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02161
한자 麗水-裨補寺刹-興國寺
영어의미역 Heungguksa Temple which has the Hidden Treasure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기관 단체/사찰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17[흥국사길 160]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진옥

[개설]

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영취산(靈鷲山)에 있는 흥국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華嚴寺)의 말사이다. 1196년(명종 26) 지눌(知訥)이 창건하였으며, 나라가 흥하면 이 절도 흥할 것이라는 흥국의 염원을 담고 있어 흥국사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의승수군(義僧水軍)의 주진사로 쓰이는 등 호국불교의 성지로 불린다. 절 일원이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38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보 사찰로 우뚝 서다]

임진왜란 때 전라좌수영과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될 정도로 여수시는 예부터 군사적 요충지의 하나였다. 이러한 중요성을 예견했을까, 고려시대 대표적인 승려인 보조국사 지눌은 20대의 비구로 전국의 고승들이 모인 담선법회에서 “부처님이 가신 지는 오래됐지만 법은 멀고 가까움이 없다”고 백여 명의 고승들에게 수행할 것을 일갈한 뒤에, 팔공산의 거조암에서 결사하고 난 후 수행처를 찾다가 여수 앞바다의 금오도에서 신이한 노승의 안내로 지금의 흥국사 자리를 찾게 된다.

이때 지눌흥국사까지 온 행로를 살펴보면, 금오도에서 뱃길로 돌산도 군내에 도착한 뒤 군내의 군영이 아닌 뒷산 기슭의 은적암터에서 쉬고 다시 뱃길로 돌아 여수에 도착하여 육로로 마래산에 있는 석천사 길로 상암을 거쳐 흥국사에 이른다. 그리고 현재의 흥국사 자리에 절을 지으면 국가의 흥망성쇠와 같이 한다는 신인(神人)의 말에 따라 비보사찰로서 흥국사를 건립하게 된 것이다. ‘흥국(興國)’이란 절이름 역시 여기에서 연유하였다.

지눌은 처음 흥국사 터를 잡은 뒤 토굴을 마련하였고, 법당과 요사채를 지은 것은 제자들이었다. 흥국사는 1560년 법수가 주지가 된 이후 절의 규모가 커져서 임진왜란 때에는 승군의 본영인 주진사가 되었으나 정유재란 때 모두 불에 탔다. 그리하여 전쟁이 끝난 후에 복구되어 지금에 이른다.

흥국사는 절로 들어가는 입구가 옛날에는 일주문이 없이 공북루가 먼저 나타났는데, 우리나라 사찰에서 이런 구조는 찾기가 힘들다. 공북루는 일종의 성문으로서, 예전에는 남쪽 성문을 진남이라 하고 북쪽문을 공북이라 했다. 이는 임금이 북쪽에 있으므로 예를 갖춘다는 뜻이다. 이렇듯 성문이 사찰의 일주문처럼 있었다는 것은 승군이 군사체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지금은 성문이 없어졌지만 성곽은 일부 남아 있으며, 이때의 현판은 유물관에 잘 보존되어 있다. 공북루와 함께 지금은 없어진 것이 영성문이다. 성인을 맞이한다는 의미의 영성문은 흥국사 앞 시내를 건너지르는 수박다리 형식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몇십 년 전 큰 수해 때 떠내려갔다고 한다.

흥국사는 진달래 축제가 열리는 진례산영취산[일명 영축산]의 두 봉우리를 주봉으로 하고 서북쪽으로 돌려 내리다가 멈춘 곳에 대웅전이 있는데,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전쟁이 끝난 후에 삼백여 의승군이 복구하였으나, 대중이 많아지자 1690년에 지금의 대웅전을 짓고 먼저 있던 대웅전의 목재를 수습하여 팔상전을 지었다고 한다. ‘흥국’의 사찰답게 흥국사를 보호하는 신장인 사천왕문 역시 어느 절 못지않게 장엄하고 크다.

[누란에 처한 나라를 구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병역의 의무와 상관없이 해전에 참가했던 비정규적 수군 병력은 토병(土兵)과 포작(鮑作), 노예 등 다양하였다. 그밖에도 당시 연해 지역에 거주하던 전직 관료와 무과 출신 유생들과 승려 등 다양한 계층의 장정들이 자발적으로, 혹은 수군 지휘부의 독려에 의해 직접 해상전투에 참전하거나 해안 지역을 무대로 유격전을 전개하였는데, 그중에서 가장 눈부신 활약을 보인 것이 흥국사 등의 승려들로 구성된 의승수군이었다. 나라의 안정과 융성을 기원했던 기도처로서, 불법보다 호국을 우선으로 창건된 흥국사의 면모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중의 1593년 1월 26일자에 쓰여진 ‘장계’를 보면,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8월에서 9월 사이에 의승수군이 조직되었다고 쓰여 있다. 1594년 1월에 쓰인 ‘장계’에도 의승수군이 자원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스스로 군량미를 조달하고 있다고 전한다. 여기에서는 또 1592년에 규합되었던 승군 조직이 동절기에 흩어졌다가 이듬해에 다시 모여 상설 조직으로 바뀌었음이 나타나고 있다.

전라좌수영 산하의 의승수군’은 총체적인 군사활동은 이순신의 지휘를 받으며, 전투 임무는 의병 내지 관군과 유기적인 관련하에 수행되었다. 당시 이순신이 관할하는 전라좌수영 산하에서 활동했던 의승수군의 성격과 활동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전라좌수영 산하에 조직된 의승수군은 선조의 요청에 의해 휴정(休靜)[1520~1604]과 유정(惟政)[1544~1610], 각성(覺性)[1575~1660]으로 이어지는 전국 규모의 의승군 조직과는 무관하다. ‘전라좌수영 산하의 의승수군’이라는 이름이 말해 주듯, 이후 이들에 대한 봉작(封爵) 등의 관리도 독자적으로 행해졌다.

