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31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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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미역 | Old Tale of Jinju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집필자 | 안동준 |
[정의]
진주지역에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옛이야기
[진주 지맥을 끊은 무학대사]
조선 초기에 진주에는 강씨·하씨·정씨로부터 인물이 많이 나왔다. 그래서 이성계는 진주 사정을 잘 아는 무학대사(無學大師)를 시켜 이곳의 지리를 살피게 하였다.
무학대사가 내려와 진주성에서 대봉산(大鳳山) 쪽을 바라보니 천하의 명당 자리였다. 대봉산은 “큰 봉황새가 사는 뫼”란 뜻인데, 무학대사는 이 산이 있기 때문에 진주에서 인물이 많이 난다고 판단하였다. 이를 어떻게 할까 하고 지맥을 자세히 살펴보니, 산의 기운이 대룡골과 황새등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에 대사는 대룡골과 황새등을 잇는 지맥을 끊고, 내친 김에 산의 이름도 비봉산(飛鳳山)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봉황새가 날아가 버려 정기가 빠진 산”이란 뜻으로 그렇게 고쳤던 것이다.
그리하여도 무학대사는 안심이 되지 않았다. 비봉산 밑에 봉이 산다는 서봉지(棲鳳池)란 못이 있었는데, 그 못도 ‘가마못’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가마는 가마솥의 준말이다. 곧 가마솥처럼 펄펄 끓는 뜨거운 못에 봉을 삶는다고 이름을 붙여 놓아 봉황새가 이쪽 산에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나라에서 무학대사란 큰 풍수를 보내 진주의 지맥을 끊어놓자, 강씨 집안에서는 큰 걱정이 생겼다. 나라에서 하는 일을 나서서 막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마냥 앉아서 두고 볼 수만도 없었다. 그래서 강씨 집안에서는 봉황새를 다시 불러올 수단으로 봉의 알자리를 만들었다. 봉의 알자리를 만들면 날아갔던 봉이 제 알자리가 있으니까 그 자리로 다시 내려올 것이라는 생각에서 만들었던 것이다.
지금 비봉산을 마주보는 상봉서동 주택가 평지에는 흙으로 쌓아올려 산과 같이 되어 있고, 그 복판이 패여서 마치 새가 알을 낳는 자리처럼 되어 있는데, 이곳이 ‘봉알자리’이다.
[의적 강목발이]
조선 말 고종 무렵의 이야기이다. 대곡면 설매실에 목발을 짚고 삼간집을 뛰어 넘어 다녔다는 강목발이라 하는 사람이 있었다. 강목발이가 클 때는 아버지는 돌아가 없었고, 아버지 아우인 숙부 밑에서 글을 배웠는데, 머리는 영리하였지만 글공부는 게을리하였다. 숙부가 글을 가르쳐주는 것은 귓전으로 흘려들으며 쉬는 시간만 기다리고 있다가는 나가서 놀았다. 숙부가 기가 차서 그 노는 모양을 살펴보니, 장난을 해도 꼭 도둑질놀이만 했다. 아무리 글을 가르쳐도, 글은 강목발이 마음에 없었다. 한번은 강목발이가 들어온 것을 보고 엽전을 방바닥에 던져놓고 자기가 모르게 가져가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강목발이는 잠깐 밖으로 나갔다가는 다시 들어왔다. “작은 아부지, 가 갑니더.”그 말을 하는 사이에 방바닥의 엽전이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발바닥에다가 보리밥알을 이기어 붙이고 발꿈치를 들고 들어와서는 숙부가 한눈을 판 사이에 발바닥에 붙여 나갔던 것이다.
강목발이가 남의 눈을 속이는 나쁜 짓을 한다고 주위 사람들이 말하여도 믿지 않았던 숙부는 그게 사실임이 눈앞에 드러나자 홧김에 목침으로 그의 발목을 내리쳤다. 강목발이는 이때 발목을 다쳐 목발을 짚고 절룩거리며 다니게 되었다.
강목발이는 자라면서 진주를 자주 드나들었는데, 그 길목인 단목리 단목마을에는 꽤 부자로 알려진 하백립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 강목발이는 진주를 오가며 종종 이 부잣집을 털었는데, 귀신같이 자취를 남기지 않는 강목발이가 덜미를 잡힐 일이 없었다. 하 부자는 강목발이의 소행인 줄 뻔히 알면서도 증거가 없으니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도둑이 드는 날이 하루 이틀도 아니었다. 마침내 어느 날 하백립은 힘이 장사로 알려진 하인 상쇠에게 강목발이를 잡아오도록 명령을 내렸다. 강목발이는 하 부잣집에서 잡으러 왔는데도 전혀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잡혀갔다. 그는 심한 꾸중을 듣고는 뉘우치는 듯하였다. 하지만 얼마 뒤 또 도둑질을 하기 시작했고 자주 붙잡혀갔다. 그러자 이제 하인들도 강목발이를 잡으러 가는 것이 그만 귀찮아졌다.
