 상시적인 부족은 일제강점기에 더욱 극심하였다. 당시 선교사들은 질병의 가장 큰 요인으로 한국인들의 위생 관념 결핍을 꼽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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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말쯤 손양원 목사, 김정복 목사, 애양원교회 당회, 소록도교회 당회, 상애교회 당회, 대구애락교회 당회가 모여 한센 지도자 양성을 위해 한성신학교를 설립키로 하였다. 손양원 목사는 이를 위해 부흥 집회 때 받은 사례금을 적립해 왔으나 마무리 못하고 순교하였다. 남은 사람들이 유지를 받들어 1955년 4월 한성신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나 1959년 3월 26일 제1회 졸업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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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부터 현재까지 전라남도 여수의 역사. 1949년 6월 여수항의 개항이 선포되고, 같은 해 8월 여수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나머지 지역은 여천군이 되어 여수시와 분리되었다. 1973년 여천군 돌산면 경호리가 여수시에 편입되어 경호동이 신설되었다. 1980년 12월 1일에 돌산면과 삼일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6년 1월 1일 여천지구 출장소가 여천시로 승격되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