둘째, 조직은 이순신의 규합에 호응하는 형식으로 만들어졌으나 ‘자원’에 의해 의병활동을 행하는 것이므로 군량미 등을 스스로 조달하는 등 충의거병(忠義擧兵)하는 의병의 본질을 견지하였다. 흥국사 등에서 전해 내려오는 사찰 사료에 의하면, 군사활동에서 특이한 점은 군사행동에서 수행승단(修行僧團)의 조직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승대장이 좌수영의 전략에 따라 승장을 지휘하는 체제가 성립되었으며, 각처에는 승군의 주둔 사찰이 있었다.

셋째, 의승수군 조직은 1592년 8~9월에 4백 명으로 조직되었다가 이듬해 재조직되었으며, 이후 상설군으로 조직화된다. 승장을 도장(都將)과 격장(擊將)으로 구분한 것은 지휘 체계가 있었음을 말해 주는데, 도장이 승대장(僧大將), 즉 도총섭(都摠攝)이며 후자가 승장, 즉 총섭이었다. 이를 주진사와 대비하면 본영(전라좌수영)이 있는 여수의 흥국사에 도대장, 내륙 경략의 거점인 순천의 송광사에 도대장, 예하의 구례 화엄사에 격장이 주재하였다. 화엄사에서 석주관과 팔량재, 담양의 금성산성과 장성의 입암산성, 그리고 강화도에까지 승장을 파견하고 있어서 지휘 계통이 분명했음을 알 수 있다.

넷째, 1597년의 석주관전투에서 의승군 153명이 전몰(全歿)한 기록도 보이듯이, 의승수군들은 이순신이 이끄는 전투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전과를 올렸다. 위의 두 ‘장계’에 승장들의 전공이 기록되어 나타나고 있는데, “청상의병제장상(請賞義兵諸將狀)”이라 한 것처럼 의승수군들의 공적을 찬탄한 것이 곳곳에 보인다. 이 때문에 전라좌수영 산하의 의승수군은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에도 상설군으로 편제되어 흥국사에 주진하며 훗날 병자호란 등에 나아가 활약을 한다.

이렇듯 흥국사를 중심으로 활약했던 의승수군이 있었기에 흥국사에는 의승수군과 관련한 문화재들이 많이 전한다. 최근에 발견된 상량문류를 제외하고도 전충무공필 현판(傳忠武公筆懸板) 공북루와, 승군이 주하던 산내의 각 암자, 승장 부도, ‘좌영(左營)’이라 음각된 와당 등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흥국사의 어느 곳이나 나라를 위해 몸바친 의승수군의 호국 얼이 간직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충무공전서』나 흥국사에 남아 있는 사료에 의하면,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흥국사에 주진한 의승수군은 평시에는 축성과 수성(守成), 제지(製紙), 제와(製瓦), 무기 제작 등에 종사하였다. 전라좌수영에서는 ‘완문(完文)’을 내려 당시 주진의 의승군을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의 승군과 같이 예우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사찰에 피해가 가거나 민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단속하고 있음도 확인된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전라좌수영이 폐영되면서 해체될 때까지 의승수군은 호국 승병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승려의 본분을 다하다]

승려들의 현실 참여가 시대 상황에 따라 방편을 베푸는 사리(事理)에 관한 것이라면 출가 승려의 본분은 뭐니뭐니해도 수행이 아닐 수 없다. 현실 참여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승려로서의 본분을 잃는다면 그 빛을 잃게 마련이다.

흥국사 승려로서의 본분인 수행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째가 『법화경(法華經)』 독송이다.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예부터 『법화경』을 호국의 삼부경으로 인식해 왔는데, 이 때문에 나라의 안정과 융성을 기원했던 기도처로, 불법보다 호국을 우선으로 창건된 사찰답게 『법화경』을 독송했던 것 같다. 그 전거가 유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법화경』 3백 권(전 5권 가운데 1권만 있음)과 경판으로서, 이는 호국의 기치와 수행을 일치시키고자 하는 대승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두 번째는 참선을 행했다는 점이다. 소의경전(所依經典)[불교에서 신행과 교의(敎義)의 근본 경전으로 삼아 의지하는 경전]으로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를 교재로 사용하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 흥국사는 참선의 도량이기도 하였다. 이는 현재 남아 있는 선방인 심검당과 적묵당의 이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심검당은 마음의 번뇌를 보검으로 끊는다는 뜻으로, 심검당이란 이름에 나오는 ‘검’은 선가에서 지혜 방편을 말한다. 또한 적묵당은 번뇌를 끊어 고요해진 경계를 의미하듯, 두 요사채 모두 화두선을 행했던 공간임을 알 수 있다.

세 번째로 흥국사에서는 임진왜란 때 바다와 육지에서 죽은 수많은 영혼들말고도 거친 바다를 생활터전으로 삼다가 죽은 백성들의 고혼을 천도하기 위해 임진왜란 이후 지금까지 3백여 년 넘게 위령재를 지내고 있다. 흥국사에는 수륙재와 관련한 유물로서 보물로 지정된 괘불탱화는 물론이고, 수륙재문과 수륙재문 경판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네 번째로, 흥국사에서는 1896년 전라좌수영이 폐영되면서 의승수군 역시 해체되자 ‘만일염불회’를 개설하여 원통전에서 중생을 위한 발원과 참회, 그리고 성불을 위한 노력을 놓치지 않고 있다. 개창된 지 8백 년이 넘었지만 흥국사는 국가와 중생을 위한 비보의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