하루는 강목발이를 잡아 온 하인 상쇠가 드디어 참지 못하고 집안에 있는 맷돌을 치켜들고 말했다. “샌님, 이눔, 귀찮아서 마 쥑이 삘랍니다.”말을 끝내자 바로 강목발이를 맷돌로 내리쳤다. 그때 곁에 있던 하 부자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질렀다. 맷돌을 내리치는 순간, 강목발이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어느 새 건너편 밤나무 위에 올라 서 있었다.
강목발이란 의적의 신화가 영·호남 일대에 널리 퍼져갈 때, 진주 인근에서 살 만하다고 소문난 집들은 모두 도둑을 맞았고, 대신에 가난한 집에는 쌀이며 돈이 쌓였다. 관아에서 피해자를 불러 조사를 해보면, 한 결 같이 외다리의 소행이라고 진술하였다. 관아에서는 그 도둑이 강목발이라는 것을 미루어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물증은 잡을 수가 없었다. 강목발이는 사건이 터질 때마다 목발을 짚은 채 절뚝거리며 관아에 잡혀와 한 마디 말도 없이 묵묵히 옥살이를 하곤 하였다. 결국 증거가 드러나지 않아 언제나 다시 풀려났다.
하루는 꾀가 많은 형리(刑吏)가 강목발이에게 밥 한 그릇 먹을 동안 진양성을 세 바퀴만 돌아 주면, 모든 허물을 벗겨준다고 말했다. 강목발이는 귀가 솔깃하여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리고 옥에서 풀려나자마자 외다리로 축지술을 써서 눈 깜짝할 사이에 진양성을 세 바퀴나 돌아버렸다. 일이 이렇게 되자 의적의 정체가 강목발이로 판명되고 진주관아에서 사형을 당하였다.
[대사지와 산청 오일봉]
진주지방에서는 어떤 일을 제 마음대로 할 적에 “산청 오일봉이 제 말 제 타고 간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어느 봄날, 진주목사가 인근 고을 원님들을 초청하여 북장대에 올라 앉아 연꽃이 여기저기 피어 있는 진영(鎭營)못을 내려다보며 놀고 있었다. 기생을 불러 놓고 흥겹게 노래 부르고 춤도 추며 즐기고 있는데, 산청 오일봉이 갓끈도 없는 갓을 쓰고 고삐도 없는 말을 혼자서 타고 못 옆으로 건들거리며 지나갔다. 진주목사가 화창한 봄날 모처럼 밖에 나와 즐기는데 웬 놈이 겁도 없이 말을 타고 지나가는 것을 보니 분기를 억누를 수 없었다. “저 놈 잡아 오너라!”관속이 육모방망이를 꼬나들고 못 둑으로 달려 나왔다. “니가 말을 탈 데 가 타야지 여게는 몬 탄다.”
산청 오일봉은 그 말을 듣고 도리어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나라에서 국상(國喪)이 났다고 하는데 놀음이 다 뭐꼬!” 북장대에 앉아 있던 사또가 깜짝 놀랐다.
“산청 오일봉이 제 말 제가 타고 가는데, 응, 잔소리가 만타꼬! 국상이 났는 줄도 모르고 노는 것은 또 뭐꼬!”오일봉이 계속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니, 모여서 놀던 사람들은 모두 후환이 두려워 뿔뿔이 흩어졌다.
당시 진주목사가 놀던 진영못은 신라 혜공왕 2년(766)에 조성되었다고 하는 대사지(大寺池)로서, 1930년대 일제가 진주성 외성 전부와 내성의 성곽 일부를 헐어내어 지금의 중안초등학교 앞쯤부터 경찰서 일원까지 걸쳐 있었던 이 못을 메워버렸다고 한다.
[월아산과 금호못]
금산면 용아리 용심마을에 가면 그 앞에 금호(琴湖)못이 있고, 뒤편에 월아산(月牙山)이 있다. 월아산은 진주의 명산 가운데 하나로서, 달이 돋을 때 남북으로 솟은 두 봉우리의 산이 달을 토해내는 듯이 보이므로 그렇게 이름 지었다고 한다. 본래의 이름은 달엄산이다. 달엄산의‘엄’은 어금니의 옛말이다. 일설에는 큰 홍수가 나서 천지개벽할 때 달엄산이 초생달처럼 그 끝이 남았다고 하여 달엄산이라 하기도 한다.
이러한 월아산 아래에 있는 금호못은 일명 금산못이라고도 한다.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금호못을 둘러봤느냐?”고 묻는다고 한다. “안 둘러봤다.”고 하면 게으른 놈이라고 벌을 내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름이 난 못이다. 이 금호못에 월아산 두 봉우리가 비친 모양은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여기에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아주 오랜 옛날에 하늘에서 착한 청룡과 나쁜 황룡이 한데 엉켜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때 우연히 그 싸움을 본 한 장사가 용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싸움하지 마라!”고함소리에 깜짝 놀란 청룡이 장사를 내려다보는 순간, 황룡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청룡의 목에 비수를 찔렀다. 칼에 찔린 청룡이 땅에 떨어지면서 꼬리를 치니, 용의 꼬리를 맞은 자리는 크게 쓸려나가 그 자리에 큰 못이 생겼다. 그 못이 금호못이다. 금호못은 청룡에 의해 생긴 못이기에 물이 항상 푸르다고 한다.
금호못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유서 깊은 월아산 청곡사가 있다. 청곡사의 유래도 금호못의 용과 관계가 깊다. 금호못에 청룡이 살았는데, 어느 날 월아산 두 봉우리 사이에 보름달이 떠올랐다. 못 가운데서 놀던 청룡은 달을 여의주로 잘못 알고 뛰어올라 덥석 깨물려다가 월아산에 받혀서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때 움푹 파진 자리에 지은 절이 지금의 청곡사이다.
[용다리에 얽힌 이야기]
용다리는 그 옛날 진주성의 동문을 들어가는 길목이었으며 인근에 소전거리, 곧 우시장이 있었다. 이 용다리에는 어느 머슴이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미쳐서 죽은 슬픈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에 이씨 성을 가진 군수가 있었는데, 아들 복이 없어 딸만 셋 두었다. 그 가운데 둘째딸은 시집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죽어서 친정에 돌아와 수절을 하고 있었다. 그때 군수의 집에는 돌쇠라는 우직한 하인이 있었다. 그는 군수의 둘째딸이 돌아온 뒤부터는 더욱 더 열심히 일하고 집안의 잡일도 말없이 거들어주었다.
한편, 젊은 나이에 일찍 남편을 잃고 홀로 긴 밤을 새우던 군수의 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을 써주며 친절히 대하는 돌쇠가 어쩐지 좋게 느껴졌다. 그러나 신분이 다른 두 사람의 사랑은 어느 누구에게도 드러내 보일 수 없었다.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마주하는 가까운 사이였지만, 두 사람은 벙어리인 양 가슴만 태우고 손목 한번 잡아보지 못하였다. 속만 태우던 군수의 둘째딸은 시름시름 상사병으로 앓다가 그만 죽고 말았다.
미칠 것 같은 돌쇠는 진주성에서 선학재를 넘어 장사를 지내러 가다가 길목인 용다리 위에서 개울물을 들여다보면서 둘째아씨를 애타게 부르다가 그만 미쳐버렸다. 함께 용다리를 지나던 하인이나 일꾼들은 아씨가 죽어 슬퍼하는 줄만 알았지, 짝사랑하고 있는 줄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였다. 군수도 딸을 잃은 뒤 이곳에 정이 떨어지자 충청도로 벼슬자리를 옮겨 떠나고자 하였다. 그가 진주를 떠나면서 용다리를 건너가는데 뒤따라 와야 할 돌쇠가 보이지 않았다. 사람을 놓아 찾아보니 벌써 돌쇠는 다리 옆 고목나무에 목을 매달고 죽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여태까지 조용하던 용다리 밑 개천에서 수천 마리나 될 듯 한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려오는데, 마치 미친 돌쇠가 중얼거리며 울부짖는 소리 같았다.
그 뒤부터 용다리 밑에는 진주에서 개구리가 제일 많이 모여 우는데, 짝을 지은 남녀나 부부가 지나가면 개구리들의 울음이 끊겼다고 하며, 상사병에 걸린 사람이 용다리를 두 번 왔다 갔다 하면 씻은 듯이 병이 나았다고 한다.
[처녀골 처녀귀신]
진주성 동쪽 기슭을 흘러가던 남강물이 오른쪽으로 휘돌아나가는 곳에 병풍을 두른 듯 절벽이 펼쳐져 있다. 이곳을 ‘뒤벼리’라고 이르며, 뒤벼리가 끝나는 동쪽 편에 골짜기가 나오는데, 진주에서는 이 골짜기를 흔히‘처이골’ 또는 ‘처자골’로 부른다. 함안조씨 문중에서 지은 제각(祭閣)이 있는 이 골짜기에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들어가기를 꺼려하는데,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조선 중엽 진주의 원님 딸이 세도가 있는 함안조씨 가문의 총각에게 시집가기로 혼인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처녀가 갑자기 병이 들어 덜컥 죽고 말았다. 처녀의 집에서는 함안 총각 집에 아무런 기별도 하지 않아서 조 도령은 아무 것도 모르고 과거공부만 하고 있었다.
그 무렵에는 혼인을 앞둔 처녀가 죽으면 혼백을 따로 모시는 풍습이 있었다. 부모가 살아 있으면 위패를 만들어 그 영혼을 삼 년 동안 안치하는 것이었다. 죽은 처녀의 아버지가 어느 날 위패를 벽장 안에 넣어 놓으니까 그 날 따라 위패가 안에서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하였다.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처녀의 아버지가 들여다보면 위패가 엎어져 있고, 다시 돌아서면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하였다.
처녀의 아버지가 엎어져 있는 위패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몇 차례나 일으켜 놓다보니 어느 새 땅거미가 내리는 저녁이 되었다. 그때 어디서 말 울음소리가 들리고, 얼마 뒤 관복을 입은 젊은 벼슬아치가 집으로 들어왔다. 그 벼슬아치는 불쑥 들어와 이름을 일러주어도 누군지 기억할 수 없었다. 이상하다 싶어서 아버지가 무슨 함자(銜字)를 쓰는가 하고 다시 물어보고는 약혼한 그 총각인 듯싶어서 하는 수 없이 딸이 죽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벼슬아치가, 자기는 그런 줄도 모르고 한양 가서 과거에 장원급제를 해서 내려오는 길이라고 하였다. 조 도령은 고향으로 내려오는 도중에 정혼녀의 집에 들렀던 것이다. 처녀의 아버지는 그동안의 자초지종을 말해주고 처녀의 위패를 대청 위에 있는 장방에다 모셔 놓았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조 도령은 장방문을 열면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위패 씌운 것을 벗기려고 하는데 위패가 그만 조 도령의 도포자락으로 폭 들어가 버렸다.
이에 조 도령이 혼인날을 받아 달라고 고집해서 처녀의 혼백하고 혼인을 했다. 그 뒤 재취 장가를 들려고 혼인 말이 오가는 어느 날, 문득 지붕 위에 바가지만한 불덩어리가 보였다. 이 일이 있은 뒤 다른 처녀와 혼인을 했다. 어느 날 재취 부인이 아이를 낳으려고 했던지 태기가 있었는데, 또 다시 바가지만한 불덩어리 일곱 개가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 뒤 부인은 아들 일곱을 낳았다고 한다.
[나막신쟁이날]
옛날에 옥봉동 말티고개 언덕바지에 마음은 착하고 사람됨이 유순한 나막신쟁이가 살고 있었다. 나막신이란 나무를 깎아 만든 밑이 높은 나무신을 말하는데, 옛날에는 이것을 비가 올 때나 눈이 올 때 장화처럼 신었다. 나막신쟁이는 살림이 구차하고 식구는 많아 생활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부지런한 사람에게는 가난도 못 따라 온다는 속담이 있긴 하지만, 못 사는 사람이 한 밑천 모아서 잘 살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어려운 일이었다.
나막신이 잘 팔리는 여름도 가고 눈이 오는 겨울철도 다 지나 입춘이 오려 하는데 나막신은 팔리지 않으니 하루 세 끼가 아니라 한 끼의 밥도 큰 걱정이었다. 나막신쟁이는 장날이라 하나 별 신통한 수도 없어 돈 못 번 빈손으로 탈래탈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때 마침 진주성 안에 사는 부자가 어떻게 잘못되어 관가에서 곤장 서른 대를 맞게 되었는데, 대신 매 맞을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었다. 주막집 앞을 지나가다 우연히 이 말을 듣게 된 나막신쟁이는 성 안에 들어가서 그 부잣집을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대신 매 맞을 사람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나막신쟁이는 자기 몸을 돈 석냥에 팔고 관가에 가서 매를 맞기로 약속했다. 그 집에서는 나막신쟁이의 처지를 생각하여 평소보다 일찍 저녁을 먹여서 관가로 보냈다.
그러나 평소에 제대로 먹지 못한 나막신쟁이가 한 끼를 잘 먹었다고 해서 피골이 상접한 야윈 몸이 갑자기 회복될 리가 없었다. 부모와 아내, 그리고 자식을 굶기지 않으려 하는 마음에서 단돈 석 냥에 튼튼한 장정도 이기기 어려운 곤장 서른 대를 대신 맞다가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한 참 만에 정신을 차린 나막신쟁이는 겨우 몸을 일으켜 말티고개로 넘어오는 도중에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집에서 애타게 그를 기다리던 가족들은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모두 찾으러 나섰다. 하지만 밤길이 어두워 찾지 못하고 집으로 되돌아왔다. 다음 날이 되어서야 찾긴 했지만, 나막신쟁이는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다. 꽁꽁 언 손에는 돈 석 냥을 꼭 쥐고 있었다.
나막신쟁이가 죽자 이상하리만큼 모진 바람이 불었고 날씨도 유난히 추웠다. 그리고 나막신쟁이가 죽은 그 날로부터 꼭 일 년이 되면서부터 해마다 거르지 않고 반드시 가장 추운 날이 되돌아왔다. 언제부터인가 이 날을 진주 사람들은 ‘나막신쟁이날’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바로 음력으로 섣달 스무 이튿날, 한 해 마지막 장날이 그날이다.
[울고 있는 돌]
고려 공민왕 시절, 각 군읍에 성지 수축의 명령을 내렸을 때의 일이다. 그 즈음 흙을 쌓아 만든 진주성이 여러 차례 왜구의 침입을 받고 많은 피해를 입었던 터라 조정에서도 아예 이를 튼튼한 돌로 개축하려고 하였고, 진주성 백성들도 자진하여 진주성을 새로 쌓자고 발 벗고 나섰다. 인근 백성들까지 동원되어 돌을 나르는 등 전쟁을 치르다시피 하여 성을 개축하기 시작했고, 산중의 스님들까지 참가하여 드디어 역사(役事)를 마쳤다.
어느 날 축성에 참여했던 한 스님이 명석 광제산 광제암(廣濟庵)으로 돌아가려고 동전마을을 지나다가, 산 위에서 빠르게 굴러오는 바윗돌 두 개를 만났다. 그 스님은 진주에 갔다가 올라오고, 돌은 산에서 내려가는 길이었다. “오데 가내?” 스님이 묻자 두 돌이 바삐 가다가 뒤돌아다보며 말했다. “우리 진주성 쌓는데, 한 몫 하겠다고 간다.” 진주성 수축의 일로 백성들의 어려움이 이만저만 아닌데 스스로 굴러가서 성돌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스님은 돌의 말이 기특하여 진주성을 쌓는 일이 끝났다고 일러주었다. “우짜꼬, 성은 벌써 다 쌓았다 쿠더라.”
이 말을 들은 두 돌은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스님은 무지한 돌덩이조차 나라를 위해서 자신의 구실을 하겠다고 울며 나서는 모습을 보고는 감동하여 그 바위돌에게 아홉 번 큰 절을 올렸다.
진주시 명석면의 이름을 ‘운돌’, 곧 명석(鳴石)이라 한 이유는 이러한 이야기에서 유래된다. 그리고 명석면 신기리 동전(東田)마을은 옛날에 광제암의 스님들이 재를 넘나들며 동쪽 밭에 농사를 지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 이 마을의 동북쪽에는 스님이 운돌을 보고 아홉 번 절을 하였다는 구배골[九拜谷]이 있다. 한 쌍의 운돌은 골짜기 입구에서 서로 마주 보고 서 있었다고 한다. 옛날부터 이 한 쌍의 바위돌은 남녀의 상징처럼 생겼다고 해서 암돌과 숫돌이라 부르기도 하고, 달리 자웅석(雌雄石)이라 일컫기도 한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마을 사람들은 돌까지 나라의 일을 걱정하니 방치할 수 없다고 하여 명석각(鳴石閣)을 지어 돌을 모셔놓고 해마다 삼월 삼짇날이 돌아오면 제사를 올리고 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나라에 큰일이 생기면 이 돌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고 이곳 마을 사람들